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알기나 하는지?/(1948~1953)..0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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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편 ※ 6.25전쟁을 알긴해.?? "1948년~53년기간"
? * 미국 : 아무 생각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를 재건 (+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 * 소련 : 한국이 지녀온 통합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주의 건설" 하기로 결정 ? 북한의 침략에 대한 최초 암시는 하지장군이 워싱턴에 '공역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알린 1946년 봄 이었으나,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시발점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은 철수중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1949년 초 이후로 잡을 수 있습니다. ? ? ●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 1947년 초부터 김일성은 조선인 '의용군'(수만명)을 급파하여 마오쩌뚱과 함께 싸우게 하고, 기존의 조선인 부대를 사단 규모로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1950년 10월 중공군의 한국전쟁에 투입의 선례가 됩니다. ? 김책(1903~1951)의 지휘 아래 1947년 4월 만주로 이동하였으며, 그 무렵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당 병력의 15~50%가 한국인(북한)이었다. 이들은 중국공산군(Chinese Communist Forces / CCF) 또는 '중국공산군계 한국인'으로 불리었습니다. ? 중국내 한국인 군대의 시초는 1941년에 창설된 '조선의용군'입니다. 중국 국민당이 전후 보복 와중에 만주지역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학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공산당으로 끌어들여질 수 밖에 없었죠. ? 1947년 5월 한반도 북부는 병사들의 숙박지로 이용되었으며, 흥남의 폭약공장의 생산물 등은 중국으로 선적되었죠. 중국에서 싸운 한국인 부대는 1948년 ~ 1950년 가을에 걸쳐서 북한으로 흘러갔습니다. (1948년 1만여명, 1949년 4~5만명, 1950년 4~5만명) ? 1948년 4월 조선인민군 간부진은 80%이상이 소련파가 아닌 중국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중국내전의 베테랑(방호산, 왕자인, 홍림, 노철용)들로 구성되었습니다. ? 1949년 여름에 남한의 도발(옹진반도 전투)에 북한이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은 이유는 훗날 한국전쟁의 침공 타격력이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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