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1>편.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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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1편  {60편}작. 연재 ○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  이 분열로 말미암아 6.25라는     동족상잔을 빚는다.   ○  그 후 남북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민족에 8.15가 주어진 타율적 선물이었다. ○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받았다. ○  이렇게 되니 자연히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 시키게 됐다. ○  지난 날이나 또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윤리와 민족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되는것이다. ○  민족의 참된 자주성을 가지려면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된다. ○  바로 이러한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 8.15 해방당시 이 땅의 지도층은 이 날을 맞을 준비를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 ● 지도층은 총독경찰의 탄압에 의거 검거 투옥되거나 친일로 전향하여 8.15 당시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외에는 이렇다 할 통일조직이 없었다.               ● 8.15 직전, 일제총독 당국이 한민족의 지도자로 지목한 인사는 여운형, 안재홍,송진우 3인정도였다. ● 이들 중에서 여운형을 제외한 안재홍과 송진우는 이렇다 할 항일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남한에는 다소나마 조직성을 띠고 있는 민족세력으로 5개파를 생각할 수 있었다. ● 김성수, 송진우 등을 중심으로 한 토착세력 ●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경향의 세력 ● 재건파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그룹 ● 기독교인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 중 이승만계 세력 ● 기독교인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 중 안창호계열의 세력등 5가지가 있다. ● 1930년까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온건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1940년에 신문을 폐간당해 그들의 근거지를 잃고 일제의 강제에 못 이겨 본의는 아니나 친일단체 등에 이름이 오르게 되고 부득이 부일협력을 하고 있었다. ● 일제하에서도 삼양사, 경성방직 등 대기업 등을 일제의 지원을 받아가며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로서는 부일협력을 요구하는 일제의 부탁을 정면에서 거부할 입장이 못 되었다. ● 장덕수, 이광수 등 지난 날 [동아일보] 출신의 친일파들의 보호벽 안에서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그들로서는 가능한 한 부일협력을 덜 하고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무사히 유지 보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 이들에게 해방을 앞둔 한민족을 위해 어떤 비합법적 조직이나 운동을 준비할 만한 희생적인 투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같이 토착세력인 우파는 아무런 준비없이 8.15를 맞았다. ● 좌파 공산주의 세력으로서의 박헌영 일파가 있다. ● 1925년 처음으로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 1, 2, 3, 4 차에 걸쳐 연이어 일제 경찰망에 검거되자 한때 신간회 조직 속에서 합법운동을 꾀하기도 했고 신간회가 자치운동 쪽으로 기울자 이를 자진 해산시키기도 했다. ● 1930년대부터는 일제히 지하로 잠입, 노동 농민,학생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당재건을 기도했으나 그때마다 검거되었다. ● 1940년 전후 마지막으로 당재건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자 해방 전 3, 4년간은 잔여세력이 겨우 서클운동 정도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 투지는 강했지만 이들 역시 8.15를 맞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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