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를 10만원권 인물로 ! (지만원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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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시스템클럽 http://www.systemclub.co.kr 에 있는 지만원박사의 글임. Name 지만원 Subject 김구를 10만원권 인물로 ! 현재 만원권 지폐에는 세종대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10만원 권에는 김구를 넣아야 한다는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2007년4월28일, 서울대공원 2번출구 앞에서 크게 무대를 차려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10만원 권에 김구 도안 넣기”에 서명해 달라고 소리를 치는 모습니다. 이를 본 우리 국민의함성 회원들이 이들을 그냥 둘리 없었다. “이 빨갱이들아, 김구가 누군지 아냐? 김일성 가방못지한 인간이야. 김일성에게는 북한정권 세우라 찬조연설까지 하고도, 이승만에게는 남한 정부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바지가랑이 붙잡던 한심한 인간이야. 대한민국 건국에 악착같이 반대했던 이런 인간이 어째서 세종대와 윗자리에 올라가야 하냐? 응? 김구정신? 좋아하네. 김구정신이 뭔지 좀 가르쳐 줄까? 응? 이승만에게 질투심을 느껴 사사건건 시비하고, 툭하면 총과 폭탄으로 테러를 했던 오사마빈 라덴 같은 사람이야. 그게 김구정신이다 이 인간아, 너희들 뭐 알고나 떠들어? 이 빨갱이 같은 인간들아” ▲ 백범 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장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2005 통일부 제공 ▲ 김구 선생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 차 평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나,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2005 통일부 제공 이렇게 한 마디씩 거들고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 이런 광경을 목격하던 한 젊은이가 우리들을 보란 듯이 “펜 이리 줘요, 저는 찬성합니다” 하면서 여러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주민등록번호까지 기록했다. 1958년생이었다. 김구는 좌익들의 로고다. 북한거류민증 제1호를 자처하는 김진홍은 2005년11월, 뉴라이트전국연합 발기문에서 “뉴라이트는 김구의 애국정신과 장준하의 민족정신을 계승한다”라는 말로 뉴라이트의 붉은 정체를 드러낸 바 있다. 국회의원들, 여야 없이 김구를 최고로 존경 2005년10월12일자 동아일보는 국회의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내 놓았다. 열우당 41명, 한나라당 26명을 포함해 74명이 김구를 좋아했고, 열우당7명을 포함해 30명이 이순신을 꼽았다 한다. 그 뒤로 안창호 정약용 링컨 간디 문익환 장준하 세종대왕이 이어졌다. 열우당이나 한나라당을 불문하고 국회의원들이 김구를 가장 존경한다 했고, 문익환과 장준하 같은 좌익들은 존경해도 이승만과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수준이요 정체성이다. 국회의원들 말고도 김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수두록하다. 이들은 김구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인가? 김구를 좋아하게 된 동기는 백범일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 정부에 들어 김대중이 김구를 이승만 위에 올려놓으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쓴 이광수, 그가 쓰면 고양이도 산신령 돼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는 누가 썼는가? 1947년 춘원 이광수가 썼다. 이광수가 쓰면 고양이도 산신령이 될 수 있다. 이를 실감하기 위해 필자는 김영사가 쓴 “신화는 없다”라는 이명박의 자서전을 들고 싶다. 어느 날 아침 모 정당의 사무총장까지 했던 정치학 박사가 아침 모임에 “신화는 없다”라는 책을 식탁 위에 내놓으면서 “이명박, 참으로 훌륭해요. 이 사람 대통령 해야 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때에는 변 관심이 없다가 최근 이명박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신화는 없다”를 세심하게 읽어 보니, 이는 거짓말 덩어리였다. 분석 없이 그냥 가볍게 읽으면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분석력을 가지고 자세히 읽으면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신화는 없다”가 이명박을 “정직한 슈퍼스타”로 왜곡했듯이 “백범일지” 역시 김구를 세계 최고의 인물로 각색한 것이다. 김구, 평양가서 김일성 고무찬양 연설 평양회의, 1948년4월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됐다. 4.19일, 김구는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줄줄이 누운 부하들을 피해 담장을 몰래 넘어 4월20일에 평양에 갔지만 4.22일에야 비로소 회의장에 초대됐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참으로 치사한 연설을 했다. “위대한 회합에 참석하여 기쁘게 생각한다. 조국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정당이나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단선(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선일보 1948.4.24) 이런 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는지 다시들 생각해야 할 것이다. 김구라는 역사적 인물을 ‘백범일지“ 하나만을 읽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학문에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서전 하나를 읽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당대의 인물은 당대의 사람들이 평가한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승만과 김구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인물비교: 이승만 189표, 김구 8표 1945년 10월10일부터 11월9일까지 한 달에 걸쳐 '선구회'라는 조사단체가 서울에 있는 105개의 정치,사회,문화 단체와 학교를 대상으로 1.957개의 설문지를 돌려 조사한 결과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은 이승만(431), 김구(293) 여운형(78) 이었다. 1946년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29.2%) 김구(10.5%)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 10.3%였다. 1948년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5개의 거리 행인에게 “누가 초대대통이 되기를 바랍니까”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1,024) 김구(568) 서재필(118) 등이었다. 1948.5.31. 국회는 189 대 8 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17.일 유사 이래 최초의 민주헌법을 발표했고, 이 헌법에 따라 7.20. 이승만은 200명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김구는 겨우 16표를 얻었다. 재목의 됨됨이(caliber)를 보면 김구는 이승만과 비교가 되지 못한다. 이승만은 한학을 했고, 하버드에서 석사를 했으며 미국 정치학계의 최고 명문인 프린스턴대학의 박사요 윌슨 대통령의 수제자였다. 당대의 세계 각국의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의 학력을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김구의 학문은 겨우 한학 하나였다. 세계를 보고 정세를 보는 분석력에 천지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김구는 당시 꼴보수에 불과했다. 상해로 나가서 젊은이들을 테러에 내보내고, 소규모의 게릴라를 형성하여 일본을 상대로 무력대결을 시도하는 무모한 길을 택했다. 몇 명의 요인을 암살하고, 넓은 대륙의 오지 몇 곳에서 일본군 소부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한다 하여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애초에 일본에 먹히지를 않았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는 분명 훌륭한 정신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그들로 인해 조선민족이 받았던 보복과 핍박은 너무나 컸다. 그래서 민족을 사랑하는 간디와 달라이라마는 비폭력 저항을 지도한 것이다. 간디와 달라이라마는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지만 오사마 빈 라덴은 불특정 다수를 마구 노리는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간디나 달라이라마와 유사하다면 김구는 오사마 빈 라덴과 유사한 것이다. 미국의 원자탄 덕분에 해방을 맞은 다음, 이승만은 미 군정청과 싸워가면서 미국에 건너가 핵심 정치인들을 설득시켜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김구는 미국을 움직일 아무런 실력도 근거도 없었다. 오직 이승만과의 라이벌 의식으로 김영삼-김대중이 박정희에게 했던 것처럼 사사건건 이승만의 발목을 잡고 물고 늘어져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죄로 젊은 장교로부터 저격을 받은 사람이었다. 아래 자료는 '백범학술원' 발행 "백범과 민족운동연구"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은 김구를 띄워주기 위해 만든 책이다. 백범 김구는 1876.7.11.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선조 중에는 김자점(1588-1651)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효종 때 북벌론에 반대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 때 황해도로 피신하여 200년 후인 1876년에 김구를 탄생시킨 것이다. 위 책의 14쪽에는 백범이 개구장이였다는 중간 제목이 있다.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아 곰보가 되었고, 다섯 살 때, 동네 이생원 집 아이들로부터 상놈 소리를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해 부엌에 가서 식칼을 가지고 나가기도 했고, 아버지 숟가락으로 엿을 사먹기도 했고, 아버지의 돈을 훔쳐다가 떡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로 자랐다 한다. 그 후 백범은 양반이 되려고 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한다. 1893년는 백범이 18세 되던 해였다. 그는 동학도 오용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 후 백범은 축지법을 써서 하늘을 난다는 소문이 퍼져 그를 따르는 무리가 수천이 되었다 한다. 그는 곧이어 교주 최시형을 찾아가 접주첩지를 받아 8봉접주가 되었다. 이듬해인 1894년 9월 동학농민전쟁에 참전, 해주성 공격에 선봉장이 되었다. 동학농민란은 당시 상놈 계급의 저항운동이었다. 김구가 선봉장에 섰다는 것은 김구가 상놈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 양반-상놈의 사회계급을 없애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일생 내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며 상놈 계급에 해당하는 밑바닥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김구야 말로 일본의 덕을 본 사람이다. 김구는 청나라 원군과 합세, 서울을 장악하고 정감록에 나오는 바대로 정씨를 왕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은 1896년1월1일에 폭로되어 모두 사로 잡혔다. 김구는 홀홀단신 도망을 쳤다. 도망을 하다가 일본인 스치다가 쫓아오자 그를 살해했다. 저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첩자를 죽였다고 선전하지만 이는 마치 유시민이 애매한 사람들에게 폭력과 린치를 가해 감옥에 가 놓고도, 지금에 와서는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갔었다고 거짓 선전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명성황후를 죽인 자가 황해도까지 쫓아와 김구의 뒤를 쫓았다는 것은 참으로 코미디 같은 거짓말로 들린다. 동학란을 진압한 것은 일본군이요, 김구는 패자로 일본군에 쫓기다가 그를 잡아려 일본인이 따라오자 그 자신이 살기 위해 그를 죽였을 것이다. 또한 애국심을 가지고 일경을 죽이려면 한양에 와서 죽여야지, 어째서 동학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 쫓기다가 황해도 어느 지방에서 "꼼짝 마라"하고 소리치는 일본인 한사람만을 살해하는가? 또 있다. 동학란은 조정을 뒤엎기 위한 난이었다. 조정을 뒤엎으려는 자가 조정의 국모에게 충성심을 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한 이야기다. 동학란을 주도한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군(지금의 정읍시)에서 태어났으며 체구가 작아 '녹두'라 불리웠다. 37세에 동학에 입교하자마자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정읍)의 동학 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난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농민군은 아직도 황해도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노동자 농민 단체가 폭력을 쓰듯이 당시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농민출신들이 난장판을 부리는 것을 보다 못해 당시 양반이요 부자로 살았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켜 이들의 토벌에 나섰다. 김구는 바로 이 때 안태훈 진영에 투항하여, 안중근 가의 식객이 되었다. 당시 안중근은 15세, 김구는 18세였다. 김구의 조상은 이조왕조에 반역하여 멸문지화를 입어 상놈가로 추락했고, 백범 김구 역시 이조에 반역했다가 안중근 가의 식객이 되었다. 1947년12월2일, 우익정당 한민당 당수인 장덕수가 피살되었고, 김구는 그 피살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미군정의 조사를 받았다. 1948년, 73세의 김구는 이승만을 질투한 나머지 김일성이 보낸 간첩 성시백의 꼬임에 빠져 김일성을 장군으로 칭하며 1948년4월19일부터 23일까지 김일성이 주도한 평양회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북한정권수립을 위한 고무찬양연설을 했다. 1948.5.5, 남한으로 돌아 온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조선단선반대전국위원회’를 만들어 단독선거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948년의 제주4.3사태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빨치산의 영웅(?) 김달삼이 일으킨 경찰 학살 사건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였던 스티코프의 비망록에는 1946년의 9.24파업(23만명 참가, 1200여명 검거), 10.1대구 폭동 그리고 1948년의 4.3사건 모두가 스티코프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군자금을 내려보내고, ‘폭력혁명사태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김구는 스티코프-김일성 노선에 서서 5.10 선거를 방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평소 안면이 있던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알 4발을 맞고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반역자 김대중은 전봉준의 동학란에 최고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반역 가문에서 태어나, 적장과 내통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끝까지 방해하고, 이승만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한 김구를 대한민국 최고의 인물로 추켜올렸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에 반역자들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것이다. 김구 가문의 마지막 벼슬: 김자점 [金自點, 1588~1651] 김구가문은 반역의 가문이었다. 인터넷에서 김자점을 치면 능지처참이라는 단어가 쏟아진다. 1623년은 인조반정의 해였다. 그 한 가운데 김구의 조상 김자점이 있었다. 유능한 광해군을 폐하고 무능한 능양군을 추대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의 무능한 무장이 바로 김자점이었다. 그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 시절 그는 탐관오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자호란(1637)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함으로써 삼전도의 치욕을 초래했다. 광해군 시절, 용맹한 임경업장군이 청의 남침로인 의주산성을 지키고 있어 범접을 못하게 하였는데, 무능한 김자점이 임 장군을 남침길목에서 백리나 떨어진 고지 자모산성으로 이동시켜 길을 열어주었다. 황해도에서도 방어군을 작동시키지도 않고, 피란부터 서두르다 삼전도의 항복을 맞게 한 것이다.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1640년(인조18) 1월 강화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淸)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임경업(林慶業)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효종 즉위 이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사림(士林)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 결과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처지에서도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익(釴)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라 한다. 요약하면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왕의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적장과 내통하였고,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다가 광양으로 유배됐고, 다시 아들과 함께 역모를 획책하다 능지처참을 당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반역-모반-밀고 등의 역적 가문에서 태어난 김구 역시 5.18과 같이 정부를 뒤엎으려 던 농민 동학란의 선봉장에 섰다. 그리고 이승만의 건국을 사사건건 방해하는데 김일성의 힘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북한에 놀아난 죄로 북한에서 영화로 놀림 받는 김구 아래는 당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었던 박갑동 선생의 증언이다(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1946.6.3일,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 천명했다.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지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했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은 “단독정부는 미국고 이승만의 음모이므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때 김구는 북한의 스케쥴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했다. 홍명희는 김구에게 ‘김구, 김구식 이름으로’ 먼저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하라 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제안을 보냈는데도 김일성이 무시했던 것은 순전히 각본에 의한 연극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9.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의 덕에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이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믿고 북한을 다녀온 김구는 “양쪽에 다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을 가진 듯 했다. 북한은 당시의 김구의 방북 대목을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 한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쇄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편 주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가며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노동신문에서 놀림 받는 김구 1997년5월26일(월), 로동신문은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신념과 절개를 목숨바쳐 지킨 성시백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두고-”라는 제목으로 장장 2개면에 걸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실었다. 이하 로동신문의 글 1946년 11월11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달 호에 “20여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정향명은 해방 전 독립운동 시기에 이국땅에서 부른 성시백동지의 가명이었다. 성시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근 반세기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나간 전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92년 12월에 성시백 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는 이름 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947년 정초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저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 . . “장군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싸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든 것만 같습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만나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 . ” 김구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이렇게 드리대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었다. “내가 버로 김일성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선생의 얼굴이 크나큰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실 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시었으니 기어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 . . . . 1950년6월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 동지를 사형장으로 끌어내었다. 성시백 동지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24시간 전이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끝까지 방해했고, 정치적 욕심 때문에 김일성에 농락당해 북한정권에 정통성 부여했다. 그는 문익환 목사처럼 통일을 빙자한 국가 반역자였다. 그는 꼿꼿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김구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2007.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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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박사님이시라면 일제 당시 임정과 하와이에서 있었던 이승만의 행적 등을 모르실 리 없을 것 같아서 더욱 아쉬우며, 바라보는 이의 촛점에 따라선 일제 치하 당시 이승만과 김구의 처신에 대한 평가조차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안기부시절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악착한 고문을 하여서
박사라는지. 아니면 베트남전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들을
윤간하는데 기여하여 박사란말인지 ...
정말 이지만원이라는늙은이가 정말혐오스럽고 증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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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만원이..ㅋㅋ 개념 완존 상실..ㅋㅋ
북한은 김구를 거들며 요란하게 선전용으로 써먹는 것 같다.
하여튼 김구나 문익환이나 다 김일성한테 머리숙히고 치욕스럽게 빌불고 다닌 인간들이다.
김일성의 감언리설에 넘어가 북한의 농락거리가 됐다.
김대중이나 현정부,열우당무리들도 꼭 그 모양 그 꼴이다.
탈북자들은 그를 신처럼 섬기네 ? ㅋㅋ
정말 저런 논리가 먹히는 사람들은 어떤사람들일까 ?
가방 끈이 정말 ..ㅋㅋㅋ
여기 댔글에는 <청진>, <백두산> 두분만이 탈북자일 뿐이다.
그런데다 청진은 김구를 오히려 두둔했고, 백두산도 지만원을 욕햇는데 어느탈북자가 지만원을 신처럼 모셨다는거냐?
남한에는 이런 머저리들이 너무도 많은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도움도 안되고 화만 돋군단 말이야.
너같은 눔을 보구 옛 말에 <쥐좃두 모르는 주제에...> 라는 말이 있다.
그 주제에 누구의 가방 끈을 길이를 감히 논한단 말이냐? 부끄러운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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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구 모두에게 한마디만 묻기요.
나는 지만원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김구도 모른오.
1) 그러나 해방후에 김일성은 남한이 실시하는 5.30단독선거를 반대하며 한반도에 공산주의자들을 주력으로 하는 <단일 독립국가> 건설을 제창 하였었다.
김구도 이 얼림수에 속아서 북으로 갔고 결국은 김일성의 독립국가 건설안을 승인 하였던것이다.
만일 <단일 독립국가 창립> 이라는 얼림수로 남한 국민들 까지 유혹하여 김일성과 김구가 단합을 하여 한반도에 어떤 국가를 세웠다면 지금의 한반도는 어느정도에 있을것 같은가?
2)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고 남한에 와서 <남북연석회의>에 갔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김일성을 찬양하며 김일성의 정치공작원들의 뒷바라지를 한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 김일성을 따라 북으로 갔던 인사들의 그후 운명은 어떠 했는가?
**** 차라리 김좌진 장군이나 박통을 돈에다 새겨라.
더불어 역사를 해석할 때 가정법은 좀 곤란하지만 요래님의 위 물음에 대한 제 생각을 몇자 적어 봅니다.
먼저 고려돼야 할 것은 김구의 해방 후와 방북시 및 그 이후 북한 관련 행적에 대해 지만원 박사와 요래님께서 적으신 내용의 객관적 사실성이라고 봅니다.
만약 요래님께서 지박사님처럼 북한의 정보에 기초하여 저런 글을 적으셨다면 그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보아서입니다.
그 전제는 북한의 현대사는 철저히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되었을 개연성이 높으니까요.
남한의 경우에도 해방 후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경향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해방 직후 남한에 미군을 진주시킨 미국이 원하는 남한의 정치체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민족주의가 아닌 친미적 민주주의일 것이 분명할 것인 바, 당시 대표적 항일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인 김구를 가능한 한 폄하하고자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 간부들의 입국시 항공기를 이용한 단체입국을 불허한 배경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여지고요.
더불어 김구가 단일국가 건설을 거의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사실일 것이나 방북 후 김구가 김일성 중심의 한반도 통일국가 건설을 주장하거나 획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더불어 참고하실 것은 해방 직후 당시는 불과 30여세였던 김일성도 구 소련의 필요에 의해 북한의 중심 인물로 의도적으로 부각된 존재일 뿐이란 점입니다. 즉, 당시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들이 한반도 단일국가의 지도자로 옹위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요래님께서는 두번째 질문에서 마치 김구가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일성의 정치공작원들을 뒷바라지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 근거를 알수 있겠는지요? 그 근거가 설마 북한역사는 아니겠지요?
두번째 질문은 그 질문의 내용이 사실일 경우에야 성립되기에 답변을 생략합니다.
세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제 이전 전제 왕권 하의 봉건주의와 일제 당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 나라 지식인 사이에서 큰 무리없이 수용될 수 있었던 순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됨이 좋을 듯 합니다.
일제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을 보면 그 속에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에 전제왕권주의보다는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된 결과로 수용된 것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고요.
또한 박헌영과 이강국 등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의 월북은 김일성의 흡수력이 아닌 반공을 국시로 내건 당시 남한의 정치적 환경의 결과로 이해함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물론 그들 대부분은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이용 당한 후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만 그들의 월북은 김일성을 추종하여 행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설 자리를 잃은 결과로 봄이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