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천역사.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2004년 평안북도 룡천역 열차 폭발사건으로 북측을 돕기 위해 수많은 성금과 밀가루 등을 지원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단둥(丹東)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널 때의 일이다. 중국 해관(海關)으로 넘어온 ‘평북 버스’에 올라타니 운전석 유리창은 금이 갔고, 버스 안에는 사람 대신 짐만 가득했다. 가난한 북한의 형편이 한눈에 느껴졌다. 철교를 건너 입국 수속을 하고 해외동포 영접처에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다 신의주 역사까지 너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의주역 광장과 건너편에 위치한 김일성혁명 역사관 등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찍었다. 평안북도 신의주 아래의 피현이나 남신의주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내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어두컴컴한 대합실에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주민들, 나무 장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이들, 하나같이 어두운 잿빛 얼굴이었다.
단둥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는 흥분도 있었지만 오후 2시경 평양으로 떠나는 국제열차를 타기까지 서너 시간 여유가 있었던 덕에 호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평양까지 나를 안내했던 해외동포 영접처 간부가 윗선에 어떻게 보고를 올렸는지 나는 졸지에 카메라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평양에 들어오는 동안에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나를 고려호텔 2층에 있는 사진 현상소로 데려갔다.
나는 신의주 역사에서 찍은 필름 대신, 기차 안에서 찍은 들판의 소나 산야(山野)의 풍경이 담긴 필름을 내어주었다. 그들은 현상을 해보더니 그다지 문제 삼을 것이 없었던지 되돌려주었다. 북한과 이란은 이런 점에서 여행이 편한 곳이 아니다. 마음내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가는 후환(後患)이 두려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억류된 임현수(60) 목사는 북한 방문 시에 단체 사진 이외에는 사진을 전혀 찍지 않았다. 북한 측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세심한 태도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임현수 목사의 대북활동에 대해 일말의 염려를 갖고 있었다.
임현수 목사는 지난 1990년 토론토 큰빛교회에 부임한 이래 1996년 북한의 고아들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국수공장, 라면공장 등 상당히 큰 규모의 대북지원을 해오면서 캐나다는 물론 전 미주 지역에서 앞장서 북한 선교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현재 캐나다 정부는 현지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임 목사와의 접견을 요청 중이나 계속 거절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그의 정확한 상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대북지원단체들의 동태 감시받아
사리원 육아원. 북한이 전시효과를 위해 선전에 동원하는 쌍둥이 형제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층만 올라가면 숨겨진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1월 27일 북한을 방문한 임현수 목사가 북한 측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북한이 청구서를 내밀었구나’ 하는 당혹감이 들었다. 소위 북한을 드나들면서 지원 사업을 하는 사람치고 북한의 ‘꼬투리 잡고 내치는’ 방식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친북(親北)이든 반북(反北)이든 주요 인사에 대한 정보 탐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임 목사와 같이 대북지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필자도 북한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지금은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북한 친구들이 더러 생겼다. 중국에 가면 늘 만나는 북한 간부가 고마운 것은, 나를 만나기 전에 나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열람하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요즈음 나에 대한 보고가 이런저런 것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남한이 아닌 해외에 살고 있어도 북한은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임 목사의 처신이 어렵겠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후원자의 성금(誠金)이 필수적이다.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당연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북한 현실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야 감동도 배가(倍加)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나 각종 기독교 단체에서 하는 연설은 요즈음 같은 세상에는 인터넷에 즉각 올라오기 마련이다.
임 목사가 담당하는 큰빛교회 사무원 박모씨는 “임 목사는 북한 측이 금하고 있는 현지 선교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임 목사는 우리말을 잘하는데다 북한의 정치제도를 잘 알아 법을 어겨 감금됐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면서 “임 목사는 그곳 환경에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러했을까? 필자가 인터넷을 검색하니 평소 그의 교회 설교 내용들이 수도 없이 글과 동영상으로 검색되었다. 북한은 종교 활동이 엄격히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고 한다. 임 목사에 의하면, 북한 관리든 주민이든 모두 그를 “목사님”이라 호칭한다는 것이다. 식사 시간이면 오히려 정부 관리들이 “식사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임 목사는 “17년간 선교하면서 우리가 밥을 먹여주던 서너 살 코흘리개들이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며 “그들은 북한 당국이 자신들을 먹여 살린 게 아니라 캐나다 동포들이 자신들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안다”고 전했다. “이들은 남쪽의 적대세력이 아니라 든든한 우호세력”이라고도 했다.
임 목사의 순진무구함은 도를 넘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임 목사는 그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는 등 북한 관리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라거나 구호물자 도움을 받았던 아이들이 남한의 적대세력이 아닌 우호세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버젓이 떠도는 그의 설교를 보면 선을 넘어선 부분이 등장한다.
“신의주는 이제 종교의 자유지역입니다. 자기의 직업적 특기를 살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헌신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캐나다에 이민 와 제빵업을 하던 한 성도는 지금 북한에 들어가 빵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에 종사했던 한 장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