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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 업적, 민주 평화말고 더 없나
Korea, Republic o 사실을기록 0 400 2010-03-22 17:37:04
김 전 대통령 업적, 민주 평화말고 더 없나
1. 김 전 대통령 업적으로 꼽히는 것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이 업적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반독재 민주화와 평화, 통일, IMF 외환 위기 극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쪽 면만 본 것입니다. 굳이 성향으로 나누자면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 그리고 심지어 보수 성향 인사들은 이런 얘기만 해도 됩니다만,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여기에 갇히면 안 됩니다.

김 전 대통령 업적을 이렇게만 꼽을 경우 우리는 이런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독재 민주화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에 머물러 멈추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평화와 통일은, 겨레 모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대한민국 우리 사회 가난한 사람들 또는 사회 약자들과 이해관계가 바로 눈에 보일 정도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도권 또한 지배집단에게 있습니다.


2. 사회 복지 분야에서 나온 빼어난 업적

제가 보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업적은 사회 복지 분야에 있습니다. 그이는 사회 복지의 기본 개념을 돌이킬 수 없도록 바꿔 바로잡았습니다. 이런 업적은 이른바 사회 밑바닥을 이루는 민중들한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별로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1998년 이룩한 의료보험 통합도 커다란 성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2000년 실행된 건강보험 체계는 직장·지역·공무원·교직원으로 나뉘어 있던 의료보험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질병에 걸릴 개연성은 더높은 반면 소득 수준은 낮은 농어민이나 작은 공장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밤 사랑하는 후배랑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확인한 바이지만,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어느 누구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 복지 정책의 커다란 전환, 나아가 전복(顚覆)이었습니다.

3. 사회복지를 국가 의무로 삼은 김 전 대통령

대한민국 헌법은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전에 있던 법률은 생활보호법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국민에게 필요한 기초 생활을 국민이 보장한다는 정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생활보호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활은 개개인의 책임으로 두고, 적응하지 못하고 처지는 사람에게 국가가 시혜(施惠)를 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나오는 국민은 법령에 따라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생활보호법에 나오는 국민은 그런 기초 생활을 누릴 권리가 없고 가난해지거나 장애인처럼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이등 국민'으로 국가의 "보호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쓰는 "수급권자(受給權者)"는 '급여를 받을 가 있는 사람'이지만 생활보호법에서 쓰이는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는 그런 권리는 없이 '국가나 자치단체의 보호를 받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권리로서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서 베풂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전-그러니까 생활보호법 시행 시기에 사회 복지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가 아니었고 국민의 국가에 대한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일부 덜 떨어진 이등 국민에 대해 은혜로이 베푸는 국가의 혜택이었을 뿐입니다.

'사회복지가 국민에게 권리가 되고 국가에게는 의무가 되는', 그러니까 헌법 제10조를 현실에서 구현한 것이 바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생활보호법은 그러니까, 일부 국민을 열등한 존재로 차별하는 도구였습니다.

4. 자기 정책이 아니었어도 받았다

한겨레>는 8월 24일치 14면에서 당시 상황을 일러주고 있습니다.(참 고마운 일이지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45개 단체들이 1998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추진 연대회의'를 끊임없이 도입을 요구해온 제도다. 그러나 당시 정부 부처들은 모두 제정을 반대했다."


반독재 민주화. 경남도민일보 사진.
"복지부조차 '절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99년 지방 순회 도중 울산에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방침을 밝힌 이른바 '울산 발언'은 이 제도 도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순전히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과 국가의 지위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보도가 이를 말해 줍니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법 도입으로, 97년 이전 37만명이던 생계비 지급 대상자는 2001년 155만명으로 4배 이상으로 확대됐고 지급액도 월평균 13만8000원에서 20만4000원으로 늘었다." 한 번 권리를 누려본 사람은 손쉽게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를 옛날로 물리지는 못합니다.

5. 왜 이런 얘기를 하는 이는 눈에 띄지 않을까

저는 김 전 대통령이 사회복지 부문에서 이룩한 공로를 높이 치고 적극 알려나가는 일이 우리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도움을 준다고 봅니다. 그런데 평소 복지를 중요한 가치로 꼽아온 진보 진영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 까닭은 제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 경남본부가 18일 낸 애도 성명에도 이런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에 맞선 반독재민주화 투쟁과 대통령 당선 뒤 평화적 남북관계 진전을 이룬 공로"와 "서거 직전 현 정권에 보냈던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일갈"만 꼽았습니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대동소이(大同小異) 또는 오십보백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지배집단은 복지 확대를 꺼립니다. 그들이 대변하는 대한민국 0.1% 부자들에게 해로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 전 대통령 주요 업적으로 '사회복지의 가치 정립'을 꼽을 리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절차상 민주주의도 버거운데 무슨 복지야, 이럽니다.

민주당은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에서 멈춥니다. 자기네 명분을 살리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이들도 사회복지를 김 전 대통령 업적으로 꼽을 수는 있겠지만 더욱 발전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담이 아닙니다. 그이들 태생이 사회 약자 가난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하나 입에 올리는 데도 세력과 집단 또는 개인의 처지와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나 봅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같은 진보 진영의 무심함이 안타깝게 돋보이는 국면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문화,IT,사회복지,인권등등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 변화를 가져 오셨죠


http://v.daum.net/link/4014678?RIGHT_BEST1=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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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을기록 2010-03-22 17:46:15
    참고삼아 하나더 첨부했네요

    경상도 40대 남자의 김대중에 대한 기억

    http://2kim.idomin.com/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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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유상종 2010-03-23 10:32:31
    참 끼리끼리들 잘 놀아요..잘한거는 잘한거고 못한거는 못한다고 해야하는데 특별히 잘한것이 보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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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대중 2010-03-22 19:15:14
    또라이 장난하니? 기초생활 생활보호자 제도는1948년도 부터 정착된 제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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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대중 2010-03-22 19:15:52
    518폭동주범이 평화정착지랄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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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자그룹 2010-03-22 21:10:43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이 될것이다.

    -김대중은 돈 쓰는데에는 일조했다, 라고.

    -돈 벌어들이는데에는 한 일이 없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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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마나 2010-03-23 07:18:31
    김대중은 북한주민들의 자유를 돈으로 제압했어요.
    그들의 자유를 돈과 바꾼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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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샌드맨 2010-03-23 10:34:50
    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재임시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사용하셨죠. 선생님 말씀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께선 당시 거의 공황상태였던 우리 경제상황에서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기초를 닦으려 애썼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 점은 마땅히 큰 공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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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업적 2010-03-23 11:46:31
    김정일과의 내통

    1.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 내용

    1)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되어있다.

    2)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셧다. 이런 말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3)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사회주의, 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4)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햇볕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 (1999년 2월)

    5)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버리고 악락한 친미, 친일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년 11월)

    2.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을 기획, 김정일에게 접선 요청 암시. 2000년 6월 13일 및 6월 15일 90분간의 차속에서의 2인 밀담,

    3. 국민과 국회의 동의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 국가보안법 위반

    4.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발언,

    5. 북한의 사상 최대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은폐
    "2000년의 전력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의 훈련이었다." 라는 연합사령관의 보고내용 은폐.
    한국군의 군사 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 2001년에 대대적으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 금지

    6. 2001년 2월, 미국방문전,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노베상을 수상, 2년후인 1975년 월남은 월맹에 멸망. 800~1200만이 학살.

    7. 2002년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 삭감.



    반공전선 와해

    1. 북한은 주적이 아니며 전쟁은 없다. 의심할 필요 없다.

    2.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은 철폐 주장, 좌익으로 판명된 인물들에게 면죄부

    3.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

    4.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과 술자리를 갖게 하고 그 언론사의 사장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펼치게 함

    5. 국정원으로 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 선전

    6.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들에게 전쟁은 없다 교육,
    "110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 붙들고 잇을 뿐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
    모두 왜곡된 교육

    7. 초등학교에 김정일 사진, 사상교육의 기반 흔들

    8. 2000년 12월까지 지뢰 제거 명령

    9. 타당한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환상을 심어주면서 남침용 길만 열어 주었음.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있음.

    10. 2001년 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했고, NLL도 개방하여 일부를 북한에게 건네줄 것 시사

    11. 현장 지휘관에게 부여된 "UN사 자동교전규칙" 박탈



    친북정책으로 넘어간 군자금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억 7천만 달러를 안받을 테니, 북한에게 받을 돈 50억 달라를 받지 말라고 러시아에 제안

    2. 북에 국민 알게 준 돈 5조.

    3. 북에 국민 모르게 준돈, 미국이 일부 폭로

    2000년도 한해에 4억달러 김정일에게 비밀리에 송금

    미의회 조사국(CRS) 2002년 2월 25일 의회에 제출한 한,미 관계보고서"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 4억달러 북한 전달, 관광대금으로 4억달러 전달. 총 8억달러. 그 중 4억달러는 무기구입에 사용

    CIA에서 한국정부에 이 내용을 경고했으나 한국정부 무시.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 강력 요구(2002년 3월 27일)

    3.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 강요(6000억원 가량),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들에게 세무조사 면제

    4. 북한에 50만KW 전기 공급 추진, 미국에 의해 제지

    6. 금강산 사업등으로 북한에 보낸 돈

    1) 2000년 9월 28일 : 식량지원 60만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 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 1조 864억원

    4) 1999년 한해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 업체 당 평균 745억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 지방세의 20배 규모

    5) 1999년 10월 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 북송(445만달러:58억원)

    6) 1999년 8월 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1999년 11월 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

    8)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이 190만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년 2월 8,863평 평양실내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년 3월 7일 삼성전자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달러 투자(52억원)

    12) 2000년 3월 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달러 부담(10억)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년 3월 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개, 새마을 운동에서 곡물 1,660만톤 제공

    15) 2000년 4월 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제공

    총계. 2조 3,892억원

    16) 2002년 4월 23일 한국일보, 비무장지대 내 경의선 공사 2002년 5월 공사 시작 10월 이전에 연결 완료,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
    군사분계선-개성 12KM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 북측에 지원

    17) 2002년 4월 22일 한겨레, 문화일보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구간(127KM) 2009년 완공예정

    18) 한겨례 4월 12일, 비료 20만톤 추가 지원

    19) 금강산 관광
    - 1인, 하루 입산비 100달러, 3일 코스 200달러
    - 관광객이 있으나 없으나 연간 50만명이 간 것으로 계산하여 비용전달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금강산에 간 관광객은 47만명이나 모두 150만명이 간 것으로 계산하여 4억 5천만 달러 지급
    - 독점사업권 명분으로 9억 4,200만 달러 지급



    반공 역사 말살

    1. 2000년 10월 1일,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

    2. 2001년 8월 23일, 베트남에게 한국군 파병 사과.

    3. 여순반란사건, 4.3사건 인물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평가

    4. 16년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 주상을 입한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 투사로..

    5. 16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 민주화 투사로.

    6. 좌익 데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 최고 2억원씩 보상. 국가의 부름으로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에겐 약값조차 지불하지 않고 있음

    7. 한총련의 명예회복 시도

    8. 63명의 간첩을 영웅 취급하여 북송,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에 대해선 침묵

    9. 좌경 데모는 보호, 보수 데모는 차단

    10.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은 활동을 은밀히 차단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게 합의

    2. 언론에 "햇볕정책"에 악형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합의

    3.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죽이기
    국세청 인력 800명의 반인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 서울방송에 51명,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
    공정거래위원회도 가담.



    거짓말

    거짓말도 좋다. 백번을 반복해라. 그러면 참말이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말)

    1.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한 국회의원 선거 유세
    "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

    2. 1997년 10월 8일 관훈 클럽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저희는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라 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3. 2002년 6월 21일 일간지 일동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4. 2002년 7월 11일 조선, 중앙
    "국민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차남 김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 수재, 조세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력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대한 발표.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 현대에서 16억. 삼성에서 5억. 이 2업체로부터 매달 5000만원씩 상납. 임동원에게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에게도 1,100만원씩 상납.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부정한 돈은 한푼도 받지 않아다." 라고 거짓말

    2002년 6월 11일 오전, 국무회의 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한 말
    " 어른이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되는 건가요?"

    5. 1997년 10월 8일 관훈클럽
    "이 김대중이는 평생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약속을 했다가 못지킨 것과 거짓말은 다른겁니다."

    6. 중앙일보 2000년 12월 11일
    "이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11억 2,22만원)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

    7. 2001년 12월 10일 조선일보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8. 2002년 5월 20일 중앙일보, 세게일보, 신동아 6월호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기념관을 지을 것이다."

    10. 1997년 10월 8일 관훈클럽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 2000년 2월 9일 도쿄방송
    "김정일은 식견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
    - 2000년 2월 28일 독일 슈피겔지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11. 1997년 10월 8일 관훈클럽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악을 개정시키겠습니다."


    1980년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1980년 5월 17일 체포, 수사과정에서 20일과 25일 사이에 두차례의 자술서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화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 9월경 결성돈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햇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가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좌익 백남은)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으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형편이엇으므로, 좌익분자와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엇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 있다가 2일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으냐?"
    "이새끼가 아직 반성 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대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엇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 사 없이 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에 갔다거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했음.

    9. 그 후 미, 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의 접촉, 한민통을 결성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가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8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 지부를 두고자 모색했으나,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화, 캐나다 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 사형

    민주당이 "국민회의" 이었던 시절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여 사살한 문세광과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원

    1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

    조총련, 한민통에 매월 1,000만엔 내지 2,000만엔씩 자금 공급, 한민통은 좌익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 "민족시보"는 공산당 선전지

    김대중에서 적용된 법조문
    형법 제37조, 제 38조 제90조 제 1항, 제2항, 제 87조
    계엄법 제 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 1조 제 1항
    국가보아넙 제 1조 제 1호
    반공법 제 5조 제 1항
    외국환 관리법 제 35조, 제 17조 제1항



    좌익행위

    1. 8.15 해방이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으로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할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

    2. 6.25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행위를 관리

    3.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회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로 전남도경에 검거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년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내란음모죄 :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 결성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국가보안법 제 1조, 제 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 하면서 10.26사태로 인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 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 인사들에게 활봉비를 뿌리면서 반정부 조직 강화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 고조,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녹음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 유발(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 1조 제 1호 :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 사형 확정. 전두환이 무기징역으로 감형, 3월 3일 징역 20년형으로 감형



    1988년 국회 청문회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 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 발언)

    2.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으 혐의로 구속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 나열, "민주청년동맹 목포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북에서 받은 돈

    1,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사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 수백만원씩 돈을 주고 받았다는 수사기록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 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 "김대중이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에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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