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7편 |
---|
[ 7 ]편 ☆☆ 6편은 <세계> 편에 있습니다. ■ 한국전쟁 전야ㅡ 지리산 토벌 (6) / 김지회, 홍순석의 최후 한웅진 대대는 본부를 지리산 서북 산자락 입석리. 운봉 동남 8킬로에 설치하고 일대 를 수색하였다. 대대의 정보계 하사관은 김 갑순 상사였다. 그는 주민과 협조하는 데 뛰 어나, 이제까지도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여 대대가 전과를 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갑순 상사는 사병 2인을 데리고 지리산 속 산내면 반선리 부락에 잠입하였다. 반선 리는 입석리에서 서남 6킬로, 20여 호의 작 고 가난한 산가였으나, 과부가 경영하는 선 술집이 있었다. 김 상사는 몰래 선술집에 들 어가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반란군이 왔던 적이 있나 ?” 하고 물었다. “이따금 온다” 하고 대답하 였다. “만일 그들이 오면 술도 밥도 주라. 될 수 있으면 숙박하게 하면 좋겠다. 두둑하 게 사례하겠다”. 과부는 그러마 하고 약속하 였다. 김 상사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4월 9일 03:00 무렵 반선리 청년단장이 숨 차게 달려와 “지금 30여 인의 반란군이 주 막에 와서 술과 담배를 달라고 한다” 하고 급보하였다. 한웅진 대위는 60여 인을 트럭과 스리-커터 에 태우고 6킬로 되는 산길을 급행으로 달 려 반선리에 도착하였다. 반란군은 자동차 소리를 듣고 도망쳤다. 그러나 다행히 새벽 달이 흐릿하게나마 비쳤기 때문에 자동차 위에서 맹사격을 퍼부었다. 반란군 7인을 포로로 잡고 17인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 다. 포로 중에는 반란군의 문화부장이 있었다. 그는 7구의 시체 중 토끼가죽 옷을 입고 ‘홍 순석’의 인감을 가지고 있는 유체가 홍순석 당사자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정치부장과 후방부장의 시체도 있었다. 김지회 부부도 함께였다고 하였으나, 그들 부부의 시체는 없었다. 김지회 부부는 운 조헤 도망한 것으 로 추측되었다. 반선리 뒤 손 속 오지에 덕동리. 달궁이라는 산마을이 있다. 덕동리는 만복대 동편 산자 락이며 남강의 수원이다. 그 산골에 duk를 포함한 여러 명의 반란군이 들어와 있다는 주민 신고가 있었다. 김갑순 상사는 두 명의 사병과 경찰관 2인을 데리고 달궁에 잠복하여 어려움 없이 부인 한 명을 체포하였다. 그 부인이 김지회의 아 내 조경순이었다. 제주도 출신 간호사이며 당시 20세였다.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하였으나, 반선리의 기습으로 헤어지게 되었고, 실은 자기도 김지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 였다. 그 근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김지회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김갑순 상사는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 반 선리 부락민에게 “혹시 까마귀가 모여 있는 것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락민은 ‘연정 에 까마귀가 많다고 하였다. 부근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현장에서 600미터 가량 떨어진 산 속에 썩은 시체가 있었다. 용모로 알아볼 수 없이 썩었고, 평상복을 입 고 있기 때문에 신분도 계급도 알 수 없었다. 남원에 수용되어 있는 김지회의 아내 조경 순에게 김지회의 신체상 특징을 물은 결과 구례 전투에서 등에 총상을 입었다고 하였 다. 그 시체 등에 총상 자국이 있었다. 시체 를 남원에 운반하여 조경순에게 대면시킨 결과 그녀는 울면서 김지회가 틀림없다고 증언하였다. 이리하여 반란군 수뇌부는 토멸되었다. 여 순반란(1948.4.3)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 난 때이다. 김지회와 홍순석의 목은 비공개 로 요로의 관계 인사에게만 전시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반선리 주막집은 누구인가에 게 습격을 받고, 주인인 과부는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란군 잔당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게릴라 지역이 된 지구의 일반 주민은 많든 적든 피아의 틈에 끼어 희생을 강제 당하였 던 바, 김지회 일당이 반 년 동안이나 포착되 지 않은 것은 주민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 며, 끝내 명운이 다한 것은 주민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벌 후에 정일권 사령관 이하 토벌군 수뇌 가 참석한 좌담회 기사(<한국전쟁사>(1) 48 3-484쪽)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덕유산에 걸 친 이른바 게릴라 지대는 완전히 게릴라의 온상이었다 한다. 이 지역은 이른바 문명에서 동떨어진 뭍의 고도 지구였다. 산간의 빈농과 화전민 부락 은 예대로의 너와집과 토벽이며, 산에 눌려 찌부러질 듯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지구 위원회에 의하여 주민의 9할이 적화되었고, 구례면 등에는 5000인을 세는 세모조직이 있었으며, 입으로 하는 선전으로는 계명이 턱도 없었다고 한다. 예컨대 북조선의 인민공화국 국기는 알지만, 한국의 태극기는 알지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 의 이름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때문에 경찰 도 들어갈 수 없었고, 일종의 치외법권적인 지 역이 되어 있었다. 정일권 사령관에 따르면, “정부와 국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게릴라가 소탕 토벌됨에 따라서 그 사상의 공허함과 게릴라가 원인이 화의 참상에 정나미가 떨어져 귀순자가 점차 증가하였다. 뜨거워지는 것도 빠르지만 차가 워지는 것도 빠르다. 4월 중순까지 약 40퍼센 트의 반도가 귀순하고, 민간인 2-3000인이 자수하였다”는 것이다. 제3연대 제3대대는 반군 본부를 섬멸한 공에 의하여 한웅진 대위 이하, 전 장병이 일계급 특별 진급의 영예가 주어졌다. 특히 포착의 실마리를 만든 김갑순 상사에게는 100만 원 의 상금과 훈장이 수여되었다. 이상.. 8편에서 계속~~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