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망대에 탈북자 직원 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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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망대에 탈북자 직원 1호 올 초부터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탈북자 김명학 (35)씨는 ‘분단의 상징’ 통일전망대가 개장 14년 만에 맞은 첫 탈북자 출신 직원이다. 이달 말이면 근무한 지 꼭 100일. 전망대 2층 북한 영상실에서 관람객들의 ‘북한 궁금증’을 직접 풀어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실향민 1세대부터 초등학생까지 하루 수백~수천 명씩 몰려드는 관람객들은 북핵 문제부터 김씨 개인 신상에 관해서까지 갖가지 질문을 그에게 퍼붓는다. “처음 근무할 땐 ‘북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립지 않으냐’는 어느 관람객 물음에 눈물이 솟구쳐 올라 아무 말도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질문 받아도 ‘이젠 내게 여러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며 받아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김씨가 오두산 통일전망대 직원으로 채용된 것은 강한 업무 추진력과 탈북 시절부터 이를 악물고 익혔다는 외국어 실력을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 그는 “탈북자 꼬리표를 떼고 당당히 경쟁하기에 제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며 “요즘도 인터넷을 통해 세계 경제를 배우는 등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에 밤을 꼬박 새워도 일 없습니다(괜찮습니다)”라고 했다. “요즘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다”는 김씨는 정착금 3000여만원과 월급을 아껴 7000여만원을 모았다고 했다. 통장 개수만도 11개. 얼마 전에는 할부로 굴착기 한 대를 구입해 ‘사장님’ 소리도 듣고 있다. 그는 평북 정주 출신. 방위산업체 간부를 지낸 부모의 2남2녀 중 맏아들인 김씨는 탈북 직전까지 북한에서 건설 공구와 기자재 회사의 품질 관리를 담당하던 엘리트였다. 20대 초반 그는 대학 도서관의 서적을 통해 남한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에 관해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남한과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을 키워갔다. “10년 뒤 북한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어 공부도 그때 시작한 겁니다. 가족과 친척들은 위태로워지겠지만 누군가는 남한에서 터 닦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1996년 첫 탈북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봄 결혼을 했고, 이듬해 딸을 얻었지만 ‘탈북’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1998년 봄 아내에게 출장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주머니엔 500달러와 일본어 책 한 권뿐. 한 달 만에 두만강에 도착했고 국경을 넘었다. 그는 중국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벽돌공장 노무자 등으로 고된 작업을 하면서도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는 2000년 12월 중국 국경을 넘은 뒤 미얀마에서 1년 반 동안 수감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2년 5월 꿈에 그리던 남한 땅을 밟았다.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나는 죄인”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내가 직접 짜준 털장갑 한 켤레가 가족에 관한 유일한 흔적”이라던 김씨는 “북에 두고 온 딸아이가 부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남·북한 래왕(왕래)이 더 잦아져 통일이 되는 날, 고향 사람들을 위해 아담한 학교 하나를 세우고 싶습니다. 그날이 곧 오겠지요?”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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