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 ?오 (5)편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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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야..5편 한국전쟁 전야 (5) ㅡ 지리산 토벌 (4) ?/ 낮은 대한민국, 밤은 인민공화국 1948년 11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반란군의 출몰하는 지역이 확대되었다. 이제까지 구례 주변에 한정되었던 관공서의 습격, 방화와 약탈, 살인과 납치 등 습격 지역은 곡성, 남원, 무주, 장수,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 그리고 광양 일대로 확장된 것이다. 주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한국 치하인지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낮은 대한민국이지만 밤은 인민공화국이다” 하고 말한 것은 이 때의 일이었다. 낮은 국군이 토벌과 순찰을 위하여 오기 때문에 태극기를 게양하지만, 밤은 게릴라가 배회하기 때문에 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하여 약탈 등의 난을 피하여야만 하였다. 1948년 겨울, 게릴라의 거점은 지리산 일대, 백운산, 웅석봉, 둔철산, 정수산, 감악산, 달궁, 장안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잇는 남부 소백산맥 일대에 걸쳐 분산하여 설정되었다. 그리고 김지회는 항상 그 아내를 대동하고 있었다. 주민은 게릴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모른다, 알지 못한다 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윽고 겨울이 되자 게릴라의 활동이 뜸해졌다. 모든 수목이 낙엽 지어 백설이 산들을 덮으면 게릴라는 활동하기 어렵게 된다. 발자취가 남아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49년 정월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봄이 와서 눈이 녹을때가 되면 게릴라들은 꿈틀,법석거리기 시작 한다. 육군본부는 지리산 토벌부대를 다음과 같이 개편하였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남원) 사령관…정일권 준장(전 참모부장) 제3연대 (남원) 제3대대…(한웅진 대위) 제5연대 (부산)의 1개 대대 제9연대 (서울)의 1개 대대 제19연대 (대전)의 1개 대대 제1독립 (유격) 대대   …(김용주 소령)                                                     (계 5개 대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광주)     사령관…제5여단장 원용덕 준장 제20연대 (광주)의 3개 대대 제15연대 (여수)의 1개대대 제3연대 (남원)의 1개 대대                                                     (계 5개 대대) 즉 이제까지의 작전 지역이 횡적이었던 것을 게릴라의 움직임에 따라 종적으로 변경하고, 거기에 기동타격부대를 증가시켜 정일권 준장을 기용한 것이다. 이른바 1949년 봄의기운이 녹아들기 시작할때 토벌을 행했다. 1949년 3월 1일에 지휘권을 발동한 정일권 준장은 작전참모 공국진 대위, 정보참모 이유성 대위 (전 제12연대 제3대대장), 군수참모 이종민 대위 (1기생, 후에 준장), 인사참모 이극성 대위 (3기생, 후의 준장) 등의 보좌를 받으며 제1차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1차 작전은 남원, 구례, 화개장, 하동, 진주, 산청 등에 분산 배치한 각 대대에게 지역을 할당하여 1주일간에 걸쳐 지리산을 훑는 작전이었다. 우리의 노림수는 추위를 피하여 또는 식량 조달을 위하여 하산하는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다시 몰아 넣는 작전이었다. 각 대대는 1주간에 걸쳐 소탕 토벌하며, 각 곳에서 전투를 벌이며 반란군을 산으로 몰았다. 제2차 작전은 3월 11일부터 시작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각 고지마다 병력을 순차로 집중 이동하면서 철저하게 소탕 토벌하였다. 지리산에 더 머물 수 없게 된 반란군은 지리산을 버리고 거창, 안의 지역으로 분산해 갔다. 제3차 작전은 3월 16일부터 개시되어, 토벌대대는 거창, 함양, 하동 등에 토벌 거점을 이동시키면서 반란군을 찾았다. 거창에 거점을 설치한 것은 제3연대 제3대대 (한웅진 대위 (2기생. 후에 소장) 였다. 대대는 매일 산청, 안의, 위천 방면에 중대를 파견하고, 때로는 전력으로 출동하여 반란군을 탐지하였다. 다른 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각 대대도 한결같이 특기할 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공국진 작전참모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하였다. “지리산 주변은 대개가 가난한 농가이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주도)의 전성기에 주민 대부분이 공산주의화 되었다. 계몽운동은 용이하지 않았고 시간이 필요하였다. 반란군의 포착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주민들은 게릴라를 자기 집에 숨겨 두면서 모르오, 알지 못하오, 하고 부인하였다. 때문에 아무리 산 속을 탐색해도 반란에 가담자들을 찾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 하는 말과 같이 반란군의 행동이 포착되었다. 1949년 3월 21일, 약 500명의 반군이 지리산에서 덕유산(거창 서북)에 이동 도중, 그 일부가 거창군 북상면(北上面) 황점마을에서 머물었고, 23일에는 목재 반출을 위하여 산에 올라온 트럭 2대를 강탈하였다.                                                                                                                                                                                                                                                                 이상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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