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루트’ 캄보디아 한국인 서병두목사 性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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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만지고는 ‘예쁘다’며 뒤에서 끌어안고… 한국 들어온 뒤에도 계속 ‘잠자리’ 요구” 중국에 장기 체류하던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 거치는 동남아 A국에서 이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목사가 성추문과 인권유린 논란에 휩싸였다. 여성 탈북자들이 조선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를 동반했다는 이유로 폭언을 일삼는가 하면 일부 탈북 여성을 성희롱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심지어 탈북자들이 국내에 정착한 뒤에도 ‘부적절한’ 관계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 선교’ 뒤에 가린 성추문의 실체는? 지난해12월 초 입국한 탈북여성 김난주씨(가명)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두 살도 안 된 딸이 탈북자가 아니라 조선족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동남아 A국에서 꼼짝없이 묶여 있던 7개월여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 김씨는 현재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있다. 김씨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거쳐 동남아 A국에 도착하자마자 보호시설 책임자인 S목사가 느닷없이 우리 딸이 탈북자가 아니라 중국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라고 해서 몇 달 동안 곤욕을 치렀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다른 탈북자들은 한두 달 A국에 체류한 뒤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비해 자신은 7개월이나 오도가도 못한 채 A국 보호시설에 사실상 갇혀 있었다는 것. A국 주재 한국 영사관이 조사하는 과정에도 “S목사는 당신의 딸이 중국인(조선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탈북자라고 주장하느냐”며 추궁당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괘씸죄’에 걸려 7개월 동안 발이 묶였다. 한편 김씨보다 먼저 북한을 탈출한 뒤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던 김씨의 어머니 최모씨는 김씨의 입국이 늦어지자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딸의 한국행을 도운 최씨는 S목사가 100여명의 탈북자 앞에서 딸 난주씨를 세워놓고 “조선족 아이를 데리고 온 김난주는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난 뒤 마지막까지도 안 보내줄 것”이라고 공언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격분했다. 최씨는 “이런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작성해 외교통상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또 “탈북 과정에 관여한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딸을 빨리 데려오고 싶으면 300만원 정도를 후원하든지 컴퓨터를 10대 정도 기부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에 앞서 2001년 A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박철구씨(가명)도 이듬해 북에 남아 있던 딸을 데려오는 과정에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박씨는 2001년 두 딸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고,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금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북에 남은 막내딸을 데려오기로 했다. 박씨는 자신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A국을 경유할 때 도움을 받은 S목사를 통해 막내딸을 데려오기로 하고, 자신이 선택한 경로(중국→동남아 B국→동남아 A국→한국)로 딸의 입국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이내 벽에 부딪혔다. 작업이 늦어지는 것을 감지한 박씨가 B국을 통해 확인한 결과, S목사측에서 ‘박씨가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중국인(조선족)이니 중국으로 되돌려보내라’고 하는 바람에 박씨의 막내딸이 다시 B국으로 돌아갔다는 것. 결국 박씨의 막내딸은 두 달동안 B국을 떠돌다가 현지 경찰에 붙잡혀 연금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그후 박씨의 딸은 천신만고 끝에 B국을 탈출해 A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그 동안 가슴 졸인 것을 생각하면 박씨는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돈 안 보내니 조선족이라고 학대” 박씨는 S목사가 자신의 막내딸을 느닷없이 조선족이라고 주장한 것은 자신에게 추가로 요구한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애초 서울에서 계약한 금액 외에 850만원 가까이 S목사측에서 추가로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그 아이를 조선족이라고 우긴 겁니다. 더 주고 싶어도 줄 돈이 없기에 못 주겠다고 버텼고 결국 아이는 양국을 오가며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박씨는 조선족이라는 누명을 쓴 막내딸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S목사측의 금품 요구와 막내딸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만들어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관련 사실을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S목사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자 S목사측에서 요구하던 돈을 포기하고 막내딸을 보내줬다는 것. A국을 경유해 들어온 탈북자들은 이처럼 S목사가 조선족 또는 조선족 자녀라고 지목한 탈북자들을 전체 탈북자 앞에 세워놓고 ‘인간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중국으로 쫓아버리겠다”거나 특정 남녀를 지목하며 “무슨 관계냐”고 막말로 추궁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현재 정부의 탈북자 수용 및 지원정책에 따르면 여성 탈북자가 중국 국적인 조선족 사이에서 낳은 자녀라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북한이탈주민’은 아니지만, 정부는 특수상황에서 발생한 사실혼을 인정하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해온 것. 뿐만 아니라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는 6세 이하의 유아를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중국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탈북여성들의 동반자녀는 북한이탈주민지원법에 따른 정착지원금을 받지 못할 뿐, 어머니의 호적에 입적함으로써 국적을 취득하고 정상적 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동남아 지역에서 탈북자 지원 사업을 펴는 다른 관계자들도 “조선족 자녀에 대한 차별대우는 있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해외 탈북자들이 인신매매 또는 장기 체류에 따른 동거 등으로 인해 태어난 자녀가 한둘이 아닌데 한국행 비행기를 태우면서 이들을 차별대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일부 관계자들은 “심지어 S목사측이 ‘조선족 아이는 한국 정부에서 받지 않으니 중국으로 되돌려보내야 하는데 가족들이 경비를 대야 한다’며 돈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헌금 강요” “자발적 헌금” 오춘화씨(가명)처럼 S목사측으로부터 사실상 헌금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오씨가 A국에 도착한 것은 2002년 가을 무렵. 중국을 출발해 A국과 인접한 B국을 거쳐 A국의 보호시설에 체류하던 오씨는 B국을 급하게 떠나면서 당시 수중에 있던 2000여달러를 B국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관계자에게 맡겨놓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 관계자가 A국을 방문해 S목사측에 “오씨에게 전해달라”며 그 돈을 맡겼다는 것. 그러나 오씨에게는 한푼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씨의 증언이다. “주일예배 때마다 반장이나 조장들이 감사헌금을 하면 한국에 빨리 갈 수 있다고 하는데 헌금 내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불러주는 대로 감사헌금을 하겠다고 서약서를 썼을 뿐입니다.” 그러나 S목사측은 오씨의 주장에 대해 “오씨 스스로 헌금하겠다고 해서 받았을 뿐이며, 용도까지 공개적으로 밝혔다”고 반박했다. 또 오씨가 한국에 들어간 뒤 태도를 바꿔 반환을 요구하자 문제가 될 것 같아 돌려줬다는 것이다. 한편 오씨는 S목사의 보호시설에 거주하는 동안 목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사실도 폭로했다. S목사가 면담을 이유로 자신을 사무실로 따로 불러 가슴을 만지고 끌어안는 등 성희롱을 했다는 것. “면담이 끝날 무렵 내 가슴에 멍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S목사가 ‘내가 의대를 나왔으니 봐줄 수 있다’며 가슴을 만지고는 돌아서 나가려 하자 ‘예쁘다’며 뒤에서 끌어안는 거예요.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요.” S목사가 입을 맞추려는 것을 감지하고 당황한 오씨는 순간적으로 “유방암이 있을지도 모르니 지금은 위험하다”는 핑계로 S목사의 요구를 뿌리치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밉보일 것 같아 “서울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후 오씨는 무사히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씨는 “보통 3개월 정도 걸려야 한국에 들어오는데 나는 한 달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씨가 한국에 들어온 뒤 하나원에서 교육을 모두 마치자 S목사가 오씨를 찾아온 것. S목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난 오씨는 감사헌금 명목으로 낸 2000여달러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목사님이 ‘감사헌금하겠습니다’라고 불러줘서 그대로 받아썼을 뿐이지 사실 제게 신앙이 없다는 것은 목사님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따졌죠.” ‘폭로하겠다’고 하자 돈 돌려줘 당시 오씨는 함께 탈북한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였다. 오씨의 남편은 오씨를 위해 독학으로 한국 법전을 뒤져 사기 및 채권채무 관련 법률조항을 익힌 뒤 S목사에게 “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한국 법정에 고소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S목사의 행태를 고발하는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해 관계기관 및 관련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결국 몇 차례 승강이 끝에 S목사는 오씨에게 ‘헌금’ 명목으로 받아챙긴 2000여달러를 돌려줬다. “처음에는 ‘서울까지 오는 데 든 경비를 빼고 절반만 주겠다’는 등 협상안을 내놓더라고요. 한마디로 거절했더니 결국 그 자리에서 폰뱅킹으로 돈을 이체해주더군요.” 그러나 A국으로 돌아간 S목사는 그 후에도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너를 사랑했다”거나 “이렇게 배신당할 줄 몰랐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A국을 경유한 여성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S목사와 여성 탈북자들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 경우만이 아니다. 2002년 A국을 거쳐 들어온 또 다른 여성 탈북자 나순옥(가명)씨도 S목사에게서 유사한 제의를 받았다. 나씨의 한 지인에 따르면 나씨가 한국에 들어온 뒤에도 S목사가 몇 차례 찾아온 적이 있으며 그때마다 나씨는 “목사님이 자꾸 잠자리를 요구한다”며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목사님과 식사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한 뒤 전화를 받는 척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는 것. 이 지인은 “당시만 해도 나씨가 ‘S목사를 통해 북한에 남은 언니와 형부를 한국으로 불러들여야 한다’며 S목사를 계속 만났다”고 전했다. 언니의 한국행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 S목사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나씨는 그 후 자신이 한국에 들어온 것과 같은 루트를 이용해 언니와 형부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나씨는 A국 체류 당시 병원 치료를 이유로, 다른 탈북자들이 머물고 있는 보호시설이 아닌 외부에 기거한 경우가 많아 같은 시기에 A국 보호시설에서 지낸 동료 탈북자들도 나씨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씨와 함께 현지에 체류한 한 탈북자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으나, 정작 내가 병원 진료하러 갔을 때는 나씨가 보이지 않았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현재 중국에 체류중인 나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처음에는 S목사와의 관계를 부인했으나 구체적 정황을 제시하자 “(옆에) 친구들이 있어 통화하기 어렵다. 내일 다시 전화하면 이야기하겠다”고 밝힌 후 더 이상 연락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A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들 중 나씨와 비슷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라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 나씨와 같은 시기에 A국을 거쳐 입국한 김봉숙씨(가명)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탈북자가 들어오면 ‘전염병 증세 때문에 먼저 보내야 한다’며 순서를 뒤바꿔 한국행 비행기에 태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이런 경우 십중팔구 S목사와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말 입국해 현재 하나원에서 교육받고 있는 박길선씨(가명)의 또 다른 증언. “매일 오후가 되면 S목사가 안마를 받기 위해 보호시설 내 사무실을 방문한다. 보통 사무실 청소를 담당하는 여성 탈북자들이 안마를 해주는데 한 사람은 ‘사감’이라고 불리는 관리자에게, 또 한 사람은 S목사에게 안마를 해준다. 이때 불려가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다.” 이렇듯 여성 탈북자들에 대한 잠자리 요구 또는 성희롱 사례가 증언을 통해 불거져 나오는 데도 외교통상부 등 관계부처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사태를 파악해봤다”고 밝히면서도 “인권침해 사례가 있다면 탈북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통해 해결할 일”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A국은 중국에서 장기 체류하던 탈북자들이 동남아 국가들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루트로 활용돼 왔다. 특히 동남아 탈북자들이 늘어날 때는 A국발 한국행 비행기에 매주 7~8명씩 태워 입국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동남아 B국에 머무르던 탈북자 468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면서 당시 탈북자들을 보호해주던 현지 한국 교민들이 B국에서 추방당하자 인접한 A국도 탈북자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 루트가 다시 가동되면서 현재도 A국을 통해 탈북자들이 입국하고 있다. S목사가 A국에서 탈북자 보호시설을 운영한 것은 2002년경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호시설은 ‘H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교회에는 동남아 주변국에서 한국행을 위해 모여드는 탈북자를 적게는 50여명, 많게는 150여명까지 수용해 왔다고 한다. 물론 현지 공관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S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총회 소속 경기도 부천의 모 교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0년대 중반부터 동남아 A국에서 활동중이어서 이 지역에서는 한인 교계의 ‘대부’로 알려진 인물. 또 3~4년 전부터 부천 모 교회가 운영하는 A국 의료선교단체의 현지 책임자를 맡아 이 나라 환자들을 국내로 불러 각종 수술을 시켜주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비와 의료선교 비용은 이 교회를 통해 지원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 관계자는 “의료선교 차원에서 S목사를 통해 선교비용을 지원했을 뿐 탈북자 선교와 관련해서는 일절 관여한 바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논란과 관련해 동남아 지역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펼쳐온 한 관계자는 “S목사의 행위는 탈북자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난 명백한 인권유린행위”라고 비난했다. 특히 S목사가 “모든 것을 한국 현지 공관과 협조해 처리했다”고 밝히고 있는 만큼 현지 공관 관계자들이 탈북자들에 대한 성희롱 등 인권유린행위를 알고 있는지 여부도 관심 대상이다. 현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또 다른 탈북자는 “신앙에 관심을 가지려던 탈북자들조차 중간 체류국에서 S목사의 행태를 보고는 종교에 극도의 반감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동남아 루트가 막혀가는 상황에서 불거진 ‘S목사 스캔들’로 인해 해외 탈북자들의 한국행에는 또 한번 적신호가 켜질 것 같다. ‘性추문’ 당사자 S목사 전화 인터뷰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남아 A국을 통해 입국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현재 A국에 머물고 있는 S목사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S목사는 “조선족 아이가 딸린 경우 불가피하게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일부 여성 탈북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데 대해서는 부인하면서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혹스럽다”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다음은 S목사와의 일문일답. -조선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딸린 경우 ‘처벌’ 차원에서 일부러 입국을 지연시켰다는데. “여성 탈북자와 조선족 아이가 한국으로 들어가면 중국에 사는 아버지를 초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들어간 조선족 남편은 대부분 불법체류자가 되기 마련이다. 정부와 함께 일하는 우리가 불법체류를 방조하거나 도와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탈북자들은 그 과정에서 S목사가 자신들에게 폭언하는 등 인권유린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사람들은 아무리 잘해주고 은혜를 베풀어도 본인들의 이익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불만을 표시하게 마련이다. 탈북자들이 그렇게 얘기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규율을 세우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감사헌금을 강요하거나 브로커 비용을 요구하는 등 돈 문제와 관련해서도 잡음이 많았다는데. “자발적으로 헌금해놓고 나중에 말을 바꾼 경우다. 다른 목사와 탈북자의 거래를 중개하다 불거진 일도 있다. 문제가 된 경우 돈을 모두 돌려줬다.” -일부 여성 탈북자들이 S목사와 부적절한 잠자리를 가졌다는데. “오래 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걸 어쩌겠나. 내가 무슨 이야길 하겠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 뭐, 그렇다. 그 사람들 쪽에선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관리자도 있고 공관에서도 와보기 때문에 구조상 그럴 수가 없다.” -일부 여성 탈북자들은 병원 진료 등을 이유로 보호시설이 아닌 외부에 수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일부 탈북자는 한국에 들어온 뒤에도 S목사와 개별적으로 만났고, 이 과정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제보가 있다. “한국에 들어간 탈북자들을 만나는 일도 있다.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성 탈북자들과 잠자리를 가진 것은 사실인가. “내가 뭐라고 이야기하겠나. 이곳도 곧 폐쇄해야 할 것 같다. 조만간 정리할 생각이다. 마지막에 와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죄송하기도 하고,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잠자리를 가졌다는 증언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사실이라고? 왜 그런가? 그렇지는 않다.”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부인하는 것이다. 아니 부인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무척 곤혹스럽다. 여태까지 좋은 일을 해놓고 마지막에 와서….” -탈북자들의 증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다. S목사가 일부 여성 탈북자들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표현까지 썼다는데. “그런가…. 난 그걸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되겠는데…. 아니라고 이야기하겠다. 그렇다면 본인들과 대면을 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되면….” -본인의 생각만 말해달라. ”목사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일 때문에 문제가 되면 내가 너무 어려움을 당하지 않겠는가. 구체적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사실을 정확히 밝혀달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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