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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역사,장문}.동북항일연군 중의 조선족 장병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2 2022-06-09 22:14:42

중국 인민들의 14년 항전사는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중국공산당이 세운 반일빨치산농공의용군 등 항일 무장투쟁에서 시작됐다.동북항련이 창설된 후, 많은 조선족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당의 지도 아래 전국 각 민족과 함께 혈투를 벌여, 일본 침략자들에게 심한 타격을 주어 중국 인민 항일전쟁과 세계 반파시스트 투쟁의 승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 항련 창설로 희생된 조선족 항일영웅



동북항련은 통일제도에 앞서 반일빨치산, 홍군빨치산, 항일동맹군, 반일연합군, 동북인민혁명군 등 발전 단계를 거쳤다.1932년 초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는 양린(楊林)양정우(楊靖宇)동장영을 남만(南滿)동만(東滿)으로 항일무장을 발전시켜 반석(反石)옌지(延吉)허룽(和龍)훈춘(琿春)왕칭(汪淸) 등 반일 게릴라들을 창설하고, 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조상지, 풍중운, 주보중이조린이 북만과 길동 지역으로 건너가 바옌, 헬렌, 주하, 탕원, 밀산, 닝안 등 빨치산 창설을 이끌었고, 이들은 항일연합군 3, 4, 5, 6, 7군으로 성장했다.의용군 여부와 산림대는 항일연군 8, 9, 10, 11군으로 재편됐다.결국 동북항련은 11개 군단으로 구성됐다.





동북항련 제1로군 경비여단 일부 장병들


항련 창설 초기에는 젊은 조선인 항일사들이 많이 희생됐다.이홍광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단 참모장, 박종한 제1군 참모장, 양정우와 함께 동북항련 제1군을 공동 창설한 한호이민환한인화, 항련 제2군 주요 창설자인 박동근박길양성룡 등이 항전을 위해 희생된 조선족 항일영웅들이다.

이홍광(본명 이홍해)과 박한종은 양정우 장군의 참모장을 지냈다.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은 지린(吉林) 반석(1石)에 제1군 독립사단을 세우고 양정우(楊政宇)를 사단장 겸 정치위원으로, 리훙광(李紅光)은 참모장을 맡았다.이홍광은 1910년 조선 경기도 용암군에서 태어나 1932년 6월 반석공농의용군에 참여하였다.의용군은 나중에 중국 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총대로 개칭하였고, 양정우는 정위를 맡았고, 리훙광은 교도대 정위를 맡았다.

1934년 2월 21일 동북항일연합군 지휘부가 설립되었고, 그 아래에 1개 독립사단과 8개 지대를 거느리고 양정우가 총지휘를 맡았으며, 리홍광은 참모장을 맡았다.리훙광률(李紅光5部)은 1935년 5월 12일 일본 괴뢰군(?斗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후, 중태로 랴오닝(遼寧)성 신빈(新賓)현에서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젊은 항일영웅을 기리기 위해 '동북항련 제1로 군가'를 작곡한 양정우는 "우리 하늘에 높이 걸려 승리 군기의 붉은 빛을 비추며 돌격하라.우리 1번 노군!


박환종이라고도 불리던 박한종은 1911년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1919년 랴오닝 성 칭위안 현에 정착했다.그는 1928년 지린 반석현에서 반일혁명 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고, 양정우는 군단장 겸 정치위원, 박한종은 군 참모장을 맡았다.박한종은 1935년 1월 11일 지린(吉林)성 린장(崖江) 홍토애(紅土崖)에서 적들과 싸우다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호,이민환,한인화 역시 양정우가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고급 지휘자다.한호는 1905년 지린(吉林)성 화뎬(華뎬)현에서 태어나 1930년 공산당에 입당해 중국 공농홍군 32군단의 남만유격총대 2대대대장,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단 3연대장과 1사단장을 역임했다.1935년 8월 28일 통환도로 간강산 이도구 유가길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30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민환은 1군 1사단 참모장으로 1913년 북한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가족을 따라 지린(吉林)성 옌지(延吉)현으로 이주했다.이민환은 1933년 농민자위대를 창설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단 직속 소년련으로 개편됐다.이민환은 1934년 봄 소년들을 이끌고 유하현 삼원포 달우구 지역에 삼원포의 일본군 수비대를 매복 습격해 대승을 거두며 30여 명의 적을 섬멸했다.그는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단 참모장을 맡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단을 이끌고 남만 근거지를 세웠다.1936년 7월 15일 서정부대 사단과 경호원 60여 명을 이끌고 본계 근거지로 우회해 랴오양(遼陽)과 본계(本溪)의 접경 마천령까지 갔다가 일제 괴뢰군(?軍)과의 전투에서 23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한인화는 양정우가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동북항련 제1로군 경호여정위다.앞서 양정우가 작사한 항련 제1로 군가(軍歌)를 한인화가 작곡했다.한인화는 동북항련 제1로군 참모처장 겸 경호여정위 시절 양정우를 도와 전투를 지휘했고, 여러 차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전투에 성공했다.1939년 항일투쟁 환경이 열악했던 한인화는 경비 여단을 이끌고 1년간 경중기관총 30여정, 소총 3000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20만여발을 노획했다.1941년 봄, 한인화는 닝안(寧安)으로 인솔하여 활동하다 징보호(景泊湖)에서 일본군과 조우해 작전을 지휘하다 총에 맞아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항련 2군은 조선족이 많은 옌지왕칭허룽.훈춘 등지의 반일 게릴라 부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박동근 박길 양성룡은 동만 지역의 항일 무장 지도자다.박동근, 본명은 박동화, 1904년 7월 17일 북한 함경북도 화대군에서 태어났어.1920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현 일란구(伊蘭區)에 정착해 조선독립군이 왕칭(汪淸)현에 세운 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습을 받았다.1933년 1월 옌지(延吉)현 몇 개 빨치산이 합병해 만든 옌지 반일 게릴라 대대는 130여 명으로 박동근 초대 대대장이었고, 박길임 초대 정위는 박 대장이 맡았다.불행히도 박길박동근은 이후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동만특위 숙청에 의해 확대 오살됐다.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당원 양성룡은 왕칭라쯔거우(汪淸羅子?) 등에 게릴라를 세우고, 왕청공농유격대와 왕청항일유격대를 차례로 세웠다.김일성은 1932년 11월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東만특위)의 파견을 받아 왕칭(汪淸)현에 파견돼 왕칭(汪淸)유격대대를 창설하고, 대대정위양성룡(梁成龍)을 대대장으로 하는 90여 명의 대대를 창설했다.1933년 12월, 양성룡은 '민생단'으로 몰려 일체의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는 항전을 계속하다 1935년 1월 근거지를 위한 식량 반출 과정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왕칭은 항일 빨치산 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편입됐고, 김일성은 2군 3사단장으로 근무했다.


양린은 동북항련 창설 초기의 중요한 지도자로, 동북항련 제1군과 제2군의 형성과 창설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북항일전장에서 희생되지 않고 홍군의 대장정 승리 후를 희생했다.양림은 조선 평안북도에서 1898년생으로, 1924년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1925년 황포군 교관을 지냈으며, 교사로 재직하던 중 예정독립단(葉正獨立團)에서 제3대 대대장을 역임했다.양린은 1927년 8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중산대학과 모스크바 보병학교에서 공부했다.1930년 3월 소련에서 귀국해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으로 근무하던 양린은 그를 동만특위 위원 겸 군위 서기로 보냈다.그의 지도 아래 동만지역인 옌지(延吉)와 허룽(和龍), 훈춘(琿春), 왕칭(汪淸) 각 현은 항일 빨치산 대대를 창설해 항련 2군의 수립과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1932년 5월 만주성 위군서기 양린(楊林)이 중공반석(石石)중심현 위원회를 지도하여 반석공농의용군을 창설하고, 만주성 위원회의 양정우(楊政宇)의 지도를 받았다.그 부대는 중국 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총대로 개편돼 동북항련 제1군의 전신이다.양린은 1932년 7월 상하이(上海) 당중앙(黨中)회의 후 쑤(蘇) 구역을 옮겨 일했다.양림은 1936년 2월 23일 홍군 동도황하 전투에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이추악도 조선족으로 1926년 10월 우한중앙군사정치학교(황보군교 우한분교) 여학생 팀에서 조일만과 동창으로 황푸 6기생이다.1927년 8월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입학한 뒤 2년 만에 귀국해 만주성 위기관에서 근무한 뒤 주허(珠河) 중심부 여성부 부장과 연수(延壽), 팡정(方正) 양현의 서기를 지냈다.이추악은 1936년 9월 3일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뒤 퉁허현 성서문 밖에서 35세의 나이로 사살됐다.

동북항련 3군 1사단장 겸 하동유격사령관인 이복림 밀산항일무장(항련 4군의 주요 출처) 창설자, 항일동맹군 4군 1연대장, 후임 8군 1사단 정치부장인 김근, 항련 6군 1사단장인 마더산, 정치부장 서광해 등도 동북항일 전장에서 희생된 조선족 영웅들이다.

여러 명의 조선족 장성이 군 이상의 직무를 담당한다

1936년 2월 20일 동북항련은 '동북항련통일군대건제선언문'을 발표하고 인민혁명군반일연합군항일동맹군을 모두 11개 군으로 재편성한다고 발표했다.그 후 군 위에 3개의 노군제(路軍建制)를 세웠다.


항련 제3군(귀북만성위 지도)의 김책 정위는 동북항련 직책이 가장 높은 조선족 장령이다.김책은 북한 함경북도 성진학성 출신으로 유년기에 옌지(延吉)로 이주해 대성중학교 재학 시절 지하청년진보단체에 참여,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김책은 1936년 8월 이후 동북항련 3군 4사단 정치부 주임, 3군 정치부 주임, 제3로 군정위, 중국 공산당 북만성 당서기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항련은 11개 군에서 초대 군단장 11명, 후임 군단장 7명이다.이 중 제3군이 허형식, 제7군이 최석천, 이학복이 조선족이다.이희산(李熙山)이라고도 불리던 허형식은 1909년 조선 경북 선산군(善山軍)에서 태어나 1929년 빈현(賓縣)에서 혁명활동을 하였다.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하동지대의 정치지도원, 제1대대 대대장을 맡아 주하의 항일유격구 창설에 앞장섰다.1935년 1월 28일, 하동유격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사단으로 개편되었고, 허형식은 2연대장, 후임 사단 정치부 주임, 사단장과 제3로군 참모장을 역임하였다.허형식은 1942년 8월 3일 경안현 청봉령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33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항련 제2군 참모장 최석천 7군단장,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들이 1922년 중국으로 망명했다.운남강무당(雲南江武堂)을 졸업하고, 1925년 황푸(黃浦)군교 교관 겸 제5기 6구대 구대장을 지냈다.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최석천은 1927년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고, 1928년 헤이룽장(黑龍江)성 지역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다.김정국,마덕산,서광해,김성강 등 조선족 항련장교들의 혁명 길잡이이자 입당 주선자이기도 하다.최석천은 1932년 10월 중국공산당 중앙현위원회 지도하에 요하현 최초의 조선족 항일무장특무대를 조직했다.

1933년 4월 21일, 특무대는 40명의 팀으로 랴오허의 농공의용군을 창설하였다.부대가 항일동맹군 4군에 편입된 뒤 최석천은 4연대 참모장과 2사단 참모장을 지냈다.1936년 11월 항련은 제4군 제2사단으로 제7군을 조직하였으며, 최석천은 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37년 3월 제7군 대리를 맡았다.1937년 10월 동북항련 제2로군(東北抗聯二路軍)이 창설되어 제7군단은 제2로군(二路軍)의 지휘 아래 있으며, 최석천(崔石泉)은 제2로군 참모장을 맡아 주보중(周保中)의 군사지휘의 주요 조수가 되었다.

이학복은 항련 7군단장이다.1902년 지린(吉林)성 옌지(延吉)현에서 태어나 1915년 온 가족을 따라 헤이룽장(黑龍江)성 라오허(?河)현으로 옮겼다.이곳에서 그는 둔장 자격으로 현지 인사들에게 연락해 항일운동에 투신해 용하반일총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933년 7월 그는 요하현 반일 게릴라 대장을 발기했다.부임 후 첫 전투에서 그는 팀을 이끌고 오림동 괴뢰군의 거점을 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섬멸하고, 13대의 소총을 노획하였다.이학복은 부대를 엄격하게 훈련시키고, 병력을 널리 모집하며, 급료피복과 총기와 탄약을 징집하여, 대오를 갈수록 강하게 하였다.그는 연이어 몇 십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조직하여, 현지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 괴뢰군을 심하게 타격하였다.1935년 9월 중국 공산당 길동성위원회는 라오허 유격대를 항일동맹군 제4군 4연대로, 리쉐푸를 4연대장으로, 후 4연대를 2사단장으로, 리쉐푸를 사단장으로, 1938년 1월 7군단장을 맡기로 결정했다.이학복은 오랜 생활환경 속에서 피로가 쌓여 병이 났고, 불행히도 몸에 중병을 앓아 반신불수가 되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쪽 다리를 끌고 제7군을 지휘하다 군단장 8개월 만에 36세로 병사했다.


항련 제2군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 제3군 제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도 조선족 장교다.황옥청은 1899년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어나 1905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목릉(木陵)현으로 집을 옮겼으며, 1934년 동북항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1937년 3월 동북항련 제4군 정치부주임을 맡았다.1940년 2월 20일 보청현 남쪽에 있는 석회 가마에서 황옥청 등 장병 20명이 괴뢰군에 포위돼 전투 중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정국(金正國)은 1912년 조선 경상북도 예천군(禮泉軍)에서 태어나, 1916년 랴오닝(遼寧省)성 콴뎬(콴뎬)현(콴뎬)현, 1922년 헤이룽장(黑龍江)성 탕위안(?原)현 고성강(古城?)으로 이주해 정착했다.1936년 5월 20일 치치(祁致) 중의 '명산대(明山隊)'는 동북항련 독립사로 개편되었으며, 김정국(金正國)은 독립사 지도부 주임으로 있다.

그해 6월 독립사단은 항련 제11군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김정국(金正國)은 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단 제1여단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1938년 5월, 일위군은 천여 명의 기병과 위군 제4교도대 보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제11군 활동 구역에 '토벌'을 개시하였다.김정국과 제1여단장인 장치국솔 1여단이 계동현 대압모산 앞까지 급습하자 장치국 등 80여 명의 지전사가 전사하고 수십 명이 남아 포위망을 빠져나갔다가 반역자에게 살해된 지 26세였다.



■ 동북항련 교도여단의 주력을 조직하다



1939년 초겨울, 동북항련은 장병만 2000명이 채 안 되는 등 전투와 생존환경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저우바오중(周保中주보중)은 동북항련 지도자 연석회의를 주재하고 "역량을 보존하고 강을 건너 소련 극동지역에서 야영하며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확정했다.

1940년 3월 19일 오전, 동북항련 지도자 저우바오중(周保中), 
리자오린(李祖兆), 펑중윈(彭中雲)은 소련의 하바로프스크(berley)에 있는 소련군 극동군구 사령부를 찾아 극동군구 지도자들과 항련부대가 강을 건너는 야영 정훈 문제를 논의했다.소련 측은 동북항련이 소련 쪽으로 이동해 휴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1941년 봄, 동북항련당위에 따라 통일적으로 배치되어 전략적 이동이 시작되었다.

1군단은 지린(吉林) 훈춘(琿春)에서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순조롭게 진입했다.제2로군은 라오허현에서 우수리강을 건넜다.제3군단은 수크와 오나라에서 흑룡강을 건너 소련으로 들어갔다.





1945년 7월 동북항일연군지도여단 일부 장병들이 함께 찍은 사진




동북항련부대는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 캠프 2곳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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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바오중(주보중)은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소련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아바나셴크 대장과 소련 극동지역에 남아 있던 동북항련부대를 동북항련 교도여단으로 개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전 여단은 4개 보병 대대와 3개 직속 중대로 편성되었다.여영연군관 직급은 항련 간부가, 여참모장정치부 주임후근부장일부 영련 부직군훈교관은 소군 장교가 맡는다.

1942년 8월 1일 하바로프스크의 캠프 페이스트에서 동북항련 소속 700여 명의 지도병들이 소련군 군복에 패대를 착용하고 수군 계급장을 달고 모여들자 소련 극동군 사령원인 아바나 쉔커 대장은 항련교도여단에게 소련극동의 홍기군인 제88독립보병여단 번호로 대외대호 8461부대를 수여하라고 명령했다.
주보중은 소령여단장(1943년 12월 중령으로 진급), 이조린은 교도여단 소령정위(1943년 12월 정치부여단장으로 옮겼다)였다.

많은 조선족 장병들이 교도여단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최석천은 대위여단 부참모장, 김일성은 제1영대위 대대장안길은 1영대위영정위강신태는 2영대위정위허형식은 3영대위대위영장(미착임)김책(김책임)은 3영대위정위를 맡았다.

여러 명의 조선족 장병들이 각 중대장과 연대 지도원을 맡기도 했고 소위 계급도 부여받았다.

조선족 장병들은 항련교도여단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1943년 초 항련교도여단사령부가 정리한 항련 제1로군 월경자 통계표와 제2, 3로군 월경자 통계표에 따르면 제1로군 173명, 제2로군 244명, 제3군으로 153명이 소속 부대원 11명 등 581명을 기록하지 못했다.'제1로군 월경자 통계표'에 따르면 조선족 장병은 김일성.안길.박성철오진우.임춘추 등 105명이다.제2, 2군 조선족 장병은 최석천 강신태 김광협 이영호 등 50명, 3군 장병은 김책 이민(여) 등 12명이다.소련에 들어온 항련 조선족 장병은 167명으로 약 28.7%를 차지한다.


개국 영수와 장수가 되다


1945년 8월 항련교도여단은 소련 홍군과 함께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했다.김일성은 항전 승리 후 항련교도여단 조선족 장병들로 구성된 북한 공작단을 이끌고 1945년 10월 북한으로 돌아갔다.김백문 이민 이재덕 씨 등 조선족 여군 3명은 이미 항련 간부인 이조린 진레이 우보합과 부부가 돼 남편을 따라 하얼빈 수화 지린 시에서 근무하고 있다.강신태, 최명석, 박낙권, 김광협, 이두익 등 10여 명은 동북조선족이 집중된 옌지(延吉)와 무단장(牡丹丹江) 지역에서 군사담당관으로 일하고 있다.나중에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북한의 국가지도자이자 개국장수가 되었다.


년 10월 김일성이 위원 8월이 연합하여 2조선회를 위원1946년 2월 8일 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6년 8월 28일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결속하여 조선노동당을 창설하였고, 1947년 2월 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으로 추대됐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1953년 2월 조선전쟁의 치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최석천은 1945년 10월 귀국 후 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으로 이름을 바꿨다.1948년 1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대장 계급, 9월 민족보위상을 지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일성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최용건은 인민군 최고부사령관을 맡았다.1953년 2월 조선혁명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공화국 차수로 승진하였고, 1957년 공화국 원수로 승진하여 조선 제2의 원수가 되었다.

이 밖에 항련교도여단 4명이 625전쟁에서 숨졌다.동북항련교도여단 1영정위 안길(安吉)은 인민군 평양학원장, 보안간부훈련대 대대장,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내다 1947년 12월 평양에서 사망했다.

항련교도여단 2영정위 강신태(姜信泰)는 1946년 5월 조선으로 돌아와 강건(姜健)으로 개명하고 보군 1사단장과 총참모장, 중장(中將) 계급을 맡았다.강신태는 625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 전선사령부 참모장을 지냈고, 1950년 8월 공습으로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북항련교도여단 3영정위 김책(金策)은 1950년 7월 인민군 전선사령부 사령관을 맡아 장군직을 부여받았고, 1950년 10월 동부사령관을 거쳐 대장 계급을, 1951년 1월 3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항련교도여단 중위 부연대장 최춘국(崔春國)은 1946년 인민군 제12사단장으로 소장 계급을 달고 있다가 1950년 7월 30일 전투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북한 국가부주석인 박성철 정무원 총리, 박덕산(귀국 후 김일.개명)은 모두 중요 군사직을 맡았지만 계급은 부여하지 않았다.박 씨는 귀국 후 인민군 사단장, 최고사령부 정찰국장을 거쳐 외교에 종사하며 외교부 부장으로 근무했다.김일은 인민군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을 지냈는데, 이는 정위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내각 부총리가자 농림상이었다.

조선인민군 창건 초기와 625전쟁 기간 중 중요 군사 직책을 맡았다가 공화국 원수로 승진한 사람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최명석(최광)이을설 호위총국장이었다.또 여러 명이 대장 계급과 상장 계급을 부여받아 조선의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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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6월 25일 전쟁의 분석..(1).연재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