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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로커였다(1) - 유상준
Korea, Republic o 관리자 7 16759 2008-05-07 22:07:32
아직은 다 말할 수가 없지만 제가 일한 것의 몇 부분을 사실대로 글을 올리니 탈북자구출을 계획하시거나 중국에 계시는 탈북자 분들 중 한국오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탈북자들은 나를 브로커라고 부른다.

나는 한 시간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우리 일행들의 상태만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따라 열차에 사람이 많아 우리 일행은 한곳에 모여 앉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널려 앉아 있었고 그래서 더욱 일행 한사람, 한사람의 안전과 그들의 심리상태에 신경이 쓰이었다. 나와 가까이에 앉은 은심은 편안한 표정에 그 무엇인가 희열에 넘치는 듯한 미소가 가끔씩 얼굴을 스쳐지나갔고 영옥은 불안한 기색에 약간 불그스레한 얼굴은 더욱 검붉게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창가에 앉은 갈량은 아무생각도 없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8월초의 사막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여기 저기 자라고 있었으며 작은 꽃망울들이 한껏 피어올라 드넓은 사막은 하얗게 단장되어 있었다.

이제는 핸드폰 검사도 끝나고 사탕도 스무 알 정도씩 나누어 주어 주머니에 넣게 하였으니 그런대로 잘되어 가는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옷이 야단이다. 내가 떠날 때 준비한 옷은 입지 않고 날씨가 더우니 가다가 선생님이 옷을 갈아입으라면 갈아입겠다고 대답하고는 열차를 타기 전에 옷을 갈아 으라고 말하였지만 갈아입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들이 야속하였고 단호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열차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지만 그렇게 되면 주변사람들의 의심을 살수가 있어 미리 이야기 하였지만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할 수없이 여자들에게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른 곳에 가서 앉으라고 이야기 하였지만 열차에 사람들이 많고 종착역이 가까운지라 사람들이 붐비어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열차는 서서히 종착역에 들어서고 나는 은심의 손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영옥과 갈량이는 부부처럼 우리 뒤를 따라 왔다. 그전에는 구역사로 나갔는데 오늘은 신역사로 나가는 것이 분위기가 엄해 보이였으나 모두들 잘 빠져나왔다.

역전 밖을 나와 보니 생각보다 엄청 많은 택시들이 역전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우리는 택시사이를 돌고 돌아 도로가에 나왔다.

나는 일행을 점검하고 특히 여자들에게 옷을 바로 입으라고 주의를 주고는 곧장 공중전화소로 향하였다. 그곳은 내가 일이 끝나면 한국에 전화하기 위하여 늘 이용하였고 로반(사업가)이 연세가 많은 한족분인데 내가 손 짐을 맡기고 찾으러가서 값을 치르면 받지를 않고 언제나 밝고 소탈한 웃음으로 다시 오라고 바래주던 곳이었다.

이제 손 짐을 맡기고 건설장에 가서 나갈 곳을 정찰한 다음 시장에 가서 슬슬 돌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10시 30분이면 국경선을 향하여 출발하면 된다. 이곳에서 6킬로미터 가면 몽고 땅이다. 여기서 생사운명이 갈라지는 것이다.

나는 영옥과 갈량에게 3~40미터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라고 하고는 은심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내가 공중전화소의 문을 열어보니 책상과 전화기가 모두 없어지고 폭격 맞은 집 같았는데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스산하고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감싸는것이였다.

내가 길가에 다시 나오니 은심이가 옷을 앞으로 하고 두 팔을 낀채 "선생님"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옷차림이 우스꽝스럽고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천진스럽고 귀염스러웠지만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옷을 똑바로 입으라고 면박을 주고 함께 걸었다.

이곳은 마지막 국경지역이라 옷차림과 손 짐까지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일이 살펴보아야 하기에 나도 작은 가방에 갈아입을 속옷 한 벌과 간단한 세면도구, 확대경과 군용나침판. 볼펜과 연필 한 자루가 전부였으며 그것도 기차에서 내리면 곧 손 짐으로 맡기군 하였다.

손 짐을 여관에 맡기자, 그곳의 주인아주머니가 생긴 것처럼 상냥하고 인심이 후하다. 그리고 신분증을 보자고 아니하고 값도 비교적 싸다. 우리가 여관으로 향하고 있을 때 길가에 한 남자가 자기네 여관에 들란다.

중국에서 늘 보아오는 호객행위로 보고 나는 생각 없이 볼일이 있다고 대답하고 가는데 또 다른 사람이 자기네 여관에 들란다. 나는 그에게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가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몇 명의 남자가 영옥이와 갈량이를 붙잡는 것이다.

‘아, 무엇이 잘못되였구나,’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무엇이 나를 뒤에서 덥치 듯 그러안는 것이었다. 은심이 뒤에 있던 키가 큰 남자가 어린 새 마냥 가냘픈 은심을 와락 잡아당기면서 끌어안는다. 은심은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버렸다. (다음에 계속)

2008년 5월 5일 유상준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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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일록 2010-05-21 00:46:19
    1편만 읽어보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만약 성공해서 남한에 도착하였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의 몇푼안되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 찾아다닐 당신을 상상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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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랑루즈 ip1 2011-03-03 11:11:38
    말이 좀 심하시네요..어찌 됐건간에 돈받고 하는일이지만..
    탈북자들과 위험을 같이 감수하면서 탈출하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셨던 분한테...
    도가 지나치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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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우즈 ip2 2011-06-01 17:21:28
    돈 받는거야 어찌됬든 계약이니까 남한에 정착금받으로 오는 건 좋은데 일부 브로커들은 안주면 북에 있는 가족들 다 죽인다고 협박하는건 인간으로서 할짓이 못되더군요.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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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제비 ip3 2011-08-21 21:36:06
    ㅎㅎ 날왜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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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자꿈가지고 ip4 2012-01-05 14:08:55
    1편 먼저 읽었는데 제가 다 긴장해지네요....저도 1차 한국기도가 그렇게 비참하게 실패했었으니까...글구 샤일록님, 중국에서 쫓겨 다닐때에는 돈주고라도 한국가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던가요? 참말루 화장실 들어갈때 다르구 나올때가 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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