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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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머물고 싶은 오랜만의 평화로움이었다. 2010년 03월 15일 (월) 21:58:30 뉴스코리아 qor829@naver.com 며칠을 굶주렸던 우리 가족은 중국인 아저씨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순간 비워버렸다. 쌀밥이 한 술 한 술 입에 들어올 때 마다 쌀이 참 달다고 느꼈다. 한 바가지 삶아주신 계란도 금방 없어졌다. 껍데기 채 먹는 볶음 콩 반찬도 국물도 안남기고 다 먹었던 것 같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아저씨는 밥을 더 해주시려고 까지 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느꼈다. 방에 중국말 라디오 프로그램이 엄청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배가 부르자 서로의 얼굴을 웃으면서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에 아저씨는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 오셨다. 세상에! 아저씨가 들고 들어오신 엄청 큰 바가지에는 토마토라고 보기에는 정말 큰 괴물 토마토들이 한 가득 담겨져 있었다. 사실 먹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신기했다. 세상에 그렇게 큰 토마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저씨가 씻어주시는 토마토 한바가지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아저씨는 우리가 먹는 동안 내내 흐뭇하게 바라봐주셨다. 머리카락도 많이 없고 주름도 많았던 아저씨는 마치도 우리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금 새 친근감이 생기고 의지하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아저씨는 1년 전 엄마가 먼저 중국에 와 계셨을 당시에 알았던 양치기 아저씨였다. 부자도 아닌 양치기 아저씨는 “내게 많은 것을 가지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길을 헤매는 이에게는 한번 밝게 웃어 주는 것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게 해주셨다. 그 이후부터 오늘까지도 나는 길을 잃은 이에게 밥을 차려줬다거나, 웃어 준적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누군가를 위해 이유 없이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고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인연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하게 웃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지내오게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밤이 되니 산골짜기는 정말로 한적했다. 오랜만에 우리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발편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곳도 불법체류자인 우리 가족에게는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만큼은 정신 줄을 놓고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날이 훤히 밝은 아침이었다. 우리는 아저씨 허락으로 엄마가 차려주신 푸짐한 아침밥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가 북한에서 집을 떠난 이후로 1년만의 밥상이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이 그렇게 감사한지 처음 알았다. 왜 그렇게 감격하고 목구멍이 메어오는지. 그렇게 감사하고 맛있는 밥상은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침을 먹은 후 출발 한다는 소리를 듣고 배가 부른데도 자꾸만 먹었다. 길을 떠나면 언제 다시 집에 앉아 밥을 먹게 될까, 또 배고픈 고생을 하면 어떡할까 걱정해서였다. 그리고 아저씨가 싸주시는 엄청 많은 양의 밥이랑, 마늘장아찌를 챙겼다. 아저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꾸만 뭐라고 얘기하셨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아저씨가 앞으로 갈 길이 멀고 험한데 다들 조심히 잘 살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룻밤 신세를 졌지만, 오늘날까지 잊지 못한 친절한 인상만 가지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머물고 싶은 오랜만의 평화로움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하남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작은 시골동네였다.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구나 싶어서 시작부터 지치기도 했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고 걷는 것보다 도착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걸음을 재촉했다. 국경을 막 넘었을 때와는 달리 자신감이 생겼다 해가 중천에 머물었다가 서쪽으로 다 기울 때까지 걸었지만 도착하지 못했었다. 뉴스코리아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코리아(http://www.newskorea.info)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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