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박창수 사장 이야기 평양 태생 냄비회사 기업가 박창수 공단 입주에서 전쟁같은 오늘까지
2016-02-19
박창수(70) 사장이 피곤한지 지난 17일 오후 인천 공장 사무실에 앉아 두 손을 얼굴에 댔다. 2013년 5월 한 차례 개성공단 폐쇄 때 얼굴마비가 왔었다.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78년 스테인리스 냄비 제조 회사를 세웠다. 같은 업종의 회사들이 싼 임금을 좇아 중국과 동남아로 달아날 때 재창업한 ‘창신금속’ 사장으로 2010년 개성공단에 입주했다. 노동자 1인당 월 인건비는 220달러.
박 사장은 품질 때문에 남측 상주 직원과 신경전을 벌이던 북측 노동자에게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며 설득했다. 직원이 145명으로 불어난 개성공단 공장에서 만든 냄비는 ‘메이드 인 코리아’ 마크를 달고서 일본과 중동으로 팔려 나갔다. 지난 11일 개성공단 폐쇄 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매일 전쟁 같은 나날이다. 싼 인건비, 숙련 노동자 없이 어떻게 원가를 맞추나? 하긴, 먹고사는 게 전쟁이다. 북에 두고 온 공장과 노동자들 생각에 눈물짓는 사장, 월급 외에 노동자에게 주는 생필품 지급을 놓고 실랑이하는 중소기업인, 한번 주기 시작하면 절대 줄일 수 없다는 걸 아는 자본가, 북한 2·3차 산업이 발전하길 바라는 평양이 고향인 남자, 언젠가 개성공단 설비를 북에 남겨놓고 나와서도 북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하길 바랐던 개성공단 기업인. 모두 박 사장이다. 모순 가운데 드러난 진심은 모순 없는 진실보다 현실에 가깝다.
2000년 8월22일 현대-북한아태평화위 개발합의서 체결, 2003년 6월30일 개성공단 1단계 건설 착공식, 2004년 12월15일 첫 제품 생산, 2013년 5월3일 개성공단 1차 폐쇄, 2016년 2월11일 2차 폐쇄…. 개성공단 역사입니다.
2010년 개성공단에 입주해 스테인리스 냄비를 제조하는 박창수 사장을 만났습니다. 두 차례 공장 폐쇄를 겪은 기업인의 그늘진 얼굴 속에도 개성공단, 남북 경협, 남북 대치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인터뷰는 제한된 진실을 약속하고 시작한다. 모든 인터뷰는 누군가의 진실을 전한다며 쓰인다. 대다수 인터뷰는 진심을 담은 그릇으로 유통된다. 말을 질료로 빚는 토기장이 기자도 상대 말이 진심에서 불어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여부를 가려야만 하는 인터뷰에선 상대 말을 재점검해야겠지만, 고해성사와 고백 같은 말들까지 진심인지 진실인지 알 수는 없다. 잘 모른다는 말을 숙명처럼 할 수 없는 기자들은,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운 기자들은 상대가 진실과 진심을 말한다, 믿어버린다. 신뢰 말고 자존심이 때로 믿음을 부른다.
그와는 어떤 것은 말하지 않고, 묻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만났다. 어떤 부분은 숨길 거고 쏟아내지 않을 걸 전제로 만났다. 제한된 진실을 약속하고 만났다.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창수(70) 창신금속 사장. 박 사장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장사를 하러 월남했다 가족에게 돌아왔고 1951년 1·4후퇴 때 온 가족이 월남했다. 1978년 스테인리스 냄비 회사 ‘일주교역’을 세웠다가 한차례 사업이 망한 뒤 1989년 같은 업종의 ‘창신금속’을 재창업했다. 한국금속기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이었던 그는 2000년 현대아산을 따라 허허벌판 개성공단 부지를 둘러봤다. 한동안 개성공단에 입주하지 못하다 2010년 개성공단에 들어갔다. 서먹하던 북측 노동자들과 손발이 맞을 무렵 2013년 4월9일 북측이 노동자를 전원 철수했을 땐 안면마비가 오면서 입이 돌아갔다. 품질, 기술에서도 남측과 다를 게 없을 무렵, 북한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지난 11일 공단이 두번째 폐쇄됐다.
북측과의 실랑이
인천 남동구 논현동 창신금속 공장 앞마당엔 성형을 마쳤으나 완제품이 되지 못한 스테인리스 냄비가 쌓였다. 주차장은 창고가 되어버렸다. 개성공단에 가야 할 미완성 제품들이다. 기업인은 정부 심기를 자극할 수 없다. 모든 먹고사는 문제는 돈에 달렸다지만, 개성공단의 먹고사는 문제는 정부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지난 16일 국회 연설에서 개성공단 기업인들에게 대체 부지 등 공장 입지 지원, 생산 차질로 인한 손실에 대한 별도 대책, 남북경협기금으로 투자금액의 90% 지급을 약속한다고 말하자, 기업인들은 잠잠해졌다.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언론과의 전격 인터뷰를 꺼린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123개 기업은 대다수가 중소기업이다.
정부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는 전제로 박 사장을 지난 17일 만났다. 북한에 대한 언급이 향후 사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만나기 전 인터뷰 목적을 몇 차례 묻던 그는 공장 사장실 소파에 앉자마자 다시 한번 의도를 확인했다. 테이블에 녹차가 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어 6년 전 처음 개성공단에 입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6년 전 처음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남측과 북측 근로자 사이에 통하지 않았어요.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남측 직원하고 (북측 노동자가) 자꾸 부딪히는 거예요. 제품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 처음엔 제품 다리나 뚜껑 같은 걸 거기서 만들었어요. 다른 개성공단 스테인리스 냄비 공장을 인수해서 들어간 거라, 거기 일하던 근로자들을 인계받았어요. 자기들은 이미 몇 년 했다는 건데. 부딪히는 이유가, 이 정도 하면 되는데 남측 직원은 다시 하라고 하고, 북측 직원은 안 된다 그러고. 실랑이였죠.”
2010년 개성공단에 입주한 박 사장은 상주 직원을 개성공단에 보내놓고 전화 통화로 갈등 상황만 전달받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완제품들을 차에 싣고 북측 노동자들을 만나러 출발했다. 들어갈 시간, 나올 시간을 정해 통일부에 신청하고 승인받았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서류를 보여줬다. 지금은 카드를 보여주지만 당시는 전산화가 지금만 못했다. 남방한계선까지는 우리 군용 차량이 안내하고, 비무장지대를 넘어가면 북측 군용 차량이 에스코트한다. 북측 남북출입사무소에 가서 다시 절차를 밟고 공단까지는 차량으로 약 5분. 인천에서 출발한 지 몇시간이면 개성공단에 출근하고 집으로 퇴근한다.
“제가 제품을 여러 개 들고 개성으로 올라갔어요. 당시 북에 저희 공장 노동자가 45명밖에 없었는데, 제품 진열해놓고 북측 (노동자) 대표한테 인사를 처음 하면서 일성이 ‘여러분한테 미안하다’였습니다. ‘남측에서 내가 삼십년 가까이 만든 제품을 처음 하는 사람들한테 이만큼 만들라고 한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우린 이미 이만큼 만들어서 세계로 수출하고 있기 때문에 개성에서 만들었다고 이보다 못한 걸 팔 수는 없지 않으냐. 이 수준 안 되면 못 파는 거니 빨리 숙련돼서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북측 (노동자) 대표는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고요.
일한다는 게 서로 통해야 하고 결국 교감이잖아요. 남측 상주 직원 한명 빼고는 북측 직원 145명이 될 만큼 개성공단 공장에 일이 많아졌어요. 어느 정도 서로 교감되니까 제가 이젠 솔직하게 뭘 요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북측 대표, 조반장, 생산관리 직원들 모아놓고 이런 이야길 한 적도 있어요. ‘여기 있는 설비, 내가 다 갖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그땐 (당신들이) 여기 있는 설비 다 가지고 쓸 수 있겠냐. 그때를 대비해 빨리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스테인리스 제품은 (국가가) 산업화되는 데 아주 효자 종목입니다. 우리도 수출 초기에 다 스테인리스 제품 만들어서 컸어요. 스푼, 포크, 나이프 만들어서.”
1951년 1·4후퇴 때 온가족 월남 재창업한 냄비회사 ‘창신금속’ 2010년 개성공단에 들어갔다 연매출 40억~50억, 일본·중동 수출 2013년 폐쇄 땐 안면마비 오기도
10일 통일부 연락받고 장관과 만나 ‘공단폐쇄’ 통보는 상상도 못해 다음날 오후 직원들 공단 떠나와 대신 생산할 외주업체 알아보며 하루하루 전쟁같은 나날 보낸다
“불량품 나오면 개성 올라가 자존심 건드린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남측보다 품질 좋아요 제일 아까운 게 이제껏 숙련된 사람들을 두고 온 것이지요”
황해도 배추와 김치공장의 꿈
“불량품이 나오면 개성으로 올라가서 자존심을 건드린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밖에 못 만드느냐고. 이념, 정치를 떠나 오로지 일만을 위해 만나고, 일하고, 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지요. 지금은 남측보다 품질이 좋습니다. 우리 업종을 보면 오래 일하는 사람 찾기 힘들어요. 인력이 부족해서 숙련이 안 되는데 개성공단은 이직이 없으니까요. 제일 아까운 게 숙련된 사람들을 두고 온 것이지요. 지금은 주문받은 걸 스스로 계획 세워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왔습니다.
기업인으로서 자부하는 것은, 개성공단이 바로 자유경제의 일면 아닙니까? 북한 사람들은 공동 사업장에 불려가는 게 습관이었는데, 공장 생산이 고객에게 납기일과 품질을 맞춰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은, 변화시켰다는 말을 해선 안 돼요. 그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이, 남측 사람과 접촉해서 변했다는 말을 듣는 거예요. 그들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지요.
쉽게 한마디 뱉은 것을 요즘은 실시간으로 어떻게 다 압니다. 오후 1시에 북측 사람과 회담을 한 적 있는데 오전 11시 뉴스를 알고 와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우리에겐 너무 그쪽을 무시하고 그런 경향이 있어요. 특히 종편(종합편성채널)도 그렇고 언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우리에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이어가던 지난 10일 개성공단기업협회 이사인 그는 통일부 연락을 갑자기 받고 장관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로 차를 몰았다. 간담회 내용은 몰랐다. 개성공단 인력을 줄이라고 하려는 건가? 그 정도 제재일 줄 알았다. 오후 2시, 이사진 20여명이 장관과 마주 앉았다. “개성공단 폐쇄”를 통보받았다. 다음날 오후 5시30분까지 개성공단 상주 직원들이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벗어나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때부터 매일 오전 8시30분이면 개성공단기업협회 비상대책위원회 회의를 하고, 이미 발주받은 물량을 생산하기 위해 개성공단 대신 한국에서 외주업체를 이쪽저쪽 알아보고, 치솟는 원가 부담을 어찌해야 할지 신음하고. 전쟁도 안 터졌는데 전쟁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2013년 북측 요구로 5개월간 폐쇄됐을 땐 어땠습니까?
“5개월 만에 보니 얼굴들이 새카매 갖고 안 좋더라고요. 고생을 한 것 같은데 물을 수도 없고. 짐작만 할 뿐이지요. 사상교육을 많이 받은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공장 돌아갈 때도 일주일에 한번 ‘문화생활’이라고 해서 총화 하고 비판하는 집체 교육을 받습니다. 회사마다 달라요. 어떤 공장은 월요일, 어떤 공장은 화요일. 그 교육 시간만큼 노동 시간이 빠지기 때문에 보충으로 일을 한시간 더 해주지요.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웠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해줬어요.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고. 2013년 문 닫혔을 때 안면 신경마비가 와서 지금도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북측 근로자들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달에 한두번 가면 ‘늘 건강 조심하시라’고 걱정을 해줍니다. 우리 북측 (노동자) 대표가 지난 2월1일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서로 직접 통화를 못하니까, 우리 상주직원한테 ‘건강하시라’는 말을 제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퇴직했다고 합디다.”
-지난 10일 정부의 폐쇄 통보가 갑작스럽진 않았습니까?
“우리하고 왜 협의를 안 했냐, 그런 말을 할 순 없고 사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 그냥 통보만 하고 따르라고만 하고 그러니까.”
박 사장은 다른 이야기로 전환했다.
“내가 가서 느낀 건, 진짜 남북 경협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력만 데려다 쓰는 게 아니고 경공업 2차 산업을 제대로 2차 산업화하는 거, 다시 중공업 중심의 3차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공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꿈이 뭐냐면요. 사업이 안정되면 김치공장을 만들고 싶어요. 황해도 벌판 무, 배추가 개성공단에 들어오고 김치를 만들고, 북한산 김치가 남쪽에 내려오면 진짜 경협이 아니냐는 거지요. 무역이 제대로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 그게 경협이지요. 제2의 개성공단 만든다 해도 이것과 똑같으면 의미가 없다고 나는 많이 주장했어요. 진짜 경협이 이뤄지면,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은 인력만 데려다 쓰니까 서로 끊기가 쉬운 것이지요.”
영원한 폐쇄 각오해야 하나요
-폐쇄를 예상했습니까?
“(지난 1월6일) 4차 핵실험 전까지 개성공단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 때도 정부가 5·24조치(대북경협 전면 금지)를 내렸지만 그걸 이유로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았습니다. 문 닫힌 이유는 (2013년 4월 한·미 군사훈련 등으로) 우리 쪽에서 최고 존엄을 훼손했다고 북측이 몇달간 폐쇄한 것이었지. 솔직히 그래서 앞을 예상할 수가 없어요, 지금. 2013년엔 북측의 폐쇄 이유가 ‘최고 존엄에 대한 훼손’이었고 우리도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협상을 했기에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폐쇄의 이유가 핵개발, 미사일 발사예요. 그들이 그걸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다시 개성공단 문을 열 것 같지 않아요. 영원한 폐쇄, 솔직히 그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창신금속 연매출은 40억~50억원이다. 대다수 제품은 일본과 중동 등으로 수출하고 내수용 제품은 많지 않다. 2000년대 초 동종 기업들이 인건비를 낮추려 동남아,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는 중국보다 임금과 물류비가 낮으며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개성공단을 택했다. 현재 개성공단 임금은 주 6일 근무, 하루 8시간 노동에 월 임금 75달러다.
“2000년 한국금속기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내가 했어요. 개성공단 이야기가 나온 게 2000년 초잖아요. 이사장 하면서 개성공단을 방문했습니다. 공장 생기기 전에 허허벌판일 때. 개성공단 계획이 정해지고 현대아산이 사업에 착수할 때 분양하려고 기업들에 부지를 보여줬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나서 나왔기 때문에, 큰 추억은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평양 분들이고 고향에 대한 향수도 있었지요. 갔을 때 남다른 감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나이도 있고 어차피 큰 규모는 못할 거니까 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공장을 세우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분양 초기에 자격이 안 돼 들어가지 못했지만 빨리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현재 납품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일단 주문받은 것은 그 가격으로 해야지요. 개성에서 하던 작업은 한국 외주업체를 급히 찾아 한시름 놓았습니다. 계약한 가격으로 일단 납품을 해야지요. 하지만 한국 인건비가 훨씬 높아 원가가 오르니 손해겠죠. 우선 급한 물량은 맞추고 원가 계산을 다시 해야 할 거예요. 가격 경쟁력을 다시 갖추려면 방법을 찾아야 해요.”
-개성공단 노동자들 실제 임금은 어느 수준입니까? “연장, 야간 근로 수당 100%, 200%씩 지급합니다. 시작할 때 한달 기본급 50달러로 시작해서 5%씩 상승해 현재 기본급 75달러입니다. 각종 수당을 더하면 한달 임금 평균 220달러입니다. 현재 우리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씩 근무하고 있습니다. 임금 성격의 노보물자(노동보호물자)를 더하면 실제 임금은 더 많아지겠지요. 노보물자라고 해서, 일년에 두번 작업복과 신발 지급하고 매달 비누·치약·칫솔·수건·화장지·면도기 등 생필품을 제공합니다.”
-북한 노동자 임금에도 인센티브 개념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꾸 차등 임금을 하자고 요구하죠. (인센티브와 비슷한) 상금제도라는 게 개성공단에도 생겼습니다. 전에는 무조건 공평하게 나눴는데, 지금은 기본급에 상금을 더해 준다는 것이지요. 그걸 관리할 수 있었던 게 초코파이예요. 임금을 북측 총국에 주기 때문에 우리 공장 근로자가 당국에서 실제 얼마를 받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지급하는 초코파이는 본인이 직접 가질 수 있죠.
초코파이의 진짜 효용은 사람들에게 근로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오전, 점심, 오후 휴식 시간에 하나씩 초코파이를 지급합니다. 통상 하루 세개 지급합니다. 어려운 일, 쉬운 일 하는 일이 다 다르잖아요. 우리 공장에선 먼지 나고 어려운 일 하는 사람은 초코파이를 하루에 세개 더 줍니다. 연장 근무 수당도 있습니다. 그것도 기업이 북측 당국에 지급하는 것이죠. 연장하는 직원에게는 라면이나 초코파이를 한시간에 하나 지급합니다.
포장된 남측 초코파이, 라면이 북한 전역 장마당(사설 시장)으로 퍼져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먹는 게 아닙니다. 모아서 팔고 생활이 나아지는 것이지요. 초코파이 때문에 오죽 장마당이 활성화됐으면 북한 당국에서 2015년부터 한국산 초코파이, 라면 못 주게 하겠어요? 한국 걸 사서 줬는데 그 돈도 적지 않거든. 북측이 자기네들 걸 사서 주라는 거야. 그래서 요즘은 80% 이상 북한 초코파이를 사서 줘요. 그건 뭐 (장마당) 유통이 안 되니까. 한국산 라면은 포장을 뜯고 비닐봉지에 주는 것은 허용하겠대요. 그렇게 나간 라면은 반값이라고 합디다. 초코파이와 라면 대신 요즘은 기름과 조미료(MSG)로 대체가 됐어요. 그것도 북측이 외국에서 수입한 기름과 조미료입니다. 이런 건 좀 알아줬으면 합니다. 개성공단 중소기업인들이 초코파이와 라면 사는 데 정부가 보태줬나요? 10년 동안 5만명 노동자에게 지급했습니다. 1억달러를 갖다준들 그렇게 한국 물건을 (북한 장마당에) 직접 풀 수 있습니까?”
정부 대신 기업가들이 임금협상
-노보물자를 얼마나, 뭘로 줄지도 북측과 협의합니까? “북측 (노동자) 대표하고 협의를 합니다.”
-북측 대표는 당국에서 정하는 것이지요? “네, 대표는 당국에서 보내는 것이죠. 당원이죠. 공장 안에 직급도 있어요. 하지만 그 직급과는 상관없어 (당) 성분이 중요합니다. 반장이 못 건드리는 사람도 있고, 대표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은 당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지요. 저는 누가 어떤 당성인지 잘 모르죠. 건들건들하고 일 안 하는 사람에게는 대표도 뭐라 못 하고. 나한테 ‘이해하시라요’ 이런 정도 말하면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산관리나 안전관리처럼 쉬운 일을 하는 것이죠.”
-라면, 초코파이 등의 노보물자도 일종의 현물 임금이니 일상적으로 노사 간의 협의와 결정이 계속 일어나겠습니다.
“그렇지. 매달 실랑이야. 직원이 70~80명일 땐 뭘 더 지급해달라고 하면 그대로 하는 게 부담이 안 되지만 150명이 넘으면…. 한번 지급한 것은 끊을 수가 없잖아요.”
그는 2014년 11월~2015년 5월 개성공단 임금 갈등이 발생했을 때 협상에 나섰다. 2014년 11월2일 북한이 최저임금 인상 상한선 5% 폐지 등 개성공업지구 노동지구 13개 조항을 남측과 협의 없이 개정했다. 양쪽 정부는 6개월간 협상을 시도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이사진이 지난해 5월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과 직접 협상에 참여했다. 지난해 8월18일 양쪽은 5% 인상폭에 전격 합의했다.
“내가 세번 (임금 협상) 회담하면서 느낀 게 뭐냐면, 둘이 만나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어도 결코 최고가 될 수는 없어. 언론이 참 중요한데 언론들은 우리가 요구했던 걸 관철하면 이겼다 하고, 양보 받아냈다 하고 그러잖아. 그럼 안 돼. 우리 언론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저쪽에서는 굴욕적 회담이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때도 종편은 북측이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가) 양보를 했다 그래 갖고는. 종편을 어떻게…. 하.”
-개성공단 기업들이 협상에 나서 보니 어떻던가요?
“임금 인상을 하면 돈 낼 주체는 우리잖아. 정부가 인상폭만큼 줄 것도 아니고 결국은 우리가 부담하는 부분인데. 그 전까진 임금 협상 관련해서 우리가 뭘 하지 않았어. 관이 다 하는 거지.
협상 결과를 양쪽이 똑같은 결과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요. 통일부 직원들한텐 제가 그랬어요. 당신들은 자리 모가지 내놓지만, 저 사람들은 진짜 목숨을 내놓는 것인데. (저 사람들) 목숨을 보호해주면서 회담을 해야지, 죽든 말든 내 자리 모가지만 안전하려고 하면 회담이 되겠냐고. 상대 입장 고려하면서 회담을 해야지, 회담하고 나왔으면 결과가 똑같아야지. 한쪽은 승전가 부르고 그럼 안 되잖아요. 그럼 저쪽은 피해자가 되는 건데 그건 항복 문서지.”
-북측 노동자들과 대화는 어떻게 나눕니까?
“남측 상근 직원도 자유롭게 이야기 못 해요. 일대일 대화도 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쪽 규정상 그렇습니다. 일대일로 대화하려면 피하고 한 사람을 더 불러와서 이야기하는 거죠. 차 한잔을 부탁해도 둘이 들어옵니다. 우리도 조심을 해주지요. 나도 평양 출신이지만 남한만큼 북한은 감정 표현 폭이 크지 않아요. ‘일없습네다’ 이게 두가지예요. 억양에 따라 싫다는 뜻도, 좋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 말투 같은 걸 이해하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가 없지요.”
추가수당으로 준 라면·초코파이 북한 전역 사설시장 흘러가기도 결국 북한산 초코파이로 바꿔 라면은 포장 뜯어야 지급 허용 요즘은 기름과 조미료로 대체
북측 노동자와 말도 잘 못했는데 김정은 이후 경직성 풀리는 듯 돈에 대한 애착은 더 커진 느낌 시장경제가 활성화됐다는 뜻 공단 기업가 종북몰이는 황당
“종편은 뭐 하나 터지면…”
-김정은 체제 이후로도 그런가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체제 이후 경직성이 좀 풀리는 것 같아요. 돈에 대한 애착은 더 커지는 것 같고요. 그것은 시장경제가 예전보다 활성화됐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한국처럼 북한 개성공단에서도 회식합니까?
“가끔 그런 것은 요구를 해요. 단고기라고 하죠? 개고기요. 배급 시스템이 있어서, 일을 많이 했으니 1인당 500그램씩 달라고 한다든지 이렇게 합니다. 자기들이 공장에서 조리해서 먹기도 하고 가져가기도 하고. 일한 대가로 요구하니까 당연 들어주는 것이지요. 점심시간에 보면 근로자들이 배구를 잘해요. 초코파이 내고 배구도 하고 탁구도 치고요.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싸와요. 공장에선 국만 끓입니다. 저희들이 비용만 대고 생선·돼지고기·계란국 등을 알아서 끓여요.”
-서로 호칭은 어떻게 부릅니까?
“북한, 남조선 말고 개성공단에선 북측, 남측 이렇게 부르도록 정해져 있어요. 문서 쓸 때도 남측 당국, 북측 당국으로 하지. 동무는 동격이나 아랫사람, 동지는 윗사람이나 존칭이에요. 북측 사람은 남측 사람을 부를 때 선생이 최고의 존칭이에요. 회장 선생, 부장 선생 이렇게. ‘님’은 오직 수령님한테만 붙이니까. 나는 (노동자) 대표한테 동지라고, 다른 근로자한텐 동무라고 해요. 똑같이 상호간에 선생이라 불러주는 회사도 있고요. 북측 근로자들은 저를 ‘사장 선생’으로 부릅니다.”
-개성공단 폐쇄를 보는 눈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에스엔에스(SNS)에서 개성공단 기업가들을 종북이라고 모는 사람도 많아요. 아, 참 어이가 없죠. 또 어떤 사람은, 북한 노동자에게 임금 팔만원 주고 일 시킨다고도 하고. 저희 입장이 참 어렵습니다. 지금 폐쇄된 상태에서 (야당) 정당을 찾아가는 것도 두렵고, 민변이 도와준다는데 받았다가 오해받을 수도 있고.
어제는 종편에서 개성공단기업협회 비대위원장이 예전에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당원이었다는 걸 보도합디다. 비대위원장 발언은 야당하고 짜고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니냐고도 하고요. 종편은 뭐 하나 터지면 하루 종일 다루니까, 어떤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고 편향적인 입장으로 하니까. 개성공단 폐쇄로 남북 관계에 대한 양비론이 생겨버렸잖아요. 잘했다, 못했다, 여론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는 정부 보상을 바란다. 현행법으로는 정부가 개성공단 피해를 보상할 절차가 없다. 보상 부분에서 그의 대답이 조심스러워졌다.
-정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우리 기업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귀 기울여 주고, 과연 우리 기업들이 잘못해서 생긴 피해인지, 갑작스러운 상황 대처의 미흡함 때문인지 파악하고. 후자라면 보상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정부가 보상해줄까요?
“글쎄요. 제 상식으로는 현재 있는 법 내에서 할 수 없는 걸로 알아요.”
-그럼 안 해 주지 않을까요?
“대통령께서도 (지원을) 말씀하셨고 부처가 나서서 조사를 하고 그러는데 열심히 하니까 기다려봐야죠.”
-다시 만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반갑겠지요. 한번도 아니고 두번째인데. 사태가 장기화되면 노동자들이 (다른 공장에 안 가고) 다시 올지…. 2013년엔 5개월 폐쇄였고 우리 공장 인원이 다 돌아와서 회복이 빨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시간이 오래가면 그 사람들도 다른 생활 터전을 잡아야 하니까요.”
인터뷰는 지난 17일 오후 3시 인천 논현동 공장에서 시작하여 오후 6시30분 서울 신대방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소기업청과 인천시 직원들이 공장에 찾아와 인터뷰가 중간에 끊어졌다. 박 사장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느라 오후 5시께 공장 사무실을 나설 때 이미 기력이 쇠진한 상태였다. 박 사장의 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마음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경직되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운전 중에도 스테인리스 냄비를 납품하는 업체 이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서 이사님. 하고 있어요. 아니 뭐 일은 외주를 줘서 시작을 했고요. 우리 인원들은 다음주부터 몇명 나와서 부품 같은 거라도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있고 그 정도예요. 하던 일이 있으니까 끊진 못하고…. ××이 물량이 많으니까 자기네가 금융을 하고 있다, 그러더라고. 백프로 다 ××에다 하라고 했나 보네. 가공비 올려달라, 소리 하겠지. 전체적으로 지금 ××이나 ××나 하던 것들도 결국은 그 틈새를 뚫고 들어오려니까….” 기자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통화는 10분쯤 이어졌다.
개성공단에 두고 온 공장과 북측 직원들이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힌 그는, 직원 145명의 치약·라면·초코파이·기름·휴지·수건·비누 등 노보물자 지급 물량을 놓고 매번 더 달라는 노동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기업인이다. 한번 노동자에게 준 건 절대 줄일 수가 없는 법이라고 강조한 자본가였고 북한의 2·3차 산업이 좀더 발전하길 바라는, 평양이 고향인 사람이다. 정부 조치에 찬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지원을 바라는 중소기업 사장으로서 비판할 수도 없다. 모순 속에도 진실이, 진심이 있을 것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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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근로자들이 노동보호 물자만 더 달라고 요구하고 월급 올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돈은 북한정권이 챙겨가니 북한 근로자들은 월급에는 관심이 적고 실지 수입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노보물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북한근로자들의 실지 수입은 공급되는 쌀과 노보물자입니다.
남의 영세기업인들과 북의 근로자들이 만나서 생업을 도모한다는 취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개성공단 설립의 당초에 목적은 개성공단을 매개체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고 북한의 값싼 인권비를 이용하여 남의 영세기업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값싼 북의 광물자원을 이용해보자..........이런것들을 매개체로 남북간에 대화를 이어가고 평화도 유지해보자....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성공단이 결코 북한정권의 핵무기개발을 도와주려고 설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개성공단 중단의 결정적 원인은 북의 핵개발과 계속되는 군사도발 입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처지는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피를 수혈해서 늑대를 사육할수도 없습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과 정부가 좋은 해결책을 찾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