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의 비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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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모처에서 망명 11년을 맞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만났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그나마도 공휴일에는 자신이 직접 챙겨 드신다는 올해 여든 다섯 된 노인의 체구는 해마다 가냘퍼지고 있다. 갈수록 귀가 잘 안 들린다는 그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거부하고 적요한 삶을 고집하고 있었다. 1997년 망명 당시 황장엽씨는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보기 좋게 꺾였고,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대부분 집필과 독서로 고독하게 보냈다. 2003년 겨우 한 차례 미국 워싱턴 방문을 한 것을 빼고는 그의 활동은 국내외에서 극히 제한되었다. 필자는 그의 미국 방문길을 수행했으므로 그가 워싱턴에서 보낸 열흘조차 얼마나 숨막혔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대선 때 황장엽씨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당선된 뒤 그는 애써 기대를 감추고 "이제 나는 1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한다"고 말해 애잔한 느낌을 남겼다. 그는 다만 새 정부가 자신의 '외국방문' 길만은 좀 열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말했다. 북한 주체사상의 주창자이자 집대성자로서의 황장엽씨에 대해서는 그동안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았다. 주체사상으로 북한체제를 떠받쳐온 황씨가 북한을 떠난 것은 배신행위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고, 한국의 주류 정치세력 가운데 그를 햇볕정책의 걸림돌로 보고 그의 활동을 봉쇄하고 언로를 막으려 했던 이들도 있었다. 정부의 결사적 반대 끝에 극적으로 이루어진 2003년 미국 방문 때, 미 하원 대회의실에서 있었던 연설과 회견에서 한 참석자로부터 "한국 정부가 당신을 연금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미국으로 망명하시는 것이 어떤가"라는 질문을 받고 황씨는 "대한민국은 내 조국입니다. 조국이기 때문에 사선을 넘어 찾아온 것인데 내가 왜 내 조국을 버립니까?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다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논란은 있지만, 북한 주민들 역시 '대한민국 국민'의 일부이며 그들에게도 자유와 해방이 필요하다고 외칠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의 정치 지도자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황장엽씨의 좌절은 그대로 북한 주민들의 좌절이 아닐 수 없다. 반만년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라고 하는 이 시대에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기아와 공포에 짓눌려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아파하는 정치 지도자는 어디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일까. 동·서독이 분단되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나뉠 때 끝까지 서베를린을 자유진영으로 지켜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우리는 가난해도 자유로워야 합니다"라고 기염을 토했고, 동독의 자유화 기운이 무르익던 1980년대 말 서독의 지도자들은 동독의 독재에 대해 철저히 타협을 거부했다. 그 무뚝뚝해 보이는 독일 사람들이 동포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심장과 자유에 대한 경건한 이상이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먼 얘기만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북한 주민에 대한 입장은 이기적이고 소심하다. 정치 지도자들은 그것이 곧 남한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말하며 유권자들의 이기심에 편승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 새 정부는 이념을 넘어서서 실용을 중시하는 대북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이제 그 '실용의 목표'에 대해서 물을 수밖에 없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김정일을 안심시키는 실용'이 아니라 남쪽에서 흘려보내는 사랑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그 실용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일'이다. 이제 남쪽의 정치 지도자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용감한 심장'이 필요하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심장을 가진 분이었으면 한다. * 라는 제목으로 시론을 쓴 김미영 한교수동대 교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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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맞춰 얼굴 한번 뵙죠. 너무 오래 않만나니 얼굴 잘 기억 않나요.
건강하시죠? 식구분들 모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