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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 ?오 (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2 2022-07-08 06:18:20

전쟁전야 - 4편



한국전쟁 전야 (4) ㅡ 지리산 토벌 (3) / 구례 전투



백인기 중령은 향년 25세였다. 학도병으로 출진하여 일본방공학교에서 복무하고,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3월 말에 소위에 임관되었다. 1948년 5월에 군산에서 창설된 제12연대장에 발령, 6개월 후 반란군을 토벌 소탕하다가 순직한 것이다.


이리하여 반란군의 기세가 오르고 국군의 사기가 침체되기 시작할 때에 형세를 역전하는 전투가 발생하였다.


백인기 연대장의 소식이 불명해진 11월 4일 밤,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은 다시 연대장 대리에 임직되어 구례에 급행하였다. 그는 5일의 연대장 수색작전에서 뜻하지 않은 상처를 입은 제2대대 정비에 힘쓰면서 연대장의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11월 7일, 지난 3일 밤에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하사관교육대의 김두열 소위 이하 약 90인이 돌아왔다.


조사한 결과 그들은 짐꾼으로 무기와 약탈물을 운반하는 일을 하며 사흘 동안 지리산 속을 방황하다가, 느닷없이 김지회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공산주의 운동에 종사하라고 하며 한 사람당 400원의 여비 지급을 받고 석방되었다.


< 한국전쟁사> 는 김지회가 그들을 석방한 이유를 “무조건 사살하기보다는 감화시켜 동지로 삼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짐꾼으로 부렸으나, 감시 병력이 필요하여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석방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백인엽 연대장은 한밤중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하였으나, 반역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음 기회에 공을 세워 오명을 씻도록 하라고 훈시한 후 예비대에 돌렸다.


그 날 밤은 맑게 갠 가을 하늘에 달이 빛나고, 벌레 소리가 가을이 깊었음을 느끼게 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8일 04:00시, 반란군은 연대 주력을 공격하였다. 우선 학교 뒷산에 배치된 1개 중대를 공격하고, 국민학교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백인엽 연대장은 미리 원형으로 배치한 81밀리 박격포대(8문)를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적의 화광을 향하여 지역 사격을 가하였다. 이윽고 날이 새면서 쏜 탄환은 확실하게 적에게 적중하였다. 반란군은 혼란해지기 시작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역습을 개시하였다. 특히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던 김두열 소위 이하 하사관 교육대원에게 “오명을 씻을 기회는 지금이다” 하고 돌격을 명하였다. 김 소위 이하는 하나로 뭉쳐 돌격하여 적의 전선을 돌파하였다.


반란군은 05:00시 무렵 분산하기 시작하여 20여 인의 포로와 30여 인의 사상자 및 수백 정에 이르는 화기 탄약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연대는 백인기 연대장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 때의 포로는 구례 전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지회는 제12연대를 섬멸하여 국군부대 전체의 내응을 촉구하기 위하여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기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소형 총 뿐이었기 때문에 효과를 올리지 못하는 중 치열한 박격포의 포탄이 퍼붓자 사기가 떨어져 혼란에 빠졌다. 가기를 돌격 당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질 수밖에 없었다”.



구례의 전투에 관하여 백인엽 소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반란군의 매복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다음날 구례에 급히와서 연대의 지휘를 하였다.


여러 사정을 들어본 결과 구례면 면장의 백부가 공산당의 보스이며, 때문에 주민은 반란군에게 호의를 가지든가 적어도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국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자는 적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반란군 주력을 분쇄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반란군은 치안 유지를 위하여 분산 경비중인 국군 부대를 각각 격파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으며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3개 대대 이상이 되었다. 더구나 반란군에게는 경비 책임은 없기 때문에 그 주력은 비교적 안정되게 행동하고 있으며 모이고 흩어짐이 가능했다.


그에 대하여 우리 연대는 1개 대대 반 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경비상 활동에 지장을 받는다. 때문에 이제까지의 공격형 토벌로는 승산이 없고 도리어 기습을 받을 염려가 크다. 더구나 주민은 반란군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정보력에서도 반란군이 우세하다. 따라서 우선 철저한 전과를 올려서 주민의 신뢰감을 회복하고 협력을 얻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거기서 큰 전과를 얻은 반란군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토벌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반란군은 60밀리 박격포뿐이지만, 아군은 여순반란 때 지급 받은 81밀리 박격포 8문을 가지고 있다. 반군이 공격해 오는 경우 이 81밀리 박격포로 제압하고 숨쉴 틈을 주지 않고 반격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1개 중대는 구례역(구례 남) 4킬로) 경비에 파견해야 하였으나 다른 전력을 연대 본부가 위치란 구례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원형 진지에 배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봉성산(185미터)에는 이동호 중위의 중대를 배치하고, 81밀리 박격포 8문을 교정에 나란히 하여 주위를 사격할 수 있게 하였다”.


11월 8일 새벽 04:00시, 연대장실 전등을 향하여 반란군의 일제사격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구례역으로 통하는 행길과 서시천(西施川)을 따른 두 방향에서 각각 1개 대대가량의 병력이 일제히 공격해왔다. 적을 맞아 중대장 송호림 대위의 박격포는 반란군의 불빛이 보이는 방향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적은 동요하였다.☆☆☆까지


백 연대장은 각 중대에게 “앞의 적을 향하여 돌격” 하고 명하고, 옆에 있는 김두열 소위 이하에게 “적의 후방으로 돌격하라” 하고 명하였다. 김두열 소위는 반란 군의 포로가 되었던 치욕을 씻는 것은 이때라고 생각하였는지 함성을 올리며 돌격하였다.


날이 새면서 화엄사까지 적을 추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수백 정의 무기와 포로 20명을 노획하였다. 반란군 도주하면서 두 가마 분의 지폐와 고급 핸드백을 버리고 갔다. 핸드백은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의 것이었다. 후에 포로가 된 조경순의 자백에 따르면 그 때 김지회는 등에 부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후에 사살된 김지회를 식별하는 물증이 되었다.


연대가 전투에 승리하고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자 주민의 태도가 하루 아침에 변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정부에 청하여 난민에게 쌀을 배급하며, “반란군을 토벌하여 멸해야만 참 평화가 온다. 토벌에 협력하기 바란다” 하였다. 그 이후 반란군의 정보를 얻었다. 전투에 진 반란군은 주민에게 버림 받은 것이다.


구례 전투 1주간 후 11월 15일, 백인엽은 중령에 특진하였고, 11월 20일에는 창설하는 제17연대 초대 연대장에 발탁되었다. 이 제17연대는 옹진반도에 배치되어 적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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