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급사´ 직전 아들 김정일과 부자갈등 심각 ´친정체제 복귀´ 김일성 ´조기 후계자 선정´ 두고 후회…묘향산서 김정일에 총 겨눠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범으로 기록된다. 아담과 이브의 맏아들로 태어난 카인은 여호와가 동생 아벨만을 총애하자 질투심에서 아벨을 죽인다. 훗날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보드왱은 인류 최초의 이 살인사건에서 형제자매 간 적대감 등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카인콤플렉스’를 창조해냈다.
‘근친증오’로 번역되는 카인콤플렉스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권 찬탈을 위한 형제 간, 숙질 간, 지어는 부자 간 피로써 피를 부르는 권력암투로 반복돼 왔다. 권력은 그토록 비정하고 몰인정하다. 권력 앞에선 인륜도 천륜도 저버린다.
올해로 김일성이 사망한 지 17년째다. 94년 7월 8일 새벽 2시. 반세기도 훨씬 넘게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급사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고종명(考終命)도 아니고 급사하게 되면 여러 의혹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김일성의 사망을 두고도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정일이 세워졌다. 북한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김일성의 사인은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자연사였다. 그러나 사망 원인과 사망 전후 김정일이 취한 일련의 미심쩍은 행동들을 보면 그것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간접 살해였다.
당시 김일성에겐 두 가지 큰 과제가 주어졌다. 하나는 7월 25일로 예정된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미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왔던 북핵문제였다. 이 문제는 그해 6월 16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대좌함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김일성은 남은 과제인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장을 직접 챙기겠다며 ‘7월 경제관계 일꾼회의’를 묘향산별장에서 가졌다. 그 과정에서 생긴 충격적인 사건들로 김일성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급사한 것으로 돼있다.
김일성의 급사를 두고 항간의 의견은 ‘자연사’와 ‘음모에 의한 간접 살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연사 쪽 의견은 “자식이 아비를 죽일 순 없다”며 김정일의 연루를 부인했다. 천륜과 인륜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간접 살해 쪽 의견은 ”김정일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김정일을 연관시켰다. 그의 패악질과 권력의 속성이 이유로 내세워졌다.
김정일은 권력과 혈육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라며 잔인무도한 포악성이 지적됐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으로 조선시대의 수많은 임금 독살설이 예시됐다. 조선조시대에는 임금 4명 중 1명이 독살설에 휘말렸는데 500여 년 기나긴 왕조 통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왕들의 죽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반대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때 왕들이 급서했다고 지적됐다.
김일성 급사를 조선조 왕들의 독살 음모에 대입시키면 그럴 듯한 답이 나온다. 우선 김일성은 1인 장기 집권으로 천명을 다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던 김일성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싹튼 부자 갈등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극대화되면서 그의 급사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죽임을 당한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때만 되면 음모에 의한 살해로 논쟁의 불길이 댕겨진다.
◇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주석 탄생일을 맞아 평양시민들이 만수대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2011.4.16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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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김일성 사망은 자연사가 아니고 음모에 의한 살해임을 증명할 상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부자 갈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김정일 실정(失政)에 따른 김일성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은 일찍부터 김정일의 국정운영 실패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해왔다. 그러다가 93년 후반 들어 김정일의 통치능력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친정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를 신속히 취하면서 깊어진 부자 갈등은 차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하면서 “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김정일에 대한 불신과 부자 갈등의 속내를 드러냈다. 이전에도 김일성은 혁명원로들과의 면담자리에서 후계자 조기 선정을 자책하곤 했다. 어떤 때는 “평일(김정일 이복동생)이가 큰일 할 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마다 김정일이 심한 카인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김정일은 그 동안 김일성의 질책이 두려워 궁핍해진 인민생활에 대해 허위보고를 해왔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김일성은 94년 7월 6일 묘향산에서 경제일꾼들과 협의회를 진행하던 중 3개월 전부터 주민들이 배급을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정일을 세차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 때도 김정일은 카인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다.
김일성이 통일문제를 서두른 이유도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됨에 따라 빈껍데기로 남은 주석직과 총비서직의 권위를 통일 분위기 조성으로 되찾으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챈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면서 부자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는 끝내 김일성의 급사를 불러왔다.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부자 갈등은 묘향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김일성은 별장에서 김정일에게 “회담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시큰둥하자 격노했다고 한다. 이때 1호 호위총국(김일성 경호 담당) 경호원이 김정일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었고 김정일 경호원들도 이에 응사하고 나왔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이 1차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것이 사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김정일의 김일성 간접 살해 상황증거가 잡힌다.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음모는 그가 묘향산별장으로 향하기 전 경호계획 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통상 김일성이 한 번 떴다 하면 8명의 의사가 따라붙는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묘향산으로 떠나던 그날 동행 의사는 단 2명뿐이었고, 심장담당 주치의는 아예 제외됐다. 김일성 동선에 따른 단계별 호위계획을 직접 점검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심장전문 주치의를 묘향산행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김일성은 산수(傘壽)와 망구(望九)를 넘긴 82세의 노인이었다. 거기에다 평소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담당 주치의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심장전문 주치의가 제외된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의심스러운 것은 김일성이 한번 떴다 하면 혈압과 맥박, 체온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어 일명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부르던 독일산 최첨단 의료장비들마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가, 왜 그랬을까?
김일성 사망 직후 정황에서도 음모의 그림자가 보인다. 김일성 사망 뒤처리를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그래서 필연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 많다. 우선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쓰러진 순간 김정일에게 SOS가 보내졌으나 한 시간이 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응급 의료장비를 실은 헬기가 떴으나 호우로 착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번엔 의료진이 자동차로 내달렸으나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도 김정일이 판 함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지연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일성 사망 시각은 94년 7월 8일 오전 2시였다. 그러나 공식 발표 시각은 7월 9일 낮 12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망 사실이 늦게 발표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후계자 선출 시간 벌기이고, 다른 하나는 적의 공격 대비이다. 그러나 북한은 74년에 이미 후계자 선출이 끝났고 김일성 사망 당시 휴전선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시각이 무려 32시간이나 지연됐다. 반발하는 군부 설득이 그 이유였다. 군부의 반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일성 사망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연루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그 같은 혐의를 벗으려면 일련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것 하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김일성 간접 살해 증거로 꼽힌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94년 6월 1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 그리고 김일성으로부터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아 그 물꼬를 텄다. 그러나 김일성의 급사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지난 4월 28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김정일로부터 남북정상회담 주선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이 또한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토인비의 말이 실감난다.
토인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 갈등에 의한 권력암투로 죽임을 당한 김일성처럼 김정일의 앞날도 순탄치만 않을 것 같다. 우선 김정은 3대 세습 안착 여부가 아직은 미지수다. 후계구도를 놓고 어떤 권력암투가 벌어질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천명을 다하고 죽는 예가 드물고, 권력 후계 경쟁자는 목숨 부지하기가 어렵다. 포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정일이 비참한 최후를 모면하고 그 후계자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김정일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세습이 아니라 제도에 넘기는 정치개혁을 단행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김정일이 자신과 일가족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원문링크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5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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