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동상 철거에 관한 역사조명[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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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맥아더동상철거론에 찬반론이 대두된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되길빌며 이 글을 쓴다 해방후 미국은 전범국 일본이 침략해서 강탈한 엄청난 금괴와 만주731인체실험부대 이시이 부대장에게 인체살상무기정보를 받고 이시이와 일본왕을 전범으로 기소하지않고 독일처럼 갈라야할 전범일본대신 조선을 쏘련에게 분할하자 하였고 원폭투하로 기세등등한 미국의 제의에 전범국 일본을 가르길 원했던 쏘련도 미국의 뜻에 따르고 UN도 미국의 주도하에 운영되어져갔다 그협정의 주도역활에 일본주둔군사령관인 맥아더가 개입 우리나라분단의 책임자중 중책임자였고 전쟁전인 1948년 독도폭파와 수십척어선과 150여명 어민학살도 독도를 차지하 기위한 일본과 짜고 어민들에게 미군비행기가 기관총을 발사한 맥아더명령 관할지역이었다 분단만 없었으면 선진유럽국가처럼 모든사상과 정당이 한민족밑에서 서로이해하며 어울려 잘살텐데 미국의 강제분단덕에 6.25란 비극과 현재까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이 되어 고통을 받고있다 당시 독립애국지사들의 분단반대와 미쏘군 철수여론이 높아지고 남북평화통일의 국민적 염원이 무르익자 이북서 쏘련이 철수하였고 남한서 미군도 철수하였지만 미국앞잡이 이승만정권인 정치권과 정보계통의 지휘권은 미국의 주도하에 있 었다 그러다 이승만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대화록에서 전쟁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 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전쟁을 부추겼었다 그대화후 얼마지나지않아 6.25전쟁이 터졌는데 북한선 남침이라하고 남한선 북 침이라하였지만 정확한 사실은 누구도 확실히 증명할수없다 왜냐하면 전쟁 발발 3일만에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작전을 맥아더가 설계했다는데 이는 분명 준비된 행동이라고도 볼수있고 전쟁발발 얼마안돼 대규모 참전은 미리 계획한 전쟁이란 의구심을 누구라도 품 게된다 강정구 교수는 남북한 어느쪽이건 전쟁을 시작했더라도 6.25를 통일전쟁이라 고하지만 이역시 잘못된것이다 미쏘군이 철수한상황에서 다른민족이 아닌 민족간에 살상을하는 전쟁보다 평화적교류와 협력으로 시일이 걸리더라도 평화통일을 지향해야지 동족의생명을 뺐는전쟁은 어쩌면 더없는 남북간 피해의식과 적대감을 부추기 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설령 전쟁에 어느한쪽이 이겼다해도 동족간 피의 보복과 사상과 이념싸움의 피 해자는 한동안 계속될테니까 그러나 그가 지적한 일부 미국의 불법행위를 보면 미군정 통치처럼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 아닌 통치자로 온것이 명확하기에 그일부를 발췌하여 올 리고자한다 밑의 자료에서 빠진부분이 많지만 일부간추려서 소개하면 민간인이 많이 안사는 지역으로 상륙해도 될것을 민간인이 많이사는곳을 택하 여 한국민생명을 무시하였고 인천상륙작전시 무차별폭격으로 수만명의 인천시민을 죽이고 폭격 끝난뒤 밝은 대낮에 태극기들고 환영나온사람과 구경나온 사람을 민간인일줄 뻔히알면서도 식민지국민처럼 겁줘서 길들이기위해 기관총난사로 수백명 학살한것과 중공군에 밀려 1.4후퇴당시 일본에게 맥아더가 일본군이 정식으로 참전하여 전쟁을 이기면 조선을 일본에게 다시 식민지로 주겠다고 했으나 세계 여론을 의식한 일본이 주저했었다는 기록과 원산과 지리산 등지에서 일본731부대에서 입수한 페스트균등 병균무기살포로 민간인살해등 막대한 전쟁범죄역시 기록이 빠져있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전범국가도 아니면서 미국의 중국과 러시아견제목적으로 미 국을 위한 한국주둔인데도 독일과 일본과 맺은 협정보다못한 식민지같은 불평등 소파협정 과 미국의 전시군사작전권 또 기지사용료도 못받고 매년 8조원상당의 우리세금을 미군에게 뺐기고있다 참고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친미독재자 마르코스가 미국의 보호를 받 으며 장기집권할때 한국처럼 기지사용료를 못받았지만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한뒤 로 미국에게 기지사용료를 받아냈다 [펌글] 식민지총독과 같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를 많은 남쪽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짝 사랑하고 있다. 점령 당시 만약 맥아더가 조선 사람들을 사랑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배려했더라면 점령군사령관 으로서 아마 다음과 같은 포고문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 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교란케 하는 행위를 감행하 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제5조 군정기간에(during the military control은 ‘군사점령기간’이 정확한 번역임)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부동할 때는 영어 원 문을 기본으로 한다. 완전히 식민지총독 부임과 같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점령군의 면모를 한껏 발 휘했다. 이런 맥아더와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 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 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 들에게 달려 있다. ... 조선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 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 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 된 조선인민 만세!(노중선 편, 『민족과 통일 1』108, 105). 첫 포고문에서 드러난 이러한 차이가 이후 점령정책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미국 군사정부를 통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 했고 이 결과 바 로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직접적인 점령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소련은 자기 들이 직접통치행위를 책임지는 군사정부가 아니라 조선인자치정부 성격인 북조 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점령정책을 펴나갔다. 미군이 직접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남쪽은 점령 3년 동안 1946년의 대구 10월 항쟁,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과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등 수많은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이었다. 이 결과 1950년 6·25전쟁 직전 까지 무려 10만 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곧 이미 한국전쟁의 시발인 작은전쟁 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간접적인 점령정책과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를 시행한 북쪽에서는 이 런 진통과 혼란이 없이 안정을 누렸으며 친일청산과 대대적인 사회경제개혁이 이뤄져 친일파가 더욱 기성을 부린 남쪽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이래도 미국과 맥아더가 조선사람을 위하고 사랑하고 어쩌고 할 수 있을지 의 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맥아더동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 다. 분단세력과 동북아파시스트 후견인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 다. 38선의 지리적 분단에서부터 신탁파동의 이념적 분단, 5·10단정단선의 정 치적 분단 등을 주조하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는 국내세력의 동원이나 협력 이 없이 이뤄지기는 힘들다. 바로 이 분단비호 국내세력은 일본식민지의 군, 경찰, 관리 짓을 한 김창룡, 노덕술, 최규하 등의 친일민족반역관료세력과 미군정의 여당이라고 일컬어지 는 김성수, 조병옥, 송진우, 장덕수 등이 주도한 한국민주당과 같은 친일정치 세력 두 부류였다. 바로 이 두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이승만이었다. 이 이승만을 권좌에 올리는 데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 맥아더였 다. 그는 미 국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상해임정의 김구나 다른 민 족인사들보다 먼저 군용기편으로 한국에 데려와 이승만 영웅 만들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더 나아가 대만의 장개석과 연대해 맥아더-장개석-이승만 동북아파시스트 연결 망을 형성해 중국본토 탈환을 노리고 소련에 대한 봉쇄나 격파의 첨병을 자원 하고 자행했다. 이런 기조가 6·25전쟁에서 이 전선을 중국과 소련까지 확장시 켜 3차 대전까지 몰고 가려는 과대망상을 하는 전쟁광의 형태로 나타났다. 세계사적으로는 탈냉전의 평화와 인권시대, 민족사적으로는 통일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말할 나위없고 인류 전체에 대재앙을 가져올 3차 세 계대전을 꾀하는 이런 전쟁광과 ‘인류의 적’을 기리는 동상이 유지되는 것 은 인류에 대한 모독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원자탄 26개로 한반도 종말을 기도한 사람이 생명 은인으로 둔갑되는 난장판 흔히들 미국과 맥아더를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라 한다. 그래서 이 고마운 은인인 미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론이 판 을 치고 미국을 비판만 해도 ‘배은망덕’ 한다고 질타한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인천지구 황해도민회 류청영 회장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맥아더를 '구세주'라고 하면서 "만일 맥아더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이 CNN 방송에라도 나가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민족으로 취급 받는다"고 까지 했 다 한다. 이러한 은인론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과 주한미군의 온갖 만행과 제국주의성을 성토하다가도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고 비판적 예봉이 꺾이고 만다. 그야말로 이 은인론과 보은론은 저격수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 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만병통치 같은 대미 생명은인론과 보은론에 덜미가 잡히고 주눅이 들어야 하나? 또 정말 이들이 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생명 의 은인이기 보다 생명을 앗아간 박탈자가 아닌가? 언제까지 이런 대미 자발 적 노예주의의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이제는 냉엄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이 다. 여기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분명한 것은 전쟁전후에 전사한 약 2백만 명, 학살당한 약 1백여만 명, 중국군 약 90만 명, 미군 등 5만~6만 명, 곧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에게는,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 수일 것이다. 왜냐면 만약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 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 만 명 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 99만 명이 더 많 이 죽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남북은 거의 전체 인구 10%인 300만이 죽음을 당 했고, 중국은 90만, 미국 등은 5만~6만이 죽음을 당했다. 이런데도 미국을 생 명의 은인으로 규정짓는 것은 허구일 뿐 아니라 죽은 자 대부분을 두 번 죽이 는 것과 진배없다. 실재 전쟁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낸 주된 장본인 은 커밍스가 잘 지적한 대로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었고 이승만 정부의 체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를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그는 1·4 후퇴 당시인 1950년 11~12월 전선이 37도선으로 후퇴하자 중국과 북한에 26개 의 원자탄을 투하해 코발트 사선을 형성하고는 중국과 전면전으로 전쟁을 확장 하려했다. 실재 미국은 허드슨 작전이란 모의 원자탄 실험을 북한 상공에서 실 시해 이런 맥아더의 구상이 실현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원자탄 투하설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 남기 위해 남쪽으로 넘어 왔다. 다행히 영국 등 세계 여론이 들끓어 위기는 모 면했지만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시점까지도 미국은 원자탄 투하 위협을 지속해 왔었다. 만약 맥아더의 작전대로 원자탄이 투하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자. 이 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개입과 3차 대전으로 직결됐을 것이다. 아예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반도 와 민족의 역사종말일 것이다. 설사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하더라도 한반도의 결과는 뻔하다. 남북이 통틀 어 불모지대가 되고 남이든 북이든 나라라는 명맥을 잇기도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남북인구 3천만 중에 몇 백만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아마 구세주니 배 은망덕이니 주장하는 나이든 사람들은 아예 지금까지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데도 생명은인이라고 동상을 세우고, 또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지야 옥 지야 껴안고 있어야겠다고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까지 벌리는 판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민간인 학살 책임자가 생명은인이라니 6 ·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의 미군 민간인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 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 던 진주 출신의 어느 ㄱ 국립대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 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비행기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 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 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 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 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 의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1999년 10월 27일 필자와의 면 담). 이러한 전쟁 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특수한 조 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미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공산당을 혐오와 불 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스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 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 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 다(뉴욕타임스, 1951년 2월 21일자; I. F. Stone, '비사 한국전쟁', 신학 문사, 1988, 276쪽에서 다시 옮김).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 황 간면 노근리의 민간인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 관계자이고 피해당 사자인 정은용의 진술은 전쟁 중 미군의 남한 내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범죄성 등을 잘 말해 준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 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 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 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 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 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 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오연호, 1994:44; 정은용, 1994). 이러한 정은용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이를 확인했다. ◇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 문):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 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 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 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남한 양민들은 한 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이렇게 미군의 민간인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2000년 말 현재 약 60 여 곳)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과 증언이 쇄도하였다. 경북고령군 고령교 피난민 다수사상,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약 300명 사 망, 경북 울릉군 독도 1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보문면 신성리 약 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판교면 판교리 10명 사망, 충북 영동군 황간면 121명 사망, 전북 익산군 익산면 이리역 54명 사망, 경북 구미 형곡동 100명 사망, 경북 의성군 금성면 17명, 경북 칠곡군 외관읍 외관교 폭파 피난민 다수 사상, 경북 포항 시 60명, 경남 함안군 군북면 30명 사망,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30명, 경 남 사천시 곤명면 50명 사망, 경남 마산시 진전면 83명 사망, 경남 창녕군 창 녕읍 초막춘 80명 사망 등이다. 이러한 민간인 무차별 기총사격은 미국 이 2000년 6월 5일 보도한 미 육군조사 단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미 공군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터너 로저 스 공군 대령이 남긴 이 기록은 “육군은 아군 진지로 접근해오는 모든 민간인 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부응 해왔다"고 적고 있다한다. 육군은 "북한군들로 이뤄졌거나 혹은 북한군이 통제 하는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며 민간인 사격을 합리화 하고 있다고 는 전했다(한겨레신문, 2000.6.7). 미국의 민간인학살은 적과의 전투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거나, 결코 우연 적이고 개인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노근리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사단장의 작전명령과 같은 공식적 지휘계통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 지휘계통의 최고책임자는 구세 주라고 일컬어지는 맥아더였다. 이 학살에 대한 정보보고를 수없이 받았을 텐 데 그는 이에 대한 강력한 근절 또는 시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적과 아를 구분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했다고 미국과 맥아더 편 을 든다. 그러나 당시 참전했던 중국 인민해방군들에게도 조선사람 가운데 누 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강간, 학 살만행 등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변명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맥아더의 책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7월 초에 그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 휘권을 공식적으로 이양 받았다. 한반도 내 일어나는 모든 군사행위는 그의 권 위 하에 이뤄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일들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군은 한국군의 대대 급까지 미 군사고문관을 파견하 고 작전권을 행사해 왔었다. 그의 지휘체계 하에 일어난 첫 번째 한국정부의 민간인 대량학살은 7월 중순 평택이하부터 자행된 20만 안팎의 보도연명원 학살이었고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의 학살이었다. 여러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미군의 목격 하에 이뤄졌 다. 이 같은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첫 단추에도 불구하고 최고책임자인 맥아더는 이 학살만행을 묵인 내지 외면했다. 이 결과 형무소 수감자 수만 명 의 추가 학살이 전개되고 이후 줄줄이 이어져 약 1백만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 부 하에 학살당했다. 물론 그의 임기 중에 발생한 이승만 정부의 민간학살에 대한 궁극적 책임도 그 의 몫이다. 원자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는 생명의 은인이 아 니라 엄연히 학살만행의 궁극적 책임자로서 전쟁범죄자다. 범죄자의 동상을 만 들고 이를 기리는 현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또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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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옳은 정책이라 생각했다.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우린 아직 냉전이다.어떤이들은 말하다 궁지에 몰리거나 할말이 없으면 그럼 전쟁을 하자소리냐고 반문한다.근데 그 자체가 좌익들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스스로 실토하는것 아닌가.댓구할 가치도 없어서 말 안했지만.아무튼 당신의 말은 중립과 거리가 멀고 용서나 포용은 절대적으로 아니고 우리식대로 살자는 부류에 가깝지요.그리고 정부는 어느단체도 정부를 따르는 단체가 없다는걸 모르거나 암묵적 허용을 하고 있다는것이 눈에 보여.무식한 내가봐도 그런데 어디가서 이런글 올리지 마요.엄밀히 말해서 정부정책에 위배됨을 잊지마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