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과 도청의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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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야...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6.25전쟁 때 홀로 월남한 큰 형이 북에 살던 동생에게 묻습니다. “형님, 우리는 어버이 수령님과 장군님 품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북한의 동생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동생이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지 모릅니다. (형님이 남쪽으로 나간 뒤에 우린 월남자 가족이라고 모진 박해를 받았어요. 어떻게 그 고생을 차마 말할 수 있겠어요. 온 일가친척이 간부도 할 수 없었고 대학도 갈 수 없었고 가장 힘든 탄광에 쫓겨나 제명에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동생의 심정을 모르고 형은 또 묻습니다. “둘째는 벌써 죽었다고? 왜 죽은 거니...” “형님, 둘째는 장군님의 배려로 대학을 나와 큰 회사 간부를 하다가 몇 년 전에 병으로 그만...” 그러나 동생은 이렇게 말할 수 없어서 괴로울지 모릅니다. (형님 때문에 둘째 형은 그 좋은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탄광에 일하다 사고로 비명횡사를 했어요. 새파란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제가 볼 때 마다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그 이산가족 상봉이 지금 금강산에서 다시금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도 예외없이 남측 혈육과 만난 북한의 가족들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경직돼 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을 보면 말을 안 해도 그간의 고생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말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위에 적은 대화는 어느 이산가족의 대화를 가상으로 적어본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에서 남한 연고자는 정말 박해를 많이 받던 사람들인데 누구나 대답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들이 왜 저런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만난 혈육에게 그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원망과 하소연을 넋두리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당국으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교육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떠한 교육도 혈육의 진심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다만 책상 밑에, 침대 밑에 숨겨진 도청기일지 모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이산가족 상봉이 끝난 뒤 받아야 할 처벌에 대한 공포... 북한에서 남측 연고자들은 오랫동안 박해와 감시, 처벌을 받아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들은 누구보다 조심스럽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장은 북한 지역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설사 책상 밑에 도청기가 없다고 해도 저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누구나 도청의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북한의 기술력으로 볼 때 도청기가 발달했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누구나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나라는 도청이 발달됐다는 그런 불안감이.... 어려서부터 치밀한 상호감시체계 하에서 살다 보니 그런 확신이 자리 잡았는지 모릅니다. 저 역시 북한에서 살 때 김일성대 주변 벤치에는 모두 도청장치가 돼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친구들과 민감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의 부모도 저에게 늘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을 강조시켰습니다. 1960~70년대 두 분이 연애할 때 있은 일입니다. 한번은 사랑하는 사이인 두 분이 밤에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냥 같이 있는 것이 좋을 뿐입니다. 이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갑자기 벤치 밑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놀라서 들여다보았더니 안전원이 꿍~하고 기어 나오면서 “오늘은 헛수고했네”하면서 가더랍니다. 부화사건(간통)을 잡기 위해 공원에 잠복해 있었는데(당시 북한은 간통을 매우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몇 시간 숨을 참으며 들었는데 도무지 ‘혁명적’이고 ‘건전한’ 말만 해서 꼬투리 잡을 거리가 없는 거죠. 참다못해 결국 기어 나와 항복한 것입니다. 저의 부모는 이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들어가 도청기 대신 잠복해 있는 데 지금은 과학이 발전됐는데 도청기가 왜 없겠냐고 했습니다. 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이 이럴진대 한평생을 감시받아 온 남한 연고자들, 그들에게도 무서운 기억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산가족 행사장에서 어찌 속을 터놓을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서 남한 연고자들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철저히 간부승진도 제한이 있고, 대학도 못가고 합니다. 특히 국군 가족이나 치안대 가족은 정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죠. 남한에서 올라가 북한에서 일부 잘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대체로 학술이나 과학 분야 등에 제한 됐을 뿐입니다. 머리가 아까우니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 권력층인 노동당 간부나 보위부, 안전부 등은 남한 연고자가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1949년에 국군 대대장을 하다가 자신의 대대를 몽땅 이끌고 월북한 표무원이란 사람을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6.25 전쟁에선 북한군 부연대장인가로 참전해 공도 많이 세웠죠. 북한 입장에선 월북한 사람 중에선 가장 큰 공로자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출세의 끝이 어디냐 하면 평안북도 행정위원회 부위원장이었습니다. 도에는 권력기관으로 노동당 조직이 있고, 인민위원회가 있고, 보위부, 보안서 등이 있습니다. 행정위원회는 도당 부장보다 못한 급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행정직에서 말년을 마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럴 진대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제가 한국에 왔을 때 6.25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이 훗날 통일부 장관까지 돼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북한이라면 꿈에서도 상상이 안 되는 일이죠. 이산가족 상봉 초기엔 북한에서 김일성대 교수니, 예술인이니 뭐니 하면서 잘 나가던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얼굴에도 여유가 좀 느껴졌었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벌써 바닥을 보입니다. 이제는 점점 행사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달라져갑니다. 수척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눈빛에는 뭔가에 대한 공포가 한가득 담겨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얼굴이 인생을 말해주는 사람들뿐입니다. 오늘도 보니 아버지 보다 더 늙어보이는 아들이, 아버지는 잘 듣는데 북측 아들은 귀가 어두워 멍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과 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혈육을 만날 수 있어 행운일지 모릅니다.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신분을 속이고 살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주민등록사업이 시작된 것이 1968년 좌우이니 그때 남한과의 연고를 지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혈육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납니다. 2001년인가 북한 보안성(경찰)에 이산가족상봉센터라는 것이 생겨나 남한 친척을 찾을 사람은 신청하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겁이 나서 신청을 못합니다. “저건 무슨 올가미인가...저렇게 선전하고 정작 신청하면 어떤 구실을 붙여 탄압받을지 모른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압도 많이 받고 겁 많은 사람들이 친척을 만난 순간은 정신이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보위부’란 소리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 상봉장에서 번뜩이는 그 수많은 감시의 눈초리 앞에서 완전히 기가 질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기에 수많은 한국 언론 기자들까지 카메라와 촬영기, 취재수첩을 들고 돌아다닙니다.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상식으론 남한 기자도 다 변장한 안기부 요원입니다. 이들이 무서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언론의 취재 방식도 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상봉방식도 변화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개별상봉, 공동중식, 야외상봉, 작별상봉 같은 순서를 만들지 말고 늘 혈육들이 항상 같이 있게 해야 합니다. 잠도 같이 자고, 밥도 함께 먹고 해야 합니다. 그래봤자 3일도 안됩니다. 온전하게 48시간 조금 넘습니다. 앉아서 하는 상봉보다 금강산의 멋진 경치를 돌아보면서 야외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이야기하게 해줘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앉으면 의자 아래 도청기가 있을 것 같고, 밥을 먹으면 식탁 아래 도청기가 있을 것 같고, 야외에서 만나면 벤취 아래 도청기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들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생각을 주어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장은 북한 땅에 있지만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준 건물입니다. 우리 돈으로 지은 건물이니 관리에도 우리가 참여해 철저히 도청이 없다는 것을 국민들 앞에 담보해줘야 할 것입니다. 도청의 공포를 확실하게 해결할 몫은 정부에 있습니다.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에 앞서 남측 이산가족들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상봉장에 도청장치가 없다는 것을 정부의 이름으로 담보합니다”라고... 그래서 남측 혈육들이 북측 혈육들에게 이야기하게 해야 합니다. “괜찮다. 맘 놓고 말해라. 여기에 도청장치가 없다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 꼼꼼하게 조사해서 담보해 주었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혈육의 말이라면 좀 통하지 않을까요. 혈육을 만나고 돌아간 북한 사람들은 속이 터질 것입니다. 60여년 만에 만난 혈육들에게 ‘장군님 품에서 행복합니다’와 같은 헛소리만 하고, 참말로 하고 싶은, 수십 년 동안 가슴에 꽁꽁 묻어두었던 말은 터뜨리지 못하고 여전히 가슴에 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 어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도청의 공포를 몰아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정부에 이 정도 쯤은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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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늘 궁금했던 것은 정말 북한 인민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합니다. 정말로 북한 체제를 믿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물론 평양의 지배층들은 남한 소식을 알고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믿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닌가요???
중국을 넘어와야 깨이는 것 아닌가요??? 전 이것이 진짜 궁금한 대목입니다. 체제에 대해 과연 정말 의심을 하는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독재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제 아무리 군사독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정말 가슴아프고 원통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