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 있던 동서독간의 비밀사업
글쓴이 :
유럽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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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
세워진지 50년(1961 ? 1989)을 맞아 양 진영간에 벌어진 해프닝 가운데 인신매매는 아직도 흥미로운 사건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간 이 내용이 단편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진 ‘007’ 작전이어서 제한이 있었다. 이번에
포츠담 대학에서 새로이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이 사건은 1963년부터 1989년 공산권 멸망 직전까지 서독정부가 동독 감옥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politische
Haeftlinge) 3만 3000 명을 자유의 몸으로 석방시켜준 사건이다. 서독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Freikauf (자유구매)라고 말한다. 동독정부가 받은 대가는 30억 마르크 이상의 거액이다. 서독은 이와는 별도로 이산가족이
합치도록 도와준 것이 21만 5천 건이 었다. 전체적으로 34억 마르크 이상을 동독 측에 지불했다. 대부분 현금을 피하고 현물로
교환했다.
그런데 공산권에서는 이념적으로 ‘정치범’이란 범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사회는 완벽한 역사적 진실이 실현된
사회주의라는 허망된 상념에 빠진 망상이었다. 그럼으로 과거 소련에서는 정치범을 정신병동으로 입원시켜 서방측의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냉전시 독일에서 ‘정치범’은 광의로 해석되어 망명시도, 망명지원, 반국가적 행위 혹은 정치권에 대한 모독 등이 죄목에
속했다. 서독 측 관점에서 볼 때는 이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기본권을 요구한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이들 정치적인 테러판결에 의해 옥중에서 고통을 받는 동독인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당연한 의무로 간주하여 왔다.
Freikauf의 시초
처음으로 동독 내 정치수감자를 처분하겠다는 발상은 60년대 초 베를린장벽을 세우기 전부터 거론되었다. 이때 동독수상
울비리히트와 고르바쵸프가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동독이 이를 거부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들을 확신시키는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경제사정이 차츰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서독에 차관신청을 할 정도에 이르자 이념교육보다는 경제적 유용성을
앞세우게 된 것이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자 당시 서독의 대 동독정책이 실패로 간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독정부와의 직접협상을 거부해
오는 정책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어 동독에 차관 가능성을 전달했으며 재정지출을 감수하면서라도 동독 내
‘정치범’을 구제해야겠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동서독 양측 변호사를 통해 정치범 석방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은 1963년, 8명의 수감자를 20만 5천 마르크 (10만
2500 유로)에 넘겨받은 것이다. 그 이후의 Freikauf에는 종교계가 직접 관여하였으며 80명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어
884명이 서독으로 이주했고 이 가격 4만 마르크는 물품으로 대가를 치렀다. 동독인들에게 실생활의 어려움을 감소해 주며 동독정부가
직접 현금을 인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업은 극비작전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을 알고 있는 인물은 담당자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동독은 만약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짐으로써 받게 될 명예손상을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이 사업의 주도권은 교회에 있었다. 서독 정부 내부에서는 이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서독측이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동독 측의 압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우려감으로 인해 사업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부를 잘 설득시킨 것은
종교계로서 이들의 노력으로 Freikauf가 유지되어 갔다.
70년대 초까지는 1년에 1000 명 정도가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형량이 5년 이하 즉 비교적 형량이 낮은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Freikauf 라지만 초기에는 감옥에서 해방되어도 서독이주가 불가능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동독에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감자들은 Freikauf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동독안전성으로부터 석방 후 동서독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들은 자기의 사상동향을 조사하려는 수법으로 의심하여 동독에 머물겠다고 답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한
수감자의 비극이 알려 졌는데 그는 석방 후 이 사실을 알고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동독으로 석방된 인원이 늘면서 동독정부는 서독정부에 대규모 사기행각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누구를 석방했는지 또 언제
석방했는지 등 기본적 집계자료를 신빙할 수 없었다. 가공인물을 석방자로 계산하기도하고 이미 석방된 자를 더하기도 했다. 일반
잡범을 정치범으로 합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70년대 중반부터는 Freikauf는 동서독간에 확고한 ‘사업’으로 유지되어 나갔다. 그러나 서독정부 내부적으로
의견차이는 계속되었다. 결국 ‘인신매매’ 자체에 대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시각도 있었으나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인신매매’에서 중대문제가 된 점은 이 ‘정치범’의 가격 즉 몸값에 대해 쌍방이 합의를 보는 문제였다. 초기에는 가격표를
작성했다. 이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여 값이 정해졌다. 동독정부가 가장 고가로 부르는 그룹은 형량이 높거나 의사, 엔지니어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1인 당 기본 액 4 만 마르크의 두 배인 8 만 마르크로 책정되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16만 -
20 만 마르크까지 값이 높아지기도 했다. 서독 첩보원이나 비밀조직원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기타의 경우는 징역의 잔여연도에
따르기도 했다. 형량을 다 치러 곧 서방으로 넘겨줄 수 있으면 최저가격인 11000 마르크로 흥정되었고 일반 범죄자는 대가 없이
넘겨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몸값을 놓고 쌍방이 합의점에 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수 년이
지연되는 경우도 잦았다.
가격흥정에 지친 탓인지 70년대 중반부터는 몸값을 3개 부류로 분류하여 균일화 함으로써 흥정도 쉬어졌고 1년에 1000 명 정도가 석방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동독정권이 얻은 이익이란 인간매매의 수입이 국가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서방진영으로부터의 재정차관으로 부채부담이 커짐에 따라 동독정부에게는 이 사업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1년에 2000 명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동독의 수입은 배로 증가했지만 상거래 제도상에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독입장에서 볼 때 역시 원래 인신매매의 의미와 목적 즉 시민들의 탈 동독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어져 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독 내에서는 ‘인신매매’가 차츰 소문이 나면서 일부 시민들은 단순히 서독으로 이주할 목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정도가
되었다. 즉 ‘’서독이주’(Ausreise)를 정식으로 신청하면 2 년이 걸리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1년 징역을 받고 다시 6개월
후에는 서독에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또 동독정부는 돈이 중요시하여 잠시 복역 후 서독으로 팔아 넘기기도 했다. 인신매매로
인한 국가의 권위손실이 명백해 진 것이다.
동독내부에서는 이 ‘물물교환’의 범위를 최소화하자는 소리도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동독의 경제사정악화로 이 사업을 중단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동독비밀경찰 슈타지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범죄꾼들이 왜 우리의 빵을 축내야 하나? 나는 국가를 위해
경제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열변을 토한 적도 있었다.
한 거름 더 나가서 슈타지는 서독이주 희망자를 팔아 넘기기 위해 구금한 것이 아닐까? 이런 추측을 입증할만한 단서도 있다.
슈타지 내부문서에는 ‘구금자를 서독으로 석방해야 할 필요성은 우리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피력했다는
문서가 나왔다.
서독으로 이주해온 동독인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아온 것은 물론 서독에서는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당시의 쇼크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서독정부에 대해서는 이들은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동독은 이 사업에서 재정적인 이득을 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동독인 자신의 기본이념에 거역하는 행위를 자행한 것이었다. 또
서독정부는 동독정권과 협상을 지속해오면서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국민에게 도움을 준다는 정치목표에 접근한 것이다. http://www.eu-focus.com/_board8/bbs/board.php?bo_table=euf_focus&wr_id=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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