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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로커였다(2) - 유상준
Korea, Republic o 관리자 9 14604 2008-05-07 22:08:44
나의 등 뒤에서 “네가 북한을 도주하여 한국가고 지금 탈북자 나르는가?”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쩐머즈도?"'(어떻게 아는가?)고 물으니 조선족이 고발했단다.

바로 나의 앞에서는 은심이가 자기는 조선족이라고 딱 잡아떼면서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힘껏 몸부림 치고 있다. 상상도 못할 모든 일들이 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이미 대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베코 중형 버스가 금방 우리 쪽으로 와서 강제로 일행들을 마구 잡이로 밀어 붙여 차에 태운다.

버스는 내가 여러 번 정찰한 경험이 있는 골목길을 따라 서서히 가더니 이련호특 변방공안 지대(변방대)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변방대는 그전에 보아왔던 것 보다 실제로 더 규모가 컸으며 두 번째 다층건물 2충에 있는 어느 한방으로 들어갔다.

방 가운데는 2층 철제 침대가 질서 있게 배렬 되여 있었으며 서쪽 면은 사물함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있는 옷과 신발에 오른 먼지로 보아서는 방은 아마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창밖으로는 우리 일행들이 빠져 나가기로 예정된 도시 골목길과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방안에 들어온 장교가 나에게 신분증을 달라고 하기에 순순히 여권을 내밀었더니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가고 묻는다. 조금 있으니 나를 그러안았던 자가 들어오더니 자기 방으로 가잔다.

그의 방은 바로 옆방이었으며 편수책상 한 개와 두개의 소파가 있고 어떤 남자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면서 담배를 들이 빨고 있다. 그는 장교에게 기다렸던 것처럼 이사람인가고 묻고 장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 중얼거리고 있다.

나는 소파에 앉은 남자에게 중국어로 “네가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고 물으니 자기는 조선족이며 연길에 살다가 장사하기 위하여 이련으로 왔으며 이름은 허영호라고 한다. 책상을 가운데로 하고 장교와 내가 마주 앉고 거의 기계적인 질문을 거침없이 하고 나도 대체로 사실 그대로 순순히 대답하였다.

나는 조사가 끝날 무렵 장교의 신분을 물어보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니 빠른 시일 안에 한국대사관에 소식을 통보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장교는 이 부대 안전 담당책임자이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이한 타라(이련남쪽 1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에 군인들을 보냈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들어 왔다고 한다.

내가 이자들이 왜 탈북자 잡지 못하여 안달이냐고 묻자 그는 지난 (2007년) 3월12일에 중국정부에서 국경경비를 강화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왔으며 훌륭치(만주리 근처의 작은 마을) 변방대 책임자가 탈북자를 많이 잡아 10개월 만에 한 계급 승진하였으며 오늘은 한국사람 잡았으니 작은 상품이나 상금이 있을 거란다.

장교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개의치 않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 것 같더니 밥을 먹었는가고 묻는다. 나는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식당에 식사를 주문할 터이니 함께 가서 식사하잔다.

나는 밥 먹을 생각이 없고 우리 사람들이 배고파 중국에 왔다가 이 봉변을 당하였으니 우리 일행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수감소로 가는 도중에 어둠을 이용하여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를 통역에게 주면서 준비해준 전화번호에 급히 소식을 전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수감소는 ㄴ자형으로 철제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왼쪽으로 철제 대문이 있는데 그것을 열면 복도 좌우로 7-8개의 철문둘이 있는 것을 보면 첫눈에 이것이 구류장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감방은 25평방미터 정도 되였으며 흔히 북한 농촌 문화선전실 형태로 방바닥이 되어 있었으며 한쪽 벽면에는 이부자리가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었고 세면대와 변기 그리고 천정에는 CCTV가 설치 되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경비병이 쉴 새 없이 거닐면서 방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체포되는 순간에 당황스럽다가 안정되는 것 같았는데 감방에 들어오니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수가 있나? 정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빨리 이성을 찾아야 한다..이제 막 시작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나의 몸에는 몽고에 보내는 몽고어로 된 소개신과 2개의 전화카드, 전화수첩이 있었다. 전화카드에는 중국 그리고 북한과 교신한 전화번호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이 군인들에게 넘어가면 많은 분들이 상하게 되여 있었다.

나는 전화카드를 끊어서 변기 안에 넣고 전화번호수첩에서 중요한 전화번호가 기록된 것은 종이채로 뜯어 내여 한참 비빈 후 몽고 소개신과 함께 변기에 넣고 물을 흘려보냈다. 우리가 잡힐 때 손가방과 전화기만 빼앗기고 나머지는 몸에 있었기에 정말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한참 엎드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내가 죄인이니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정말 간절히 찾고 또 찾았으며 부르짖었다. 기도하고 일어나 방안을 거닐어도, 조금도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남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하늘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밝고 밝은 별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갈하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정말 아름다음의 환상세계 같았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늘 기도하고 어려울 때 매여달리고 찾은 나의 하나님이었다.

나는 탈북자들에게 말한다. “나는 선교사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울 때 찾고 의지하고, 우리 함께 하나님을 믿고 반드시 승리하자고,”

탈북자 3국 탈출은 문제도 아니다. 조금 있으면 새로운 길을 열면 그때는 보다 안전하게 그리고 더 많은 탈북자들을 탈출시킬 수 있다. 재정문제다. 이제는 재정적 여유도 없고, 한 사람당 평균 30만원 정도만 회수 하여도 얼마든지 일할수가 있다.

문제는 북한이다. 마음대로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으로 매수하는 방식은 싫었고 또한 인위적으로 하기도 싫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자면 의지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키우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이고 모든 것이 윤곽이 드러나 일할 수 있게 되였는데 여기에만 몇 년의 품을 넣었다.

북한, 북한만 생각하고 너무 많은 품을 넣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원통한 것이다. 은심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나는 경비병에게 누가 우는가고 물으니 눈만 흘기면서 가버린다.

조금씩 울음소리는 커지더니 통곡으로 변하고 만다. 아마 은심의 울음소리인 것 같다. 어찌 그러하지 않으랴. 은심은 19살에 산동성 청도에 팔려 갔다가 도주하여 연변으로 오다가 경찰에 잡히어 북송되였는데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정말 북송이라면 죽기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다. 아, 내가 죽을 죄를 졌구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먼동이 터오면서 은심의 목소리가 들여온다. 아마 장교의 감시 밑에 복도 청소를 하는 것 같다. 얼마 후 복도청소가 끝났는지 창밖에서 마당을 쓰는 은심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장교에게 내가 청소를 할 테니 은심을 들여보내라고 말하니 장교는 그럼 령도(중국에서 책임자에게 령도라고 말할 때도 있음)가 나와서 하란다.

내가 청소를 하면서 보니 마당은 너비10미터, 길이 25-30미터 정도 되였으며 3미터 높이에는 25미리 철근을 그물형태로 엮어 덮어놓아 그 무엇이든지 그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게 되어있다.

나의 옆방에는 갈량이와 18세 정도 되여 보이는 어린 청년이 있고 그 다음 방에는 영옥과 30세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마가 있었는데 몹시 허약하고 얼굴이 창백한 것이 그 어떤 병으로 많이 고생한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나를 조사하던 장교를 비롯하여 많은 장교들이 몰려와 나와 우리 일행만 따로 불러내어 나와 갈량이에게는 손에는 수갑을 발에는 족쇄를 그리고 수갑과 족쇄사이를 사슬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아마 짐승도 그렇게 묶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은심이와 영옥의 손에 쇠사슬이 달린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 수감소에는 탈북자들과 조선족도 있었지만 저의 일행만 따로 불러내어 어데 론가 끌고 가려고 하니 얼굴이 발그스레한 영옥의 얼굴은 검푸르다 못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용서를 빌며 차에 올랐다. 영옥과 은심이 바로 앞에 있다, 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를 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나의 옆과 앞에는 젊은 장교가 앉았고 책임자인 듯 한 장교는 차에서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조금 후 차는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와 늘 보아온 거리를 누비며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도시밖에 정규 간수소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집녕이나 호화호특으로 가겠지. 그 다음 일을 알 수가 없다.

우리를 태운 차는 도시밖에 있는 간수소는 거들떠보는 것 같지도 않게 달리더니 드디어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벌써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다음에 계속)

2008년 5월 7일 유상준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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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향 2008-05-08 11:11:37
    그담은 어케 됏어요? 빨리 3부 써 주세요, 그들이 북송됏나요?
    ㅠㅠㅠ 북송이면 한국기도로 잘못됄수도...
    이글 보니 내가 걸은길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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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현 2008-05-08 13:21:05
    아 ~ 유상준님 .. 빌고빌었습니다 유상준님이 중국에 잡혔다는 소식들었을때 빌고 빌었습니다.
    생사를 알수없는 역경속을 이겨내시는 죄인이라고 하나님에게 고백하시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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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경 2008-05-08 16:29:42
    이글은 민경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8-05-08 16: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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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그름 2008-05-09 22:28:58
    탈북자들의 목숨을 자기목숨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북한사람들의 한국행을 도우는 브로커라면 정말 존경가네요!!!다음글기다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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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순 2008-05-09 22:38:25
    선생님 오늘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선생님이 쓴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선생님이 있었기에 나 같은 사람도 한국에 올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아픈 마음을 무슨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제 몇일 안 있으면 저의가 한국에 들어온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1년이 된다고 하지만 단 한번도 찾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건강하시고 여기 한국에 있는한 언젠가는 선생님과 만날 그날이 꼭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다음글을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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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마디 2008-05-10 01:45:07
    감사합니다. 저도 2007년 5월, 집녕,얼렌을 통하여 들어온 탈북자입니다.
    브로커도 따로 없이 제가 단지 중국어를 안다는 한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지도를 보면서 일행을 이끌고 왔는데 그 때에는 그렇게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거라는 생각을 못해보았습니다. 다행이 운이 좋아서 무사히 국경을 넘었고... 선생님.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름다우신 분에게는 행복만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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