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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행군 때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23회)
REPUBLIC OF KOREA 북한맨 0 321 2007-12-12 02:32:42
(http://www.alonk.com/) 에 연재하는 장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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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제23회)

리지명

한태규는 최문기의 처절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저 녀석이 어떻게 송영숙을 알까. 왜 저리도 비통해 하는 것인가. 저 모습은 필경 초면이 아니다. 그렇다면? 김행우나 최문기는 이미 서로 사전에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지 않고서는 저렇게 송영속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전 떨어진 시체가 다름 아닌 송영숙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의 입가에 얄미운 미소가 피어 올랐었다. 물론 그녀에 대한 원한은 없다. 하지만 아직 김행우가 살아 있는 이상 송영숙의 죽음은 그 에게 더 없이 큰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악마 같은 한태규의 웃음집이 흔들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보는 눈 앞에서 김행우가 바다에 떨어져 내릴 때 한태규는 분명 그가 죽은 줄 알았다. 파도 속에 몸을 잠그며 괴성을 지르던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젖은 옷을 비틀어 짜 입을 때 분명 방파제 쪽에서 두 사람의 뱃꾼이 기슭으로 배를 몰아 쓰러진 한 사람을 업고 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그가 김행우가 아닐 것을 바랐지만 지금 눈 앞에 벌어진 참상을 보면 김행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능히 짐작 할 수 있다.
남편이 죽었다면 어찌 그 아내가 오늘 이 9열차를 탈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분석이었다. 남편의 주검을 구들에 눕혀 놓고 먹을 것을 구하러 열차까지 타고 예까지 올 수는 없을 거였다. 그것은 한태규식 분석법이었다. 그는 지금 '큰 오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아내의 죽음 앞에 가슴 터질 김행우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태규는 인츰 그 웃음을 거두어 버렸다. 이제 최문기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큰 문제였다. 만약 송영숙의 죽음 때문에 그가 열차 타기를 그만 두고 이 백암역에 떨어진다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지금 ㅎ시에서 허지우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최문기를 기다리고 있다. 최문기가 예서 떠나지 않으면 그의 체포가 지연된다. 만약 ㄱ시로 송영숙의 시체를 안고 되돌아가는 날이면 일은 더욱 난처해질 거였다. 왜냐면 본 시에서 그를 체포하여 압송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본 관할 안전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의 체포를 승인하기까지는 물론 그 죄를 확증하는 치밀한 뒷조사가 따라야 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이 직장과 이웃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호인 같은 사람을 어떻게 갑자기 죄인으로 만들 수 있으랴. 최문기는 반드시 ㅎ역에서 불의에 체포해야 했다. 그래야 자기들의 목적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죄는 만들면 되는 것이다.
현행범은 타지 사람이라 해도 현지에서 사법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태규는 긴장한 눈빛으로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했다.
"붕∼"
열차가 긴 기적 소리를 내질렀다. 빗발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한태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구름장들이 밀려가고 있었다. 단속 때문에 내렸던 사람들이 다시 와 하고 열차에 매달렸다.
뜻하지 않은 돌발 사고로 그처럼 염려하던 단속 사업이 그만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었다. 열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자 객차 지붕 위에서 내렸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다시 지붕위로 오르려고 밀리는 바람에 열차는 떠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단속원들도 모르지 않았다. 또 단속해 봐야 대개가 다 생선짐 장사들이다. 그 짐속에 동과 같은 것들이 숨겨 있다는 것 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재수 빠진 날이다. 모두 한 풀 죽었다. 그들은 아우성치며 지붕위로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입을 하 벌린채 쳐다보고만 있었다.
문기네도 시체에서 물러나 기차 위에 올랐다. 문기가 일행인 듯한 두명의 사내와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한태규는 장신미를 데리고 뒤쪽으로 걸어갔다. 될수록 상급차에서 부터 멀어지는 것이 좋다. 승강대마다 사람 천지다. 별 수 없이 지붕위에 오를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신미를 데리고 지붕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백암에서부터 ㅎ시까지 두 시간 반의 운행 기간에 한태규가 해야 할 일이 또 한가지가 있다. 강기수의 제거다. 한태규는 처음부터 강기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강기수가 입은 밤색 낡은 가죽 잠바, 언제인가 한태규가 그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그것은 해를 넘기며 입다 너무 싫증나 강기수에게 던져준 것이었다. 안에 보드라운 털이 아직 남아 있어 이런 열차 행군시 착용하기에는 딱 맞는 옷이다. 그것이 표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모자까지 푹 뒤집어 쓰고 강기수는 강기수대로 한태규의 존재를 찾고 있을 터이지만 그 뒤를 끈질기게 뒤따르는 것은 한태규의 시선이었다.
어쨌든 장신미가 보는 앞에서 강기수를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태규는 한태규대로 장신미에 대하여 속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빼어난 미모 그 때문만은 아니다. 하는 행동 거지 그 하나 하나가 이미 한태규의 가슴속에 깊숙이 배여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다 얼음덩이 같은 이 사내의 가슴속에 장신미라는 이 여자가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한태규 자신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녀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그의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그도 느꼈다. 14년 연하라는 긴 터널이 가로 놓여있어 그걸 건느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그럴 수록 이가 옥물려지는 그였다. 못 할 것도 없다. 아직 그가 미혼이라고는 하지만 40을 넘긴 홀아비라는 강박 때문에 축 잡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도 홀아비보다는 총각에 더 가깝다.
여자를 안고 살림이라는 것을 해보기는 겨우 두 달, 줄창 혼자 살았다.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린 그였기에 그 이후부터는 여자에 한해서는 무조건 부인하고 살아온 터다. 그런데 장 신미와 이태 동안 일해 오는 과정에 그녀에게만은 웬 일인지 자꾸만 관심이 갔다. 실패한 승진과 사랑, 그로부터 초래된 무지한 복수의 다짐 속에 이미 청춘은 흘러가고 야심보다는 성취감에 웃어야 할 중년기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심정을 장신미에게 내 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것이었다. 또 자기의 마음 속에 그녀가 들어앉으면 그만이지 그녀의 동의나 마음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태규였다. 그녀 장신미는 좋든 싫든 자기가 가자하면 가야 하는 것이다.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열차 맨 뒤 꽁무니까지 걸어가면서 이번 일을 빨리 청산하고 깨끗이 뒤로 물러나리라고 한태규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사실, 우물거리며 시간을 보낼 정황은 아니다. 이 열차가 ㅎ시에 도착할 때까지 강기수 그놈을 어떻게 해서나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것이다. 장신미를 통해 강기수 제거 작전을 개시한 리영식의 첫 번째 계획은 바로 자기 한태규였을 것이다. 그는 리주열 독주 사건을 보며 그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강기수는 오늘 저녁 ㅎ시에 도착과 더불어 장신미의 한 잔 술에 죽게 되어있다. 그 전에 강기수가 해야 할 일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였으리라. 그 전이라면? 아직까지 자기는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이 열차에서라고 한태규는 단정했다.
흥. 모른다면 모르지만 알고 있는 이상 햇병아리 같은 강기수에게 죽임을 당할 자기가 아니다. 한태규는 열차 바곤 위를 세심히 살펴 보았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차 지붕의 맨 뒤쪽 끝이다. 예리한 그의 눈길이 밤색 잠바를 찾아내기란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지만 이미 강기수의 눈길도 자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열차 창문으로 다가간 한태규는 안의 사람에게 무엇인가 던져 주며 장신미를 끌어 당겼다.
"이 속에 타오. ㅎ역에 내려선 후 뒤쪽으로 빠지라구. 혹시 어떤 연락이 갈지도 모르니까, 강변 아지트에 내가 찾아 가겠어. 어서 오르라구"
신미는 한태규의 부축을 받으며 창문으로 기여 올랐다. 한태규가 던져준 담배곽을 받아 쥔 창가에 앉은 사람이 신미의 손을 잡아 힘껏 당겼다. 순식간에 그녀가 창문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한태규는 다시 한번 열차바곤 위를 올려다보았다. 얼핏, 이 쪽을 보다가 다시 등을 돌리는 사람.
'흥, 어리석은 놈'
한태규는 신미에게 손을 한 번 들어준 후 뒤에서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금전 뒷 쪽으로 오면서 봐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차 바곤 밑 바퀴 앞 차체에 붙어 있는 부품함이었다. 30대 초반의 한 사내가 눈을 뒤룩거리며 여지껏 그 안에 앉아 있었다. 한태규는 그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손에는 100원 짜리 중국 인민폐가 들려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한태규는 눈짓으로 그 사내에게 돈과 자리를 바꾸자는 암시를 보냈다. 긴가민가하며 좀체로 나오려 하지 않는 사내 앞에 한태규는 지폐를 툭 던져 주었다. 북조선 화폐로 환산하면 2,500원이다. 사내에게는 떡이 함지채 쏟아진 셈이다. 사내는 황급히 뛰쳐나와 꾸벅 인사를 하곤 앞으로 뛰어 갔다. 한태규는 어깨에 멘 배낭을 그 안에 던져넣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고 얼마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차 바곤과 바곤 사이 연결짬도 살펴 두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오른 듯 역홈에는 단속나온 완장패들만 서성거렸다. 2만선 전기선에 튀여 숨진 시체도 어디로 옮겼는지 구내에는 없었다.
붕-기적 소리와 함께 드디어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태규는 그 궤짝 같은 함 속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열차가 떠나자 금시 떨어져 버릴 듯 아츠럽다.
"젠장 별 추한 곳에 다 타 보는군. 할 수 없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배낭을 뒤져 웃옷을 바꿔 입었다. 쓰고 있던 운동모를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대신 레닌모를 꺼내 눌러 썼다. 널찍한 겨울용 목수건을 꺼내 입까지 가려 보았다. 윗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비춰 보며 만족한 웃음을 지은 한태규는 멀거니 앞을 바라 보았다.
역 구내를 벗어난 열차는 맹렬한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부터 ㅎ시까지는 내리막이다. 비도 완전히 멎었다. 흩어진 구름 사이로 저녁 하늘이 보였다. 한태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저녁 7시가 조금 넘었다. 산골 지대는 어둠을 재촉했다. 한태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제 해야할 행동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열차가 출발 하기전 비통한 마음을 안고 지붕 위로 올랐던 최문기는 출발하기 위한 긴 기적 소리가 울리자 아무래도 안되었던지 내리려고 서둘렀다. 송영숙의 죽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서둘러 떠나기에는 너무나도 가슴이 저렸다. 그녀의 죽음을 놓고 별의별 생각을 다 가져본 최문기다. 새벽 김행우의 죽음을 앞에 놓고서도 그런 생각까지는 가져보지 못했다.
그때는 아마 이미 지나간 원한을 두고 그처럼 야비하게 날뛴 한태규에 대한 분노로부터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슴 한 구석을 아프도록 차지하는 심한 자책감 때문에 도무지 발길을 뗄 수 없었다. 어쩐지 송영숙을 자신이 죽인 것만 같았다. 13년전 김행우의 그 행위에 대하여 자기가 상부에 고발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되었다.
그 후유증이 이렇게까지 악의 상징처럼 환생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 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송영숙, 그 여인은 참으로 불쌍했다. 김행우를 남편으로 맞아 사랑한 것이 그 여인의 죄라면 죄였다. 남편이 어찌하여 돌 벼랑에서 굴러 내렸고 어찌하여 먼 섬나라에서 온 엄마의 유산을 모두 강탈당하고 파동 몇 키로에 온통 일가족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처지에 빠져들었는지 여인은 알 지 못하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갔다.
더는 헤쳐 나올 수 없는 함정 앞에서 헤쳐 나오려는 자기를 자꾸만 떠밀어 넣는 몰인정한 무리들에 대한 마지막 항거였을 것이다. 문기는 자기의 손으로나마 그를 그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 김행우의 곁에 고이 묻어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자기가 그들 부부에게 진 빚을 다 갚지는 못하더라도 아프도록 맺혀오는 자책과 후회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최문기의 머릿속에는 다른 그 어떤 생각도 깃들 수가 없었다.
"아니, 형님. 왜 내릴거요?"
마윤이 눈을 크게 뜨며 차 바곤 아래로 한 발 내려놓는 문기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왜요. 저 아주머니 때문에?"
"그래. 내 아무래도 ㅎ시에 갈 것 같지 못하니 자네가 좀 수고해 주게. 기숙이를 통하면 우리 처도 꼭 찾을 수 있으니까 자네가 함께 데리구 오라구."
"글쎄 그건 그렇게 하겠지만, 혼자서 어떻게."
"괜찮네. 이 차가 내일 아침에는 다시 되돌아 나올테니까 하루 밤만 견디면 되는데."
"근데 형님. 집의 아주머닌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우? 우리처럼 사기라도 당한거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어제 인편으로 쌀도 보냈는데… 하여튼 만나면 무작정 데리고 떠나라구. 내 저 아주머닐 안장하구 그 때까지 오지 않으면 다시 나오겠네."
"형님,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같이 내립시다."
길재가 또 나선다.
"아니. 됐어. 자네들 가지고 가는 짐도 있잖은가. 일도 봐야지. 그저 우리 처 일만 잘 봐주게. 그럼."
벌써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기는 이음짬을 이용해 제꺽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럼, 형님, 수고하오."
길재와 마윤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부탁하네."
멀어져 가는 열차를 바라보며 최문기의 눈가에 핑 하고 눈물이 고여 올랐다. 왜 그런지 그 순간 ㅎ시에서 자기를 기다릴 아내의 얼굴이 선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아내가 저주로운 인간 한태규 때문에 처참히 죽어간 김행우 부부의 일상을 알게 된다면 그 가슴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아니, 여인들에게 그것은 깊은 상처로 밖에 남을 것이 없다. 문기는 백암역에서의 참상을 아내에게 이야기하지 말 것을 마윤에게 부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천천히 역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직도 열차는 백암령 급경사 길을 다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견인기(기관차) 기관실에서는 지금 기관사가 진땀을 흘려가며 열차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출발만 하면 5분도 달리지 못해 시속 80km를 초과한다. 차 바곤은 몇 개 달지 않았지만 타고 있는 사람수가 너무 많아 내리 쏠리는 짐 무게가 만만치 않다.
급한 경사길이어서 조금만 경솔하게 운전 조작을 하다보면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바람날 수 있다. 속도계 바늘이 80을 초과하면 그 때는 무조건 제동이다. 제동잡을 때마다 열차 바퀴에서 마치 용접불처럼 불꽃이 튀었다. 얼마 안가서 열차는 멎어 선다. 그렇게 한 숨 쉬고 다시 천천히 출발한다. 거푸 2km를 달리지 못하고 열차는 다시 정지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한태규는 정지한 그 틈을 타서 차 바곤 위로 슬그머니 올라섰다. 눈에 익혀둔 그 밤색 잠바를 찾아 슬금슬금 무릎 걸음으로 다가섰다. 손에 든 전지불로 자리를 찾는 듯 이쪽 저쪽을 비춰 보았다 곁 불빛을 이용하여 강기수를 찾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웬일인가. 어둡기 전에 분명 이쯤에 앉아 있었는데 이 녀석이 눈치라도 챘단 말인가. 한 태규는 전지불을 끄고 강기수가 앉았던 자린 듯 싶은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고산 지대의 찬바람이 차 바람까지 겹쳐 어두운 밤공간을 회오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차가 달리는 반대편으로 머리를 돌리고 엎드리거나 모로 누워있다.
비닐막들을 뒤집어 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한태규는 맥을 놓치 않고 끈기 있게 감시하고 있었다. 강기수는 비닐막을 쓰지 않았었다. 털이 있는 가죽 잠바덕에 그걸 쓰지 않아도 추위로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어서 준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비닐막을 쓰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모두들 조는 건지 아니면 자는 건지 기척 없이 꼼짝도 안하고 엎드려 있다. 송장 같은 이 무리 속에서 강기수를 어떻게 찾아낼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 아무리 날고 뛰는 치밀한 계획밑에 무슨 일이건 실수없이 해내는 한태규였지만 이번만은 엄청난 실수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장신미를 창문으로 올리고 다시 차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눈이 마주쳤던 강기수, 한태규는 그때 벌써 상대의 심적 변화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강기수는 바로 코 앞 한태규가 앉아 있는 바로 윗 쪽에 지금 두 팔로 머리를 싸쥐고 모로 누워 있었다. 상대가 자기 보다 드센 자여서 각별히 조심스러워지고 그만큼 약아빠진 강기수다. 신미와 함께 내릴 때부터 차 위에서 강기수는 한태규를 감시했다. 자리를 몇 번 옮겨 보았으나 한태규의 눈길은 마치 주파수라도 맞추어 놓은 것처럼 어김없이 쫓아오곤 했다.
열차가 떠나기 전 얼핏 눈이 마주쳤을 때 강기수는 그것을 진하게 느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거리가 있어 그 눈빛까지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한태규 역시 집요하게 자기를 살피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도적놈 눈에는 자기를 보는 사람 모두가 수사관처럼 보이듯 그 순간 한태규 역시 자기를 죽이려고 그러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 강기수였다.
그리고 눈길이 떨어졌다가도 어떻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빨리 자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옳지 하고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분명 위에 걸친 밝은 밤색 가죽 잠바다. 그것은 한태규가 그에게 준 것이었다. 이미 다 낡아 볼품 없는 옷이었지만 차 바곤 위에 앉아가야 하기에 걸치고 나온 것인데 그것이 표적이 될 줄이야.
아무리 둘러 봐도 자기처럼 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이 자리를 뜰까 잠시 궁리하던 강기수는 그냥 앉아 있기로 작심했다. 그는 앞에 앉은 나이 비슷한 사내를 툭 툭 건드리며 권연한 가치를 내밀었다. 차가 떠나자마자 비닐막을 들쓴 그 사내는 강기수가 내미는 권연을 황송스레 받아 든다. 강기수는 피식 웃으며 라이타를 켜 불까지 붙여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한 대 붙혀 물었다.
"어, 그 담배 맛 좋구만.."
사내가 만족한 듯 강기수에게 눈인사를 했다. 마주 바라보니 등글등글하게 생긴 것이 그닥 맵짠 사람 같지는 않다.
"그런데 왜 열차 떠나자마자 비닐막부터 뒤집어 쓰는 거요?"
"에 추워서. 아직 늦봄이라지만 이제 보우. 차 바람에 귀 뿔 얼어 떨어지지 않나."
"솜옷까지 입었구만. 뭘 그리 젊은 사람이 추워서."
"에이 이게 말이 솜옷이지, 똥솜이 돼서 찬바람 막지 못한다니 옷이야 거기 입은 옷이 좋구만 뭐."
"이게 그렇게 좋아 뵈우?"
강기수는 두팔을 벌려 보이기까지 한다.
"가죽인데 왜 안좋겠소. 근데 그 아까운 옷 왜 그렇게 입소? 한 번 이런데서 굴리고 나면 개죽(엉망)이 될 텐데."
"다 낡아 빠진걸 뭐. ㅎ시 도착하면 내 버릴 건데…"
강기수는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걸 버려요? 헛 참. 돈깨나 주무르는 모양이군. 그거 버릴때 그냥 내버리지 말구 나한테 주슈."
"그러오. 그런데 ㅎ시까지 가면 개죽 될텐데 이건 해서 뭘 하려구."
"그거야 내 해본 소리잖소. 거기다 기름 발라 다시 손질하면 헤헤헤 이보시오 정말 주겠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자, 지금 가지오. 그 대신 그 솜저고릴 날 주고."
강기수는 서둘러 잠바를 벗었다.
"정말이요. 야 이거, 오늘 참 별스런 날이다."
사내가 내미는 솜옷을 바꿔 입으며 강기수가 다시 물었다.
"왜 별스런 날이요?"
"아 그렇지 않소. 사람 죽는걸 보지 않나. 값진 물건이 생기지 않나. 꿈에 송장을 보면 낮에 횡재를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지금 그렇지 않소. 히 히 히"
맵짜지 못한 줄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한참 모자라는 놈인줄은 몰랐다. 제 놈이 지금 어떤 옷을 입는지도 모르고 좋아서 흐물떡 거리는걸 보면, 하지만 다행이다 싶어 강기수는 담배를 버리고 나서 입은 옷을 머리까지 뒤집어 썼다.
고기 비린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자식, 좀 빨기라도 하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투덜거렸지만 일은 이제부터다. 작자는 그 낡은 잠바가 그렇게도 좋은지 입은 채로 쓸어 보고 팔을 펴도 보면서 히죽거리더니 다시 비닐막을 뒤집어 쓰고 모로 누워 버린다. 그러다가 다시 우뚝 일어나더니
"자우?"
하며 말을 건다. 더 대꾸하다가는 들통 날 것 같아 강기수는 아무 응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태규가 올라 오면 어쩌랴 싶은 심정이었다. 죽은듯 꿈쩍도 하지 않는 강기수를 멍히 지켜보던 사내도 멋적었던지 다시 쓰러진 후로는 잠잠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속도를 내던 열차가 다시 정지하자 아니나 다를까 웬 사내가 차 바곤 위로 올라왔다. 솜 옷 깃을 곧추세우고 팔로 얼굴을 가리고 누웠지만 강기수가 그 사내를 살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틀림없는 한태규였다. 그가 전지불을 켜들고 주위를 비칠 때 강기수의 심장이 금방 밖으로 튀여 나올 듯 쿵당 거리기 시작했다. 모자라는 사내가 요 순간 등대기라도 조금 보였으면 좋으련만 잠들었는지 꼼짝도 안한다.
팔 사이로 긴장하여 지켜보는데 전지불을 끈 한태규가 처음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않더니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차고 일어나 한방 먹이고 싶다. 방심 했을때 일격을 가하면 상대는 차바곤 위에서 기찻길 옆으로 떨어진다.
우중충한 산협을 달리는 열차 밑은 온통 바위 투성이라 떨어졌다하면 살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몸을 일으키려던 강기수는 다시 움츠렸다. 한 번 겪어 보았지만 상대는 역시 만만찮은 놈이다. 자칫 실수하면 자기가 살아남지 못 한다. 가장 적절한 순간에 완벽한 타격을 가해야만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는 무서운 적수가 바로 코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태규는 오로지 한 생각. 이놈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담배 한대를 꺼내 물고 라이타를 켜댔다.
불길이 일었다가는 죽고 다시 반복하자 모자를 벗어 바람막이를 만들고 이번에는 켠다. 그 불빛에 드러난 한태규의 모습을 강기수는 똑똑히 보았다.
'어라, 옷까지 갈아입고. 목도리까지? 흥 그런다고 못 알아 볼 줄알았던 모양이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한 강기수는 두 발을 모두어 안으로 바싹 끌어당기고 한 손으로는 지붕위에 삐죽이 내민 턱을 든든히 틀어 잡았다. 이제 혼신의 힘을 모아 발을 내 뻗어 냅다 차면 모든 것이 끝난다.
바로 그때다. 한태규는 자기 앞에서 꿈지럭거리는 작자를 보았다. 자기 옆구리를 무지한 모두발이 금방 발차기를 하려는 줄도 모르고 라이타 불빛에 비닐막 사이로 드러나 있는 가죽 잠바 끝을 본 것이다. 한태규는 씩 쓴웃음을 지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네 놈이 여기 숨어 있었을 줄이야.' 한태규는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 드리고는 후 내 뿜는 연기와 함께 입에 문 담배 대까지 함께 뱉어 버렸다. 그 순간에 담배 생각이 또 났던지 가죽 잠바도 비닐막을 들치고 움쭉 일어났다.
한태규는 순간도 지체함이 없이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잠바 앞섬을 두 손으로 든든히 움켜 잡았다. 이제 확 앞으로 끌어 당겨 옆으로 내치면 된다. 그러나 한태규는 자기가 그 짧은 순간에 떠올렸던 생각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아니 그럴새도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강한 힘이 자기를 차 바곤 아래로 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한태규는 가죽 잠바를 틀어잡은 손을 놓치 않았다.
"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올랐다. 그와 함께 털썩, 땅 바닥에 무거운 것이 닿는 그 부딪침 소리가 잇달았다.
"무슨 일이야."
엎드리고 눕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저 마다 소리쳤지만 누구하나 대답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열차도 내리막 급한 길은 다 내려 왔는지 속도를 내며 어두운 장 막 속을 헤쳐가고 있었다.
"아니, 여기 있던 그 고기배낭 친구 어디갔어?"
잠바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사방을 살피며 소리쳤다.
"정말. 그 친구 없구마."
"어이구 좀 얼빤하다 했더니 끝내"
"끝내라니?"
"보면 모르겠소? 분명 잠들었다가 미끌어 떨어졌겠지."
"아니 그럼 열차 밑으로 떨어졌단 말이야?"
"그럼 하늘로 날아 올랐겠소? 뻔한 걸 가지구"
"하. 이 사람 이거, 개새끼 한 마리 떨어진 것처럼 태연하기란?"
"그럼, 뭐 어쩌게?"
"사람이 죽었는데두?"
"죽었는지 살았는지 거야 봐야 알지."
"하 이거, 열차 밑에 떨어졌는데 살긴 어찌 살아."
"그만들 하라구 살아도 그 팔자 죽어도 그 팔자. 젠장 사람 죽는거 첨 보나?"
오구작작 지껄여 대는 소릴 들으며 강기수는 그냥 그대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내려다 보며 씨부렸다.
"여기 죽을 사람 또 하나 있구만 이보라구 일어나게. 그렇게 잠들면 안돼. 여기가 뭐 객실 의자 위인줄 아는 모양이지. 이봐."
그리고는 마구 잡아 흔든다. 그제야 강기수는 마치 잠을 자다 깨여난 듯 부시시 일어나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ㅎ시 다 왔어요?"
"허 참. 잠꼬대까지, 이봐 자네 날 은인으로 생각하라구 알았어?"
"무슨 사고가 났고?"
"엄청난 사고지. 별 수 있소? 죽을 놈은 죽고 산 놈은 또 죽을 때까지 버등거려 보는게지. 이보라구 차 밑으로 사람이 떨어졌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란 말야."
"정말이요?"
강기수는 짐짓 놀란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 사내의 시커먼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한 사람이 또 올라 온 것 같은데.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 좌우간 졸지 말고 조심하라구."
한 동안 웅성거리던 차 바곤 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 불안한 마음을 안고 피해자들이 떨어졌을 아래쪽만 지켜본다.
붕- 열차는 아는지 모르는지 기세좋게 내달리고 있었다. 강 기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공이다. 일은 간단히 마무리 됐다 아무렴. 라이타를 옷섶으로 가리고 불을 켜 담배에 붙이면서 강기수는 자기의 솜씨에 만족을 표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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