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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부부의 북한 방문기
Korea, Republic o 위에 0 492 2013-02-14 09:40:15

중국 조선족으로 중국 땅에서 56개 他(타) 민족에 속해 살며, 母國(모국)을 희미한 기억 속에 등처럼, 고향처럼 그려보며 살아왔다. 그 애틋함을 가실 길 없어, 모국에 계시는 굶주린 사촌누님도 구제할 겸 북한 함경북도 새별군 쪽으로 발걸음했던 나는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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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헤어졌던 이산가족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북한 주민들에게 이남에 계셨던 ××가 있는가 물어보았더니,「 이남간첩」으로 낙인찍혀 덜컥 잡혔던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감옥에서의 非(비)인도주의 적인 북한당국의 처사와, 주민들을 학대하는 북한 제도의 참상에 해외동포로서의 울분을 금할 길 없다.

 

좋다고만 여겨야 할 母國의 한 귀퉁이를 헤쳐보이는 죄스러움도 없지 않지만, 터무니 없는 나의 「간첩죄」를 대중 앞에 공개하여 증명하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강렬해 이 글을 썼으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해명 바라고 싶다.

 

나는 연길시에서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집거구인 연길시에 살면서 母國에 대한 향수에 늘 잠겨 있는 우리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연변지구 조선족을 믿고 연변지구에 기업을 꾸려가고 있는 한국민들을 보아도, 중국 친척을 찾아 방문하러 온 북한 주민들을 보아도, 우리 조선족들은 그들이 母國의 얼굴 이라 보고 있다.

 

관광이나 조선족 후원사업으로 연변 땅에 찾아온 한국민들을 볼 때면 내 고국의 부강함에 내 일처럼 자랑스러웠다. 식량난으로 궁핍한 가정생활에 보탬 받으려고 찾아온 북한 주민들을 보아도 내 고국의 가난함에 내내 동정심을 품어왔었다. 북한 지역에 조상을 많이 모시고 있는 우리 연변 조선족들은 친척, 형제들이 북한 지역에 많이 살고 있어 지난 시기 거의가 다 북한 땅을 밟아 보았다.

 

나도 아버님의 형제들과 그 자녀들이 있는 북한땅으로 몇 번 지원물품을 챙겨들고 다녀 보왔다. 옛날 이삿짐을 찜 쪄 먹을 정도로 많은 식량과 옷가지를 끌고, 지고, 가져다 부려놓곤 한 것이다.

 

5년 전부터 극심한 식량난에 빠진 북한의 친척 형제들에게서 눈물어린「구원 요청」 편지가 쉴새없이 우리 집에 날아들어왔다 .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부모 형제들도 그들 을 굶겨 죽이지 않겠다고 발등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 지원식량을 들고 가곤 하였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1999년 여름에도 지원요청 편지가 우리 가정에 다섯 통이나 들어왔다. 우리 형제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의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북한에 드나들며 배고픈 고생을 잘 아는 우리는 할 수 없이 북한쪽 방문신청을 또 하게 되었다.

 

한 國軍 포로의 生死여부 확인 요청

 

우리가 북한 국경통과증을 신청한다는 소문 이 주변 친우들에게 알려진 1999년 10월 초였다. 우리 음식점 부근에 살며 자주 식사 하러 와 면목을 아는 한 아줌마가 집에 찾아왔다.

 

그 아줌마는 한국에 연수생으로 2년 동안 가 있다가 몇달 전에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아줌마가 집에 찾아온 목적은 내가 가기로 되어 있는 북한 함경북도 새별군 고건원 탄광 쪽에 있음직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내용은 그 아줌마의 친척이 한국 경상남도에 살고 있는데 그 한국 친척이 6·25 전쟁 당시 북한에 포로로 남겨진 친척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고건원 탄광지구에 너무나 많이 다녀온 나로서는 그 일을 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이고, 찾는 사람의 경력을 맞추어 보면 될 일이었다.

 

高齡(고 령)의 한국 친척은 마지막에 중국돈 5백원 을 내놓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그 아줌마 앞에 나는 그만 황송해졌다. 걱정 말라고, 꼭 찾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것이 다.

 

헌데 내가 받은 이 부탁이 훗날의 북한 여행길에서 화근의 불초더미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세상엔 별일도 다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다. 나는 아내와 함께 10월 중순에 나온 국경 통행증을 쥐고 북한방문 준비를 하기 시작 했다. 가지고 갈 짐이 많아 아내와 함께 갔다 오기로 작정한 것이다. 중국에서 한국에 가는 친구들은 별나라에 가는 것처럼 으스대고 또 옆에서들도 부러워하며 축하해 주었다.

 

허나 북한에 가는 나는 망신스러웠고 옆의 친구들에게서 동정을 받게 되었다. 생활조건이 열악하고, 기차운행이「未定( 미정)」만을 예고하는 북한 형편이니 고생 스럽겠다는 걱정어린 인사들이었다. 물론 한국行(행)도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고생스럽겠지만 그만한 代價(대가)가 있어 누구나 바라고 선호하는 여행길이다. 반대로 북한行은 벌러 가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러 가므로 고생을 사서 하는 일로 치부되기 때문 이다.

 

마누라는 창피스럽기만 하다고, 별난데 갔다 와야 된다고, 기분 나쁘게 앵앵거렸다. 우리 형제들은 중국돈 1천원에 쌀 다섯 포대, 밀가루 다섯 포대, 사탕과자 50㎏, 입을 옷가지 한 가마니를 준비했다.

한국 가는 마음, 북한 가는 마음

 

북한 쪽을 다녀본 경험상 마중나온 북한 친 척들에게 당장 먹을 음식을 안겨주는 일이 급선무였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찰떡 한 박스, 튀김기름 한 박스, 술 한 상자, 담배 한 상자를 준비하니 가지고 갈 짐은 半(반 ) 자동차가 실히 되었다.

 

매년 이렇게 지원해도 북한 쪽에 있는 친척 들이 다 나눠가지면 얼마 안 차려져 또 달라고 하는 실정이다. 그럴 때면 북한 가는 마음은 무겁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항상 들 곤 하였다.

 

연변지구 도문-새별 세관을 통해 북한쪽 친 척들에게 간다고 통지한 뒤 우리는 10월15 일 출발하였다. 돈만 내면 어디까지나 실어 다주는 좋은 세월이니, 연길부터 도문 세관 까지 길을 헐히 달렸다.

 

북한의 새별 쪽을 살펴보니, 통지받은 대로 사촌누이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세관 밖의 담장에 일렬로 쭉 서서 중국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왔다고 손신호를 하며 소리치자 그들 도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1998년까지만 해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소리치며 인사 나누던 것이 웬일인지 소리 응답 이 없었다. 하도 이상하여 세관 일꾼에게 저쪽에서 왜 대답 안하는가 물으니 그는 웃으며 말해주었다.

 

『저길 보라, 강제로 잡혀서 일하는 사람들 을, 저들이 모두 세관 쪽이나 두만강 둑에 서, 중국 쪽에 대고 반갑다고 소리친 사람 들이 붙잡힌 거다. 중국 쪽에다가 소리만 쳐도 환상을 가진다고 마구 붙잡아 며칠씩 통옥수수죽을 먹이며 강제노동을 시킨다』 한심하였다.

 

친척 형제들이, 오랜만에 보면 반갑다고 소리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 인간을 무시해도 분수가 없는 북한의 처 사였다. 중국 쪽에서 간단히 수속을 마친 우리는 세관다리에 있는 밀차에 짐을 가득 싣고 북한 쪽 세관으로 갔다. 세관에 들어 설 때부터 벌써 북한 쪽 세관 보초병이나 세관 일꾼들의 눈초리는 매서웠다. 뭘 찾는 독수리 눈길 같았다.

 

내가 폭탄이라도 지고 들어오는 중국 해방군의 戰士(전사) 같아 보였는지, 말투부터 사나웠다.

 

『이 짐 안에 뭐 있소?』

 

『식량과 떡, 술, 사탕 같은 것들입니다』

 

『세관 안에 짐을 다 가지고 들어오오. 검열해 보겠소』

 

나와 마누라는 세관 건물 안으로 진땀을 흘리며 짐을 날라 들여갔다. 짐 하나하나를 다 풀어보고 질러보며 검색 기계 같은 곳에 비쳐 검사해 본 세관 일꾼들은 우리 몸을 검사했다. 편지라도 있지 않나 하여, 입은 옷의 혼솔까지 다 훑어보고 난 그들은 마누라의 말아올린 머리둥지까지 풀어 검열했다. 검사가 끝나자 노골적인 암시를 주었다.

 

『우리한테도 인사가 좀 있어야 될 게 아니오?』

 

매번 북한 쪽을 다닐 때마다 그들의 물건 빼앗는 솜씨를 잘 아는 우리다. 내놓지 않으면 규정이 어떻소, 어떻소 하며 하루종일 괴롭히는 그 앞에서 북한에 다녀오는 중국 조선족들은 진절머리를 낸다. 미리 예견하였으므로 우리는 쌀 한 포대와 밀가루 한 포대, 따로 준비한 술, 담배, 고급빵 같은 것을 가득 담은 박스 하나를 내놓았다. 만족한 세관 일꾼들은 좀전같지 않게 상냥히 웃음을 띠며, 잘 갔다 오라고 인사까지 하였다.

 

이제나 저제나 우리가 세관 안에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친 척들은 우리를 에워쌌다. 모두 피골이 상접 한 핏기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바람을 잘 아는 우리는 그 자리에서 찰떡이나 튀김, 술 같은 것을 먹으라고 내 놓았다. 마중나온 일곱 명이 서서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보니 가슴 아팠고, 우리가 지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 58」 화물 자동차

 

새별군 세관으로부터 고건원 탄광 마을 까지는 거의 1백리 길이 되었다. 다니는 버스라곤 한 대도 없는 북한 실정에서, 짐이 많아 친척들은 어디서 화물 자동차를 구해왔다.

 

차의 모양이나 기관이, 완전히 구식인 북한 기본자동차형「승리 58」은 중국에서 심심산골에 들어가도 파철더미로밖에 보이지 않을 차였다. 휘발유가 없어, 대용 연료라는 옥수수 송치나 참나무숯으로 물을 끓여 달린다는「승리 58」자동차는 맥이 없어, 조그마한 언덕길을 올라도 발동이 자꾸 꺼져 한참 풍무질로 불을 세게 만든 뒤 김을 올려가지고 가곤 하였다.

 

웬만한 자동차면 1백리 길을 한 시간 정도이면 능히 달릴 길이건만 오전 11시에 떠난 것이 저녁 9시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그때 차에 앉아가면서 이게 바로 북한 경제속도라는 생각이었다. 아내도 친척들에게 자동차가 소가 뛰는 속도라고 하여 웃게 만들었다. 電力(전력) 사정으로 희미한 전등불 아래 숨죽였던 탄광마을이 우리가 왔다는 소문에 밤중에 주민들이 길거리에 나와 서 있었다.

 

모두들 부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했고, 군침을 꿀떡꿀떡 삼키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전에는 이런 북한 행차가 옛날 사또 부임하듯 어깨 으쓱한 일이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바뀌어 바라보는 주민들 모두가 끝없이 측은하게만 보였다.

 

짐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위 탄광마을의「간부들」이라는 사람들 과, 안전원(경찰)들이 어슬렁어슬렁 좁은 사촌누이네 집안에 웃음을 가득 담고 들어섰다. 보나마나 중국 술 한 잔 먹자고 온 차림새였다.

 

사촌누이네는 뭐가 무서운지 아첨에 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으면「사상」이 나쁜 가정으로 타격받는다는 것을 알긴 알지만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도 않았다.

 

차린 상에는 허연 김치에 찰떡 몇개씩 올려놓았는데 모두들 술을 잘 먹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술이라며 아이들이나 즐겨하는 사탕 한 알에 술 한 잔씩 연속 마시는 탄광「간부」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중국 같으면 돈을 주며 먹으래도 사람 죽인다고 하지 못할 일이었다.

 

『중국 사람이 통이 왜 그렇게 작아』

 

도착한 그날 밤 북한 마을 유지체계인 인민반의 반장을 찾아갔다. 탄광마을 분주소에 숙박 등록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민반 장과 같이 분주소에 찾아가니, 담당 안전원 은 숙박등록을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가 물으니, 분주소장이 출근할 내일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탄광마을 분주소는 우리가 북한 땅을 밟을 때마다 애를 먹였다.

 

예물이 작으면 자기들의 배가 부를 때까지 머무르지 못한다는 규정을 내놓는 것이다. 개운하지 못한 마음으로 자고 일어나 인민반장 할망구와 같이 아침 일찍 또 분주소를 찾아갔다.

 

북한 땅에 들어서면 응당 예물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묘리를 터득한 우리는 술과 담배, 빵 같은 것을 한짐 들었다. 우리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온 분주소장은 키가 작달막한 심술궂게 생긴 중년남자였는데 말은 하지 않고 불쾌하게 아래 위만 훑어 보았다. 우리가 내놓은 예물을 가늠해 보다가 퉁명스레 한 마디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통이 왜 그렇게 작아』 노골적으로 예물이 적다는 소리다. 이만하면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사이 쌀쌀하게 끊어뱉듯 말한 그는 다른 방으로 쑥 들어 가 버렸다. 일이 이쯤 되면 사촌누이네 집으로 찾아와 우리를 가라고 호통치고 사촌 누이를 못살게 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옆에 선 아내는 당장 오늘중으로 떠나자고 하였지만, 그렇게 쫓겨갈 수는 없었다.

 

누이네 집에 돌아온 나는 세 명이 입을 , 괜찮다는 털내의 세 벌과 세 켤레의 등산 운동화를 예물로 더 들고 또 찾아갔다. 당직을 서던 안전원은 더 많이 준비한 우리 예물 상자를 살펴보더니 급기야 분주소장을 찾았다. 무엇을 찾는 듯한 두리번거리는 표정으로 나타난 분주소장은 우리가 내놓는 박스함의 물건을 보더니 누그러진 듯한 어조로 상냥히 말했다.

 

『어쩌겠소, 우리 임무가 그런 거니 양해하오. 후에도 오면 봐주겠으니 제 기한까지 실컷 쉬다 가구려』

 

알겠다는 대답만 남기고 나오는 나의 마음 속은 끓어 올랐다. 더러웠지만 참아야만 하 는 권력 체제였다.

 

우리의 체류 수속은 또 한 단계를 거쳐야 했다. 郡(군) 보위부의 외국공민 체류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빠져 나와 마누라는 아까웠지만, 아예 있을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예물 한 박스를 든든히 준비하고 떠났다.

 

고건원 탄광마을로부터 새별군읍까지 거의 1백리 되는 길은 읍에 가는 자동차편을 이 용하였다. 운전사에게 북한돈 2백원을 주니 태워주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도착한 우리는 郡 보위부 외국인 사무소를 찾았다. 외 사지도원이라 부르는 중년이 안된 남자는 이미 우리와 舊面(구면)이었다.

 

『또 나왔소?』하며 아는 체하는 그에게 대답 대신 예물상자를 내놓았더니, 그는 하 던 본색대로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왜 담배는 이렇게 작소?』 가지고 나온 물건이 얼마 되지 않아서라고 하자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3일쯤 있다가 떠나오』 예물이 작으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다. 마누라는 대뜸 북한돈 5백원을 꺼내더니 그의 책상 위에 뿌렸다.

 

『이거면 되겠어요?』

 

『할 수 없구만, 내 졌소』

 

『뭐야? 이 중국 반동놈 같은 게』

 

그제야 그는 우리가 내놓은 통행증에 「체류 15일」이라는 도장을 꾹 박아주었다. 마 치 우리는 죄 지은듯한 기분이었다. 저녁에 누이집에 도착하니 웬 안전원이 집에 앉아 있었다. 의아해 하는 우리에게 사촌누이가 인민반 담당 안전원이라는 것이다 .

 

자기 소개를 한 그 안전원은 탄광 안전부 의 위임을 받고 왔다며, 가지고 나온 물품 검사를 하여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세관에서 다 검사한 물품들인데 또 검사할 필요가 있는가고 반문했다. 또 나는 식량과 옷을 가져다 주러 왔지, 장사하러 가지고 온 물품은 한 가지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있는가 없는가는 자기네가 봐야 안다며 「非사회주의 물건」이 없는가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떨떨해졌다.

 

『非사회주의 물건이란 뭐요?』 나의 물음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 웃 음을 짓더니, 『조선식 사회주의와 어긋나는 옷이, 비사회주의 물건이오』라고 대답 했다. 하루종일 못살게 구는 안전부나 보위부의 꼬락서니에, 마음이 울적했던 나는 계속 따졌다.

 

『그런 게 뭔지 이해되지 않는데, 사회주의 옷은 어떻구, 자본주의 빵은 어떻게 생겼 소?』

 

나의 말에 지지 않으려는 듯 그도 목청을 높였다.

 

『청바지나, 팬티처럼 생긴 바지는 자본주의란 말이오!』

 

『중국은 사회주의인데 서로 같은 옷을 입으면 안되오?』

 

『중국은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라 半(반) 사회주의, 말하자면 거짓말 사회주의란 말이오!』

 

『잘사는 게 사회주의지, 여기처럼 못사는 게 사회주의요?』

 

『뭐야? 이 중국 반동놈 같은 게!』

 

『이 북한 도둑놈아!』 격해진 그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나도 주먹질을 할 자세로 마주섰다.

 

『쏠 테면 쏴라, 난 중국 공민이다!』 씨근거리던 그는 매달려 봐달라고 애원하는 사촌누이의 애걸에 못 견디는 듯하며 주저 앉았다. 나의 마누라는 한 마디 더 뱉었다.

 

『여기서 굶어죽게 되었으니 우리가 나왔지 , 배추 꼬랑지라도 얻어 먹으러 나온줄 알아요』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만 숙이고 분을 삭이는 그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촌누이와 딸은 제꺽 술상을 차려놓았다. 안주도 없는 그따위 술상이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만, 나는 주인이라는 체면으로 그에게 한 잔 마시자고 청했다.

 

격분한 그의 자세 같아서는 응할 것 같지 않았는데 피식 웃더니 제꺽 술상에 마주앉는 것이었다.

 

『내 너무했으니 이해하오. 우리 작업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소』

 

나도 더 마주서고 싶지 않아 속에 없는 말을 했다.

 

『나도 알 만하니 일 없소. 내 여기 실정을 다 아오』

 

술 못 먹어본 사람처럼 게걸스레 쭉쭉 들이 키는 그를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에게 집의 아이들이나 입히라고, 우리 아이들이 입던 옷 가져온 것을 몇 벌 주니 황송해 하며 그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밖으로 나섰다.

 

밤은 어두웠다. 하늘엔 먹장구름만 끼어 있어 으스스한 느낌만 주었다. 북한은 해외동 포들에게조차, 와서 잠도 자지 말고 있지도 말라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와, 모두 소처럼 잡숫네!』

 

주민들의 생활은 1998년보다 좀 나아진 듯싶었다. 이곳 고건원 탄광 주민들은 1998 년까지만 해도 식량난에 몹시도 허덕였다. 집집마다 옥수수 가루 한두 숟가락을 탄 멀건 풀죽으로 끼니를 때웠었다. 굶어서 이집 저집 사망했다는 소리였다.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사방에서 벌어지는 스산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북한 식량난이 조금 풀렸는지, 식량공급을 한다는 것이다. 식 량공급 실태는 고건원 탄광에서 근무하는 炭夫(탄부)들과 그 가족들에게 한달에 20일 간 식량을 준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1998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하루분의 식량도 공급하지 않았다 . 그러니 떼죽음이 날 수밖에 없는 탄광마을이었다. 20일간 식량공급은 이곳 주민들에게 확실히 삶의 희망을 심어준 것같이 보였다.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는 것이 보였고 , 침울하던 탄광마을 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도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해 탄광에 직접 근무하는 인원이 없는 누이네 집안 같은 非생산단 위 가족들에게는 한 달에 일주일간의 식량 밖에 주지 않았다. 그외 식용 기름 같은 것 은 전혀 배급이 없었다. 모두 옥수수가루나 옥수수쌀에 매달려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으므로 속은 텅텅 비어 있음이 완연했다.

 

쌀밥 같은 것은 생각 못할 일이었기에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사촌누이네집에서「간부」들이나, 신세진 동네집들을 초청하여 접대하는 것이 쌀밥 이었다. 모두들 어찌나 허기졌는지 중국 같으면 열 사람이 먹어도 다 못 먹을 쌀밥 한 쟁개비를, 남자나 여자나 박박 긁어 먹고도 성에 차하지 않았다.

 

일상 주식을 別食(별식)처럼, 김치에다가 먹고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희한하였다 . 아내는 너무 재미있다며 『와, 모두 소처럼 잡숫네!』 하고 감탄하며 키득키득 웃곤 하였다. 이렇게 식량 공급이 좀 되니 사람 사는 세상이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뒤편에는 또 독소가 있었다. 식량 공급을 조 금씩 하면서 북한 노동당이 펼친 정책이, 주민들을「사상 검토」하고 처형하는 바람 이 대대적으로 분다는 것이다. 내 식견으로는 다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주민들이「사 상생활 총화」를 일주일에 한 번씩 참가할 때면 모두 진땀을 흘린다고 한다. 화장실에 가 잘못한 일도, 캐댄다는 것이다 .

 

자기 비판도 하고 남도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주 무섭게 감투를 씌워야 한다고 했다. 나와 한잔 같이 나누었던 누이네 옆집 나그네의, 생활총화 흉내내던 말이 생동 했다.

 

『김명식 동무는 어제 저녁 국가의 귀중한 석탄을 집에 한 배낭 훔쳐 들어갔는데 아 주 엄중합니다』

 

『위대한 장군님을 결사적으로 받들지 못할 지언정, 심려만 끼쳐드리니, 이는 反黨(반 당)적, 反혁명적 행위입니다』

 

『자기 집이 추운 것은 알면서 사회주의가 흔들리는 것은 생각 안하는 명식 동무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키려는 입장이 전혀 없는 이색분자입니다』

 

초당적인 언사로 투쟁을 벌여대는 생활총화 에서, 명식이라는 친구는 결국 열흘간의 식량공급이 잘리는 처벌을 받았다 한다. 희비극이었다. 북한은 30년 전 중국이 무지 몽매하게 文化혁명을 부르짖으며 애매한 사람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그 수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듯했다.

 

사촌 누이네 집에 놀러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 했다. 식량 고생을 무척 하던 몇 년 동안에 는 굶어 쓰러지고, 기력 없이 쇠잔해진 주민들에게 차마 학습하자는 말을 못하더니, 이젠 목을 단단히 조인다고 하였다. 노동당에서「먹을 것이 우선 있어야 된다는 자 본주의 싹을 뿌리뽑고 혁명만을 생각하는 백전불굴의 정신」을 새로운 목표로 사회에 지시했다 한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고생을 죽음의 문앞에서 눈알 빠지게 해 온 주민들이 이런 노동당의 새 노선에 감탄 할 리가 없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선을 구원하셨다』

 

주민들은 모두 입을 삐죽거리며 겨우 일할 만한 정도의 쥐꼬리만한 식량을 주면서 이 제는 새로운 고통으로 목을 죄고 있다는 것이다.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기 전에 1시간 , 저녁 5시에 일을 마치고 7시까지 2시간, 이렇게 하루 3시간 학습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많은 지식을 배우면 수준이 굉장히 높겠다고, 무엇을 배우느냐고 호기심 나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사촌 누이네 자 식들이나 친척들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엉뚱한, 알지 못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들이었다.

 

『세계가 죽음의 식량 고통 앞에 지금도 허덕이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맨 선참으로 탁월한 지략을 펼치시어 조선을 구원하셨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악랄한 봉쇄정책은 세련된 어버이 장군님의 전법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韓民族(한민족) 언어가 풍부한지, 듣기가 무서운지, 마디마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말들이었다. 탄광마을 가는 곳마다 써붙인 구호도 요란하였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는 21세기의 세계 태양」,「사상대국 만세」「강성대 국 만세」「우리식 사회주의 만세!」 온통 만세와 합창뿐이다.

 

보고 들으면 내 고국이 이처럼 요란하구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따져 보면 또 온통 빈 깡통소리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땅이었다. 북한이 몇십 년 전에 만들어 감흥을 주었던 영화 「꽃파는 처녀」에 나오는 이런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하늘엔 비행기가 날고, 땅에는 기차가 달리는 세상, 허나 우리 조상들은 그때도 갓 쓰고 당나귀만 타고 다녔으니, 무지러지고 발전하지 못할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 그때 우리는 중국에서 이 영화를 보고 감동 했다. 사회 발전의 진리를 천명한 그 말에 감복했었다. 하지만 그 진리를 선전하던 북한이 자기 말을 잊어먹고 옛날로 달리기 시작했으니….

 

脫北 후 다시 北에 온 두 청년 이야기

 

하루는 우리가 중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두 청년이 집에 찾아왔다. 머뭇거리던 그 들은 미안하지만 중국 담배를 한 대 좀 피우자고 청했다. 내가 선뜻 담배를 어서 피우라 권하자, 그들은 자기네도 1년 전에 脫北(탈북)해 중국 구경을 한 달 동안 해보았다고 고백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럼 왜 중국에서 도로 넘어왔는가고 물었다. 그들의 얘기를 옮겨 본다.

 

<脫北해 중국 용정현에서 머물던 우리는 도로수리를 하는 곳에서 한 달간 일해 중국돈 5백원을 받았다.

 

중국돈 5백원이면 북한돈으로 만원 가량 된다. 큰 돈을 처음 쥐어본 우리는 고향에 두 고 온 굶주린 부모 형제가 생각나 돈을 가 져다 주려고 몰래 두만강을 넘다가 그만 붙잡혔다. 번 돈은 몽땅 빼앗기고 郡 보위부 감옥에 끌려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몽둥이로 얻어맞고,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받던 끝에 道 보위부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道 보위부 집결소라는 것은 중국으로 脫北 했다가 붙잡혔거나, 북한의 사상에 의혹을 가진, 죄가 경한「사상범」들을 취급하는 곳이다.

 

우리는 청진시 청암구역에 있는 집결소에서 여섯 달 동안 죽음의 고비에서 겨우 살며 , 온갖 고역을 다 치렀다. 집결소 강제 노동은 청암구역 내 아파트를 짓는 일이었는데 벽돌장이나, 시멘트 블록을 등에 지고 뛰어다녀야 했다.

 

주는 식사란 콩껍데기 가루낸 것에 옥수수 가루를 섞어 반죽한 콩알 크기만한 가루음식이었는데 거기서는 이것을「염소똥」이라 불렀다.

 

한 줌도 안 되는「염소똥」을 먹고 하루종일 일하자니, 기력이 다해 쓰러지는 사람들 이 부지기수였다. 우리가 강제 노동을 할 때의 인원은 3백50명가량 되었는데, 일을 하다가 허약해 쓰러진 사람이 매일 나타나 죽음이 꼬리를 물었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워 현장에서 자살한 사람도 몇십 명이 더 되었다. 게다가 매맞아 죽은 사람도 열명 정도 된다.

 

우리도 고통스러워 못을 삼켰는데 들켜 배를 강제수술하고 겨우 살아났다. 우리죄란 한 달 동안 중국 체류시 한국방송을 청취 했는가, 한국민을 만났는가 하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중국에 있는 기간 라디오가 없어 한국방송도 청취 못했고 한국민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끝까지 그런 일 없었다고 버텼는데도 강제노동을 당했던 것이다.

 

출소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는 한달동안 일하면서 배불리 먹어 보았던 중국 생활이 너무나 그리워 脫北 결심을 수차례 하였다. 하지만 郡 보위부 감옥과 道 집결소 강제노동 때에 몽둥이에 얻어맞은 어혈로 둘다 지금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운신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우리는 영원한 종신 불구가 된 것 같다. 보위부의 기본 수법은 경한 죄를 범한 사람 들이 출소 후 다시 일을 칠까 봐 때려서 불구를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 방법이다. 완전히 원시적인 범죄 근절 방법을 쓰고 있다.

 

그후 병신 된 몸이라도 끌고 중국 땅에 들어가, 사람답게 한두 달만이라도 배불리 먹 고 세상 구경하다 죽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9년 들어 金正日은 주민들에게 한 달에 절반 가량의 배급을 주면서『중국 에 脫北하는 脫北者들을 엄벌에 처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한다.

 

이 지령에 따라 道 보위부에서는 중국脫北者들을 붙잡으면 이유 여하에 관계없이 5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 전에 없던 비상조치 로 脫北者 가족들을 무조건 함경북도 온성 군에 새로 꾸려놓은 道 보위부 관리소에 처넣는다.

 

道 보위부 관리소는 운영방법이 정치범 수용소와 비슷한 성격인데, 기한없이 가족들 을 강제 노동시키며 관리소 안에서 생명을 끝내도록 만든다.

 

관리소에 들어가면 죽는다. 가정생활이란 것이 없고, 남녀를 따로따로 생활하게 한다. 脫北한 본인들도 말이 5년 이상 징역이지, 안전부 감옥과 근본 다른 사상범을 다루는 보위부 감옥에서 1백%를 죽여버릴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무서운 화를 당하는 金正日의 새 지시가 무서워 누구도 지 금 감히 脫北할 생각을 못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북한 주민들이 脫北하는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완전히 목숨을 순간에 바치는 일이 脫北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급증하던 脫北者들이 1999년 여름부터 그 수가 적은 것이 짐작되었다.

 

눈앞엔 온통 그저 북한의 가는 곳마다 써붙인「강성대국」이라는 글발과 함께「엄벌 대국」이라는 새로운 글자가 나타날 뿐이었다. 저 아프리카 원시림 속 어디에 있을지 모를 무서운 원시적 종족 처벌이 한반도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국군 포로 3人의 이야기

 

도착한 며칠 후 나는 부탁받은 한국 이산가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데 달라붙었다. 1980년도까지 고건원 탄광마을에 6·25 전쟁 당시 한국군 포로병들이 몇 명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함경북도 온성 군에 있는 주원탄광과 은덕군에 있는 아오지탄광으로 이주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은 각 郡마다 다니자면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우리 중국교포도 통행증에 새별군 밖에 밝히지 않아, 온성군이나 은덕군에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마을 주민들에게 부탁했더니 하루는 한 주민이 은덕군에서 왔다는 한 주민 을 데리고 왔다. 그 주민에게 은덕군 아오지탄광에 한국군 포로병이 있는가고 물어보 았더니 그는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열댓명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실 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없는가 요청했다.

 

한국군 포로병 한 분을 직접 만나든가, 아니면 그 가족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나의 의향 앞에 그 주민은 쾌히 승낙했다. 수고비 겸 부탁비로 나는 주머니에서 북한돈 1백원을 꺼내주며 수고비에 쓰라고 주었더니 그 주민은 꼭 데리고 오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과연 약속한지 이틀 만에 그 주민이 어떤 할머니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 할머니는 72세 된 조OO이라는 분이었는데 은덕군 학송리에 살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러면서 6년 전에 사망한 자기 남편의 이름은 김OO이고 나이는 77세 인데 6·25 전쟁 당시 북한 황해도 해주 근방에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 포로병이라 하는 것이다.

 

고향은 경기도이며 고향엔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있다고 하였다 한다. 북한에서 30세 정도 되어 자기와 가정을 이룬 김OO은 아들과 딸을 보았다. 현재 그 아들은 교원을 하고 있고 딸은 출가했다 하였다. 연길 아주머니가 알아보자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또 이 할머니는 자기 남편의 친한 친구인 박OO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박OO은 전라도 태생인데 영감과 같이 포로가 되었다 한다.

 

나이는 76세 정도이며 영감과 같이 아오지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연로보장 후 은덕군 상농경에 집을 잡고 있는데, 현재 생존중이라 하였다. 할머니는 박OO은 34세 된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은덕군 편의봉사 지도원을 하며 돈을 잘 벌고 있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며 부러워하였다. 박OO의 집은 학송인민학교 앞에 자리잡고 있다 하였다. 이 박OO씨도 역시 그 아주머니가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전한 포로들의 운명

 

조OO 할머니는 자기 영감과 같이 포로된 친우들이 아오지탄광에서 1970년도까지 같이 일하다가 20명 정도가 온성군 주원탄광 에 집단 이주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영감 친우들은 기본인원이 온성군 주원탄광에 있으며, 1998년에도 정OO이라는 온성에 있는 포로병 출신 영감이 은덕에 왔다가 자기 집에 들러갔다 한다. 정OO의 말에 의 하면 5명 정도가 주원탄광마을에 아직 생존중이다.

 

맥이 풀렸다. 아무리 물어보아야 찾고자 하는 연길 아주머니의 친척이 없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이렇게 걸음을 시켜 안됐다 는 사과를 하며, 북한돈 1천원을 주어 생활 에 보태쓰라고 한 후 돌려보냈다. 온성군 주원탄광 쪽으로 몰래 가볼까, 아니면 사람을 찾아 연줄을 달아볼까 궁리하는 데 뜻밖의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조OO 할머니를 보낸 다음날인 10월23일 점심시간에 웬 낯선 남자들 3명이 우리집에 찾아 왔다. 그들은 자기네는 은덕군 보위부에서 온 반탐과 보위원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후 은덕군 보위부에 같이 가야겠다는 것이다. 무슨 영문이냐고 묻자 그들은 국가문제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므로 그건 가서 논의해야 된다고 딱 잘랐다.

 

그러면서 나의 아내도 같이 갈 것을 요구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들이 타고 온 지프에 앉게 되었다. 지프에 오르자 이들은 우리 손에 족쇄를 덜커덕 채웠다. 왜 그러는가 물어도 아무 대답 없이 막무가내인 이들 앞에서 더 항변하고 싶었지만, 죄가 없는 우리는 흑백이 가려지리라 생각하고 마음 든든히 떠났다.

 

고건원 탄광마을에서 은덕군까지는 약 2백리 가량 되었는데 도로가 울퉁불퉁해 3시간 남짓 걸렸다.

 

은덕군 보위부 청사에 이르러 어느 한 방에 들어서니 중년이 넘은 반탐과 부부장이라 는 사람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군 포로병들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가 물었다. 있다고 대답하니, 목적이 뭔가 묻는 것이다.

 

나는 연길에서부터 부탁받고 알아본 사유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나의 아내에게도 물었으나 아내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더 알아 볼 것이 없었다. 보위부 반탐과 부부장은 연길 아주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으며 어떤 관계인가 물었다. 그저 마을에서 가깝게 지내며, 남편과 같이 살림을 꾸려보자고 아둥바둥하는 정직한 아주머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책상을 탕 치며 똑바로 말하라고 을러댔다.

 

나 역시 그 이상 더 할 말이 없던 차라 무슨 말을 더 하느냐고 맞섰다. 그러자 그는 옆의 보위원들에게 데려가라고 말하며 음흉하게 웃음지었다. 몸집이 실한 보위원 두 명은 마누라를 보위부 감방 안에 집어넣고 나를 명패도 없는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방 구조를 보니 천장 꼭대기에 손목을 매다는 쇠사슬이 걸려 있고, 그 옆에 불을 피우는 난로 같은 것 외에 몇 개의 양동이가 뒹굴고 있었다. 나무 몽둥이가 열댓 개 정도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는데 나무책상과 의자가 하나 댕그라니 놓여 있는 것이 대뜸 고문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에는 소리가 밖에 못 나가게 두툼한 방음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내가 들어서기 바쁘게 벽에 걸린 나무몽둥이를 손에 쥔 두 사나이는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똑바로 대라, 너 이남 간첩이지?』

 

얼굴 부위를 빼놓고는 온 몸 어디라 할 것 없이 마구 때리는 그들에게 나는 말 한마디 변변히 해볼 틈이 없었다. 난생 처음 이렇게 맞아보니, 정말 아팠다. 비명소리만 계속 나갔다. 입고 있던 나의 옷은 몽둥이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한참 때려 나를 아예 곤죽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이들은 뜻밖의 말을 던졌다.

 

『똑바로 대라, 너 이남 간첩이지?』

 

『간첩이오? 나 중국 사람이오!』

 

『이 자식이 중국 사람인 걸 누가 몰라, 이남에서 간첩임무를 받았지?』

 

『아니오, 난 그런 걸 모르오!』 또 다시 때리니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후에는 더 생각나지 않는데 눈을 떠보니 쇠창살을 댄 웬 독감방에 내가 혼자 누워 있었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습기가 축축 했고, 10월 말이라 온 몸이 추위에 덜덜 떨렸다.

 

조금 후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두 남자가 들어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개처럼 질질 끌고 처음 보았던 그 방에 들어가 의자에 겨우 앉혀 놓았다. 뒤 따라 반탐과 부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피우던 중국 담배를 권하며 솔직히 말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두어 모금 정신없이 빨아댔다. 그런 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남북이 갈라져 간첩이요, 뭐요 하는데 그런 건 우리한테 상관없소, 난 그 게 뭔지, 말도 잘 모르는 사람이오!』 반탐과 부부장은『흥』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중국 쪽에 사람을 파견해 나의 정체를 다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내가 서로 갈라져 찾지 못하는 이산가족을 위해 물어보았을 뿐인데 나의 정체고 뭐고 다 정당하다고 외쳤다.

 

순간 반탐과 부부장은 일어서더니 구둣발로 의자에 앉은 나를 사정없이 차기 시작했다. 옆에 서있던 두 명의 남자도 합세하여 가죽혁대로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아픔과 고통에 고개를 쳐들 힘도, 말할 힘도 없었다.

 

『똑바로 말해, 너 무슨 임무를 받았어?』

 

『돈 얼마에 포로병 문제를 알아보기로 했어?』

 

그들이 고아대는 소리가 귓속에 모기소리처 럼 앵앵거리는 게 마치 꿈속에서 그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난 모르오! 난 간첩이 아니오!』 하는 소리만을 겨우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참 맞고 나니 내가 헛소리만을 하자 이들은 나를 감방 안에 끌어다 도로 처넣었다. 이렇게 잡혀온 지 하루가 지나갔다.

 

그 다음날 저녁에 한 남자가 사발 두 개를 들고 왔다. 식사였는데 통옥수수알 삶은 것 두 숟가락 정도에 소금물을 탄 맹물이었다. 입이 말라 소금물만 들어 목을 축이고 옥수수알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조금 후 식사를 가지고 왔던 남자가 그릇을 가지러 왔다가 그대로 있는 그릇을 보고『흥, 잘 먹던 놈이 이런거야 성에 차지 않겠지?』 하고는 그릇을 도로 가지고 나갔다.

 

물 속에 몸 담그고 이틀간 서 있어

 

생각해볼수록 정말 억울했다. 식량지원 나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남들은 돈버느라고 웃고 떠들며,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고국 땅이란 곳에 와서 뚱딴지 같은 「간첩」이라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북한놈들이 증오스러웠고, 그 연길 아주머니까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한편 아내가 어찌 되었는지 걱정되었고, 내 앞길이 어찌 되겠는지도 근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중국공민인 나를 외교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어쩌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음날 아침 또 불려간 나는 그들이 묻기 전에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처는 어떻게 되었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요!』

 

반탐과 부부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알아, 너의 처는 내보냈다. 문제는 너한테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후』 한숨이 나 왔다. 다시 무슨 임무를 받았느냐는 똑같은 질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도 전 같았다.

 

그들은 악기가 날 대로 났다. 마치 없는 죄를 억지로 씌워서 내가 자백하게 만들려는 꼴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가져온 몽둥이로 찜질을 당하고 난 나는 또 끌려나갔다. 끌려 간 곳은 목욕탕 같은 욕실 안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별난 감방이었다.

 

사방 벽이 타일을 붙여서 매끈매끈하고 쇠살창을 박았는데 물속에 집어넣고는 살 창 열쇠를 덜컥 채워버렸다. 앉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이른바 물 고문장 같았다.

 

여기서 나는 옹근 이틀 동안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내내 서있어야 했다. 살은 물속에서 허옇게 부풀어나고 온 몸이 저려왔다. 하루는 그럭저럭 이를 악물고 참아왔지만, 졸음이 자꾸 실리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깜빡 잠이 들어 다리맥을 늦추면 풀썩 주저앉아 물속에 잠기곤 하여 벌떡 다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곤 하였다. 아예 이 속에서 자살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또 쇠창살 밖에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지키고 있어 죽을 수도 없는 곳이었다. 이틀이 되니 잠을 못 잔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앞에 있는 것이 부옇게만 보였다. 쇠창살 바깥에서 부부장이라는 사람과 보위 부원들이 연속 무슨 임무를 받았느냐 질문 하였지만 없는 일을 말할 내가 아니었다. 그후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물속에 주저앉은 기억이 난다.

 

희미한 그 기억만 있는데 눈을 떠보니 나의 몸이 찬 시멘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어느새 나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의 몸에 무슨 고약 같은 것을 발라놓았는지 살이 진득 진득했다. 아마 물에 퍼진 살에 발라주는 약 같았다.

 

한참 있으니 전과 같은 통강냉이알 삶은 것에 소금물을 또 들여왔다.

 

그때 나는 일생에 먹어보지 못한 이 통강냉이 알 삶은 것을 한알 맛보았는데 그리도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정신없이 몇알 씹어 먹던 나는 그만 생각이 굳어졌다. 節食(절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죽든 살든 절식하면 병보석으로라도 나를 내놓을 것 같아서였다.

 

3일 후 또 불려간 나는 같은 질문 앞에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그랬더니 웬일인지 때리지는 않고 종잇장을 주며, 나의 경력, 북한에 들어오게 된 동기, 들어올 때와 들어와서 움직인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적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응했다.

 

감방 안에서 수갑을 찬 채로 글을 쓰라고 준 자그마한 널판자 위에 종이를 놓고, 있는 사실 그대로 다 쓰니 하루가 지나갔다. 먹지 못한 나는 그만 감방 안의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무엇을 나의 입에 떠 넣어주는 감각에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아내가 앞에 앉아 나의 머리를 자기 팔로 받치고 미음을 떠넣어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니 아내는 엉엉 울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소!』라고 겨우 말하며 웃어보였다. 미음을 먹으니 한결 정신이 들고 기운이 솟았다. 마누라는 다시 쫓겨나 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았다.

 

벌금 1만원

 

그동안 나는 보위부의 요구에 의해 쓴 것을 다시 쓰고 또 쓰며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 감옥에 들어온 지 꼭 7일이 지나 불려간 나는 반탐과 부부장과 마주앉았다. 그는 살기차던 얼굴색을 돌변하여 뜻밖에도 웃음을 띠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안됐소, 한국군 포로병 문제는 중대한 국가 안전 문제이므로 우리가 신경을 썼던 거요, 당신에게 간첩죄는 없다고 보고 우린 석방하려 하오!』

 

그러며 손목에서 수갑을 풀어주고 종잇장을 꺼내 주며 읽어본 후 손도장을 찍으라는 것이다. 타자한 종이에 적힌 것을 보니 국가 안전 보장에 영향이 있을 요소와 관련하여 나를 구속하였다는 내용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 다음 나의 형사범죄와 관련하여 외국인 법률관례에 좇아, 중국돈 만원을 벌금시킨 후 조선에서 추방시킨다는 내용이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우린 돈도 없거니와 벌금 낼 수 없소!』 하고 강경히 항변했다.

 

그러자 그는 돈은 이미 당신의 아내가 중국에 넘어갔다가 가져왔으니 안심하라며, 서로 좋게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중국에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억울했지만 생각해보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도 아까웠지만, 치욕을 당할 일이 더러웠고, 이 북한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에 더 말하기 싫었다. 서명장 마지막에는 일체 보위부에서 당한 질문과 심문을, 목숨이 져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맹세문이었다.

 

순간 너희들이 뒤가 켕겨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중국 땅에 가면 야만적인 너 희들의 처사를 꼭 공개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나는 채 읽어보지도 않고 더러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인주에 열 손가락을 다 바른 후 지장을 콱콱 찍어댔다. 조금 있더니 아내가 들어왔다. 눈물을 가득 담은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보위부 청사를 나서니 보위부 인간들도 따라나왔다.

 

웬 화물 자동차가 청사 밖에 서있었는데, 자기네가 말해놓았으니 그걸 타고 고건원 탄광 마을까지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 중으로 무조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자동차에 앉은 우리는 떠났다. 저주만을 남긴 채 일 생의 상처로 될 한을 가득 안고, 원망의 부르짖음을 하늘에 날리며 떠났다. 자동차에 앉아오며 아내는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나와 같이 감옥에 갇힌 아내는 첫날 그들의 심문에 결사적으로 항의 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또 조OO이라는 할망구를 내가 상대했으니, 알리없었다. 보위부에서 연루자들을 이미 취조해 본 것 같았다. 그러니 나의 아내는 아무 근거도 없어 내보냈던 것이다.

 

감방 안에서 하룻밤 자고 나올 때 한 보위원이 슬며시 귀띔하더라는 것이다.

 

『거 중국에서 가지고 나온 돈이나 물건이 좀 없소? 쌀이래도 좋소, 보위부에 좀 찔러주면 당신의 남편도 곧 석방될 거요』 이 말을 귀가 항아리만해 들은 마누라는 즉시 고건원 탄광마을에 돌아와 사촌누이와 토의했다.

 

누이와 함께 쌀 두 포대와 밀가루 두 포대, 그리고 돈으로 장마당에서 술과 중국 담배를 한 상자 준비했다. 그걸 가지고 다음날 보위부 부장을 만나 내 놓으니, 그는 좋아서 입이 함박만큼 째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제 당신 남편 사건을 좋게 마무리하겠으니 기다리오, 그런데 벌금은 중국돈으로 만원을 꼭 해야 하오!』

 

마누라가 중국에서 음식장사가 별로 잘 안 되는 우리집 사정을 말하며 애원했으나 보 위부장은 딱 자르더라는 것이다.

 

국군 포로 아들이 고발

 

나의 이른바 「간첩혐의 사건」은 함경북도 보위부에도 통보되었으므로 만원 돈을 내 놓지 않으면 수습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마누라는 돈 가지러 중국에 넘어갔다 온다는 증명서를 떼달라고 하여 보위부 공인이 찍힌 국경통과증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연길에 갔다.

 

연길에서 내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형제들은 연변 공안국에 신고하는 한편 수습처리를 했다. 허나 연변 공안국에서는 북한 쪽과 연계해보니 남편이 북한법을 위반했으므로 벌금은 내야 한다는 답변을 주었다. 괜히 신고했다가 코만 뗀 우리 형제는 서로 돈을 모아 만원을 마련하는데 달라붙었다.

 

아내는 물론 연변 아주머니에게 찾아가 사실을 통보하고 보상을 요구했다. 하여 연변 아주머니도 돈 5천원을 내놓았다 한다. 돈과 술, 담배, 고급빵 같은 예물을 가지고 재차 은덕군 보위부에 도착하니 그들은 미 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박스 안의 담배를 꺼내 서로의 주머니에 넣더라는 것이다. 그 뒤 내가 풀려나왔다 한다.

 

내가 겪은 일이 꼭 무슨 어느 한 영화 줄거리 같았다. 시큰거려 제대로 말을 안 듣는 허리통증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큰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허황스러웠다. 살다 살다 별난 일을 다 겪어본다는 허무감과, 고문당할 때 같아서는 세상을 다시 살아볼 것 같지 못했는데, 이렇게 세상 밖에 나왔다 생각하니 안도감이 드는 것이 별났다.

 

고건원 탄광마을의 사촌누이네 집에 들어서니 모두 울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자기네 때문에 내가 일을 당했다는 자책감에서였다. 나는 일 없다고 위로하며 어찌된 사연인가 물었다. 사촌누이는 자기네가 그동안 알아보니, 그 조OO 할망구의 김OO이라는 아들이 보위부에 고발하여 일이 생긴 것이라 한다.

 

내가 잡히자 분개한 사촌누이의 딸은 즉시 은덕군으로 달려갔다. 그 할망구를 만나니 하는 말이 자기가 고건원 탄광마을에 와서 나를 만난 사연을 아들이라 믿고 이야기하였다 한다. 그러자 아들은 펄쩍 뛰며 만난 그 중국 사람이 분명 「이남간첩」일 수 있다고 신고하러 가자 하였다 한다.

 

조OO 할망구는 그런 것 같지 않다며, 이남에 고향을 두고 가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 은 네 애비를 봐서라도 그러면 안된다고 아들을 설복했다. 허나 북한의 처벌이 두려웠던 아들은, 제 에미 모르게 찾아가 화를 미연에 방지하느라고 고발하였다. 이 사실로 보위부에 불려가서, 귀뺨을 얻어 맞으며 심문당하고서야 할망구도 자기 아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어처구니없었다. 모두 미쳤다. 이래 가지고야 무슨 남북이 화해하며 이산가족을 찾겠는가, 하는 허무감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나는『이산가족을 찾으면 무슨 국가안전이 위태로우냐, 너희 형제들을 찾아주자고 하는데 고발하느냐』 하고 형제들에게 울분을 토했다.

 

너희들은 바로 그래서 못산다, 힘껏 일하고 힘껏 배워야 할 대신 사상이요, 뭐요, 말 방아만 찧으니 너네나 너네 나라 전망은 뻔하다고 외쳐댔다.

 

구역질

 

그러며 너무도 화가 나, 북한이 좋은 세상으로 바뀔 때까지 다시 발길을 안하겠다고 선언했다. 곁김에 개 배찬다는 식으로 아무리 사촌누이 형제들에게 밸풀이 해봤댔자 소용없는 노릇이고 그 시간이 지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아내와 같이 사촌 누이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 우리는 세관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섰다. 다시 북한 쪽을 뒤돌아보니 구역질이 났다 . 모두 목덜미를 쥐고 와, 번창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속에서 한번 살아보라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야지, 얼토당토않은 주장만 앞세우며 서로 물고 뜯기만 해서야 언제 잘 살겠느냐, 그러니 같은 땅 이라도 한국과는 하늘땅 차이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스피커를 매달고 북한에 해대고 싶었다.

 

외국동포들에게「간첩」죄나 뒤집어씌우고, 脫北者들에게는「민족 반역죄」나 뒤집 어씌우며 독재의 마지막 지탱점을 최후 발악으로 지켜나가는 북한 체제의 가련한 모 습도 밝히고 싶었다.

 

나는 중국 공민으로 북한의 사슬에서 풀려 나왔지만 아직도 북한 땅의 모든 주민들은 「강성대국」,「사상대국」을 부르짖는 무서운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 초보적인 인간의 자유와 권리란 무엇인지도 모른다.

 

쇠사슬에 얽매여 주는 걸 먹고, 집체적으로 내몰려 일을 하고, 집체적으로 잠을 자며, 묶여 어쩔 줄 모른다.

 

그 사슬을 풀 임자가 누군지도 한민족은 너무나 잘 안다. 북한이 빨리 이 사슬을 끊어 버리고 번영하는 세상의 무대에 나서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해외동포들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바람이다.●

 

 

출처:http://www.duri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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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경합니다 ip1 2013-02-14 11:45:30
    글을 읽으니 북한에서 당하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름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파렴치하고 어처구니없는 나라가 바로 저 북한 김부자들의 나라안인 깡패집단입니다. 하루빨리 깡패독재집단은 물러나고 진정한 인민의 나라가 수립되여 발전된 한국과 손잡고 번영해야 합니다. 어려운속에서도 북한의 친척들을 위하여 헌신하신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글도 참 재밋게 문맥도 수준급입니다. 반드시 성곡하시여 북한독재정권을 심판하는 산증인이 되시기바람니다.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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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못난이 ip2 2013-02-14 15:42:26
    억울한고생 많이하셨네요.재밋게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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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마1 ip3 2013-02-14 20:08:35
    살아 돌아 오신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들에게 그 무슨 법과 도리를 따진다는 자체가 허황한 얘기입니다,,

    그들은 심문과 고문을 병행하다 사람이 죽으면 "죄가 두려워 자살을 했다"라고 증명서를 만들어 죽은 자의 관과 함께 중국측에 넘기면 이것으로 모든것이 끝납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일이 발생하면 외국인에 의한 국제적인 일인데도 당사국에서는 안일하게 대처한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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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ㅣ막사람 ip4 2013-02-15 00:12:03
    참억을한고생하셨어요그리고당당하게싸우신모습을보는듯했답니다문장과제목들이 훌릉하게씌여있어현실을보는듯하였습니다이글이온세계인이볼수있도록했으면북한정권이증오대
    상이될것입니다고생만으셨네요앞으로님가정일은잘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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