성혜랑의 회고..< 2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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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편 ● 어머니 김원주 "결혼시키려하자 가출해 평여고 진학" 이 글은 김정남의 외할머니 김원주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다음 세대인 성혜랑, 성혜림 대를 거쳐 김정남, 이한영 대까지 3대에 걸친 회고글로써 본글중 앞부분은 성혜랑이 아닌 그의 모친 김원주에 의해 집필되었다. 김원주는 1920년대 개벽의 여기자였으며 분단 후에는 노동신문 초대 주필을 맡았을 만큼 당대의 문필가였다. 그녀는 손자 김정남이 성인이 될 때까지곁에서 보살폈다. 책을 빨리 읽는 편이지만 이 글은 일주일을 붙들고있었다. 분량도 방대하고 내용도 그냥 흘려버리고싶은 부분이 없었다. 글은 모두 어머니의 이야기였고 여성의 이야기였기에 남성 독자에게는 얼마나 흥미로울지는 모르겠으나 아들을 둔 엄마인. 그리고 한 줄도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원주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궁핍하게 성장했다.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대에 글을 알고 천자를 읽었던 그녀의 어머니를 냉대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의 둘째 오빠가 자신의 후처에게 돌맹이를 던졌다하여 심하게 매질했고 결국 오빠는 그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오빠는 당시 열두살이었다. 김원주의 어머니는 김원주가 자신의 팔자를 닮지않기를 바랬고 궁핍한 형편으로도 덕신초등학교를 졸업시켰다. 김원주는 졸업 후 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을 시키려 하자 집을 떠나 평양에 있는 이모집으로 갔고 평양여고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평여고라면 1920년대 조선의 서북지방에서는 으뜸으로 치는 학교였다. 입학시험을 치러 갈 때를 그녀는 다음처럼 회상한다. 《 "나는 원서를 내긴 했으나 그 후 공부를 계속할 아무 방도가 없었다. 시험을 치러 갈 때 입고 나설 옷도 신발도 없었다. 이모네 집에서 막 일을 돕다보니 때 묻은 광목 저고리는 왠만한 하녀 주제만도못했고 무엇보다도 당장 신고 나설 신발이 없었다. 이모네 집에는 신이라곤 다 꿰져 발뒤꿈치가 흙에닿는 이모의 넝마 고무신이 있을 뿐이었다. 시험을치려면 연필 꽁다리라도 하나 있어야겠는데 그것을 얻을 도리가 없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두 발짝 안팎에 벗어지는 이모의 꿰진 고무신을 끌고 맨손으로 평여고 문앞까지 갔다. 시험을 치러 온 아이들 뿐 아니라 한 아이몫에 두셋씩 학부형이 따라와서 학교 운동장이며교문 밖까지 사람들이 하얗게 들끓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며 빨리 시간 되기만을 기다렸다. 세상의 빈부 귀천의 까닭을 모르던 나는 나의 어려움이 단지 불측한 아버지로 인한 불행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으며 가난도 불행도 참을 수 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드디어 종이 났다. 평여고 운동장은 교사보다 움푹 내려앉아 있었다.거기로 수험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신발이 발에 걸리지 않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는데운동장까지 내려가는 층계를 내려딛으려니 신발이 자꾸 벗겨져 내려갈 수가 없었다. 운동장에 미리 내려가 있던 애들, 학부형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는 듯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무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얼른 얼른 층계를 내려가고 말았다. 평양의 이른 봄 그 돌층계는 얼음장같이 차가웠으나 그것도 감각하지 못한 채 온 몸이 부끄러움에 달아 고개를 숙이고 달리듯 내려갔다. 시험지를 받아놓고도 연필이 없어 쓰지를 못했다.옆에 앉은 아이의 길다란 연필이 가득 든 필갑을 곁눈질해 보면서도 차마 빌려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다. 극도의 가난은 연필 한 자루 빌려쓸 용기마저 앗아버리는 모양이다. 나는 그 애가 답안을 다 쓴다음 말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시험관이 다가오더니 왜 안쓰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시험관이 자기 연필을 주머니에서 뽑아 주었다.(나는 그 연필로 그 후 한 학기를 다썼다.) 나는 제일 먼저 시험지를 내고 교실을 나왔다. 학부형들이 몰려와 시험문제를 묻고, 그렇게 쉽던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자신이 있던가 자꾸 물었으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고 빨리 그자리를 떠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이 때 교사 현관에 팔이 완장을 두른 상급생이 나타나더니 "김원주!"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이날 신입생 안내를 맡은 상급생 김제황이었다. 그는 어떻게 언제 알았는지 들고 나온 운동화를 한 켤레 내 발 앞에 놓아 주었다. "내가 신던 실내화야, 이걸 신어." 내가 부끄러워 쳐다보지도 신지도 못하고 섰는데 "부끄러워 말아. 너 같은 처지 아이들이 한 둘인 줄 아니? 가난은 수치가 아니야." 그때의 고마움과 격려를 나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없었다. (중략) 입학식장인 강당으로 들어섰다. 상급생들이 나란히 서서 가슴에 꽃을 한 송이씩 달아주고 입학식 절차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왈칵 들기도 했다. 입학식은 순례대로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학급편성이 있었는데제 1반 첫 이름에 나를 불렀다. 나는 160명 신입생중 첫째로 합격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한푼의 입학금도 월사금도 낼 수 없는 내가 입학식에 참가하다니... 일이 점점 더 힘들게되어가는데 그냥 서 있는 내가 뻔뻔스럽고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반편성이 끝났을 때 교무 주임이라는 키 작은 대머리 선생이 손을 들며 다음에 이름 부르는 학생은 옆으로 좀 나서라고 했다. 이 학생들은 보호자의 확인서와 보증인 인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첫 자리에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리운 아이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 중에는본인이 무슨 문건을 가지고 있던 애들, 또 뒷좌석에서 여기 있다고 손을 들고 일어나주는 보호자들이있어 그럭저럭 제 자리에 다시 들어서고 나 혼자만이 남았다. 애들이 쳐다보는 것은 이제 둘째 문제였다. 언제까지 받아올 수 있냐고 선생이 물으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것만 열심히 궁리하고 있었다. 이때 위쪽 학부형석에서 귀 익은 소리가 들렸다. "김원주 보증인 여기 있습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남포득신학교 교장 선생의 자그마한 선 키가 학부형석 막꼬리에 파묻혀 그의 도수 높은 안경만이 보이었다. 나는 줄에 들어서는 것도 잊고 솟구치는 눈물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중략) 정문 옆 칠판에 월사금 미납자 명단 맨 첫자리에는매달 내 이름이 나붙었다. 학생들이 모여 내 이름을 수군거릴 때면 나는 공부의 애착도 긍지도 다 사라져버리고 저 흑판을 주먹으로 쾅쾅 깨버리고 학교문을 뛰처나가고 싶은 생각이 머리 끝까지 치밀곤했다. 그러나 "나는 지식욕을 채우려는 욕망이나출세를 하려는 허영이나 소위 여학생 시절의 달콤한 꿈을 즐기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공부하는 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이며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딸의 의무이며 나아가서는 봉건을 짓부수는 무기이며 일본놈의 굴욕에대항하는 방패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중략) 졸업식 날이 왔다. 졸업생의 최고 영예인 답사도 내가 하고 졸업생을 대표해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졸업장. 그것을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으며 모든 굴욕, 울분, 수치를 참아왔던가. 그것은 4년간의 나의 피땀의 결정체이기도 하며 다시 공부를 계속할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180명의 졸업장은 내 이름으로 받았다. 졸업장은 학업 성적 순위대로 1등 2등 4등으로 놓여있었다. 졸업장을 받아 안는 순간 응당 첫 자리에 놓여있어야 할 1등은 없고 2등의 졸업장이 있었다. 웬일인가? 흥분해서 잘못보았는가? 아니다 한 장씩 개인에게 돌려줄 때도 내 이름은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자 교장실에서 불렀다. 교장은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그간 밀린 학비, 식비가 300원인데 그것을 다 갚을 때까지 네 졸업장은 학교에 보관해 둔다." 이리하여 나는 졸업장 없는 졸업생이 되었다. 1928년 3월 25일이었다. 》 이후 김원주는 국비가 지원되는 일본 잠사학교를나오고 조선에 돌아와서 양봉공장에서 일하다가 <개벽>에 기자로 들어갔다. 이후에는 <매일신보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나 결혼하고 3남매를 낳으며 12년간 사회에서 단절되어 지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회>에 가입하여좌파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길에서 우연히 본 조선부녀총동맹회의 강령때문이었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여자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져야 한다.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아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꼭같이 배울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일부다처제를 폐지해야 한다. 공창제를 없애야 한다. 이는 평생을 두고 외치고 싶었지만 외칠 수 없었던그녀의 속마음이었다. 그녀의 남편 "성유경" 또한 지주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에 깊게빠져 자신이 물려받은 모든 재산과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원주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월북했고 이후 그곳에 체류했다. 아이들과 재회한것은 6.25동란 때이다. 당시 딸 성혜랑은 서울에서 진명여중을 거쳐 이화여고에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후 모든 가족은 월북하게 된다. 토지가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추종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부자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골고루 나누어준다고 하니 말이다. 따라서 김원주와 같은 부유한 사람이 공산주의를 추종하게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녀가 공산주의로 돌아서게 된 계기는 <빈부의 격차와 부의 재분배>가 아닌 <기회의 평등, 즉 누구나 노력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실력만 있다면 인정받을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였던것이다.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6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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