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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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 한국전쟁 전야 ㅡ 지리산 토벌 (1) / 지리산 ?■ 한국전쟁 전야 ● 지리산 토벌 1 ○ 지리산 1948년 10월 26일 여수를 탈환한 전투사령부는 국군 토벌대에게 쫓겨 지리산에 들어간 김지회 부대를 총력으로 추토할 준비를 하였다. 그 계획은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거창-함양의 선에 포위망을 구성하고, 타격부대로 지리산맥을 소토함과 아울러 사산할 반군을 포위환으로 포착하는 데 있었다.
◇ 지리산 지리산맥은 소백산맥 남쪽 끝에 있는 큰 산 덩어리로서 주봉은 1915미터의 지리산이다. 한국의 3영산 중 하나이며 명소 고찰이 많다. 구례 북쪽 화엄사가 그 대표이다. 천고에 도끼질을 하지 않은 원시림으로 덮여 게릴라의 근거지로는 한국에 이 이상인 산은 달리 없다. 그 넓이는 동서 50킬로미터, 남북 3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여수 탈환전이 막을 내릴 무렵 제3연대는 남원, 제4연대는 구례, 제1연대는 화개장-하동, 제6연대는 거창에 각각 주력 또는 일부가 주둔하고 부근을 경비하면서 외관선 구성에 힘썼다. 신상철 중령이 지휘하는 제15연연대는 화개장-하동의 섬진강 선에 전개하여 백운산과 지리산을 차단하면서 반군의 탐지에 힘쓰는 중, 10월 21일 옥곡의 전투 이래 행방불명이었던 제15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제1중대장 조시형 소위가 하개장에 나타났다. 그들이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현장은 많은 사병들이 목격했던 터라 모름지기 총살 당하였을 것으로 여겼는데, 무사히 귀환하였기 때문에 광주로 호송하여 사정을 청취하였다. 최 중령의 석명은 “결코 반군에 합류한 것이 아니다. 부대 지휘의 수단을 잃었고, 포위되어 저항의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반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젯밤 비바람으로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서 탈출하였다” 는 것이다. 이 석명은 조시형 소위의 진술과 일치하였다. 의심이 풀린 최 중령은 11월 12일부로 제4여단(청주, 유재흥 대령) 참모장에 보임되었다. 영전이었다. 하지만 방첩과에서 그 진술 조사를 깊이 연구하고, 당시를 목격하였던 장병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이상한 점이 있었고, 이적행위도 없지 않았다. 때문에 육군본부에서 출두를 명하자 최남근 중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총사령부는 즉시 전국에 비상수배를 하여 대전에서 최 중령을 체포하였다. 군법회의에 부쳐진 최남근 중령은 체념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지회부대와 합류하였을 때 김지회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같은 말씨, 같은 표정, 같은 함경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간적 양심에서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반군에서 탈출한 것은 어제까지 전우였던 국군과 골육상잔의 전투를 하는 데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상관과 동료와 부하들에게 괴로움을 끼칠 수 없었다. “김지회의 아내가 묵인(묵인(默認))하는 가운데 탈출하였으나, 두 겹, 세 겹의 경계선을 돌파(돌파(突破))하느라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국군을 배반한 반역자이다. 때문에 서울에 출두하면 군법회의에 부쳐지고, 다시 김지회에 관하여 증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반란군에게도 배반하는 것이 되어 이중 배반자가 된다. 때문에 출두 명령을 받게 되자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 생각으로 도피하였다”. 최남근 중령은 1949년 5월 26일, 수원(수원(水原)) 산자락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최남근에 관하여 <한국전쟁사>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그는 두뇌가 명석(명(明)?)하고 인간성이 풍부하였다. 때문에 상관과 동료들은 그를 신뢰하였고 부하들은 심복(심복(心服))하였다. 이것을 기화(기화(奇貨))로 한 그는 각 연대를 전전(제6, 제8, 제15연대장 역임)하면서, 좌익세력을 부식(부식(扶植))하는 데 전심전력(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15연대 창설에 임명되고서는 복심 부하가 없기 때문에 세포 부식을 할 수 없게 되었던 듯하다. 마산(마산(馬山))에서 출동함에 즈음하여 그는 정황 설명도 하지 않았고, 훈시하지도 않았으며, 중대에 실탄도 분배하지 않았다. 그가 실탄을 배분한 것은 하동(하동(河東))에서 광양(광양(光陽))으로 향하기 직전 중대장의 항의를 받고 나서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은 그가 지휘하의 대대를 반군에게 합류시키려 하는 의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반군과 접촉하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각 중대는 적극적으로 교전(교전(交戰))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에 의심을 품은 부하가 그를 사살(사살(射殺))할 것이라는 위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차량(차량(車輛)) 회수를 구실로 삼아, 스스로 반군과 합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조시형 소위는 연대장을 보좌하는 입장에서 불행하게 포로가 된 거이 밝혀졌기 때문에 아무 혐의 없이 원대(원대(原隊))에 복귀하였다. 그는 후에 소장으로 누진(누진(累進))하였고, 1963년에는 무임소장관을, 후에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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