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되지 않는다. (1) 잘못된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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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되지 않는다. 1. 잘못 붙여진 국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이름이다. <大韓民國>한자대로 따진다면 ‘아주 큰 어느 한 민족의 나라’란 뜻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단히도 큰 민족의 근원이 어디 일가? ‘마한’은 충청과 전라지역이 전부이고 ‘진한’은 경상남도지역, ‘변한’은 오늘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가 경계한 자그마한 지역이다. 그 지역은 그래봤자 신라, 가야, 백제의 뿌리 일뿐이다. 그 시기 한반도 한강이북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국가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우리민족이다. 1897년 10월 11일 500년 조선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다 망가진 조선의 국운을 통탄하며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토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면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뭔가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三韓’은 진한, 변한, 마한을 의미하는 것이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도, 고려, 신라, 백제 삼국도 아니다. 고종은 <대한大韓이란 국호의 뜻은 자주독립 황제국으로서 널리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한 ‘삼한’의 혼과 큰 뜻을 이어 받은 나라이다>라고 천명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체성과 이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에서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했고 공화제를 뜻한 <민국‘民國’>을 덧붙여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탄생했다. 1911년 청나라를 전복한 손중산이 <중화민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했을 때이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이승만 정부는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을 정식국호로 정했다. 결론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호는 잘못된 국호이다. 지금의 국호대로라면 한반도의 통일 명분은 없다. 단지 한반도 한강 이남지역에 2천년 전의 삼한국가(마한, 진한, 변한)가 복원 되었다는 의미로써만 가능하다. 만일 “韓”자를 韓민족문제로만 본다면 우리는 더 큰 오류에 빠진다. 국호를 민족, 즉 ‘인종’을 기준으로 지정한 꼴이 된다. 세계 200여개 나라들 중 종족이름을 국호로 지정한 나라가 있기나 할가?
당시 “화령”과 “조선” 2개의 국호를 제청했는데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조선”을 선택했다. 그는 ‘기자조선’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지정했는데 훗날 우리민족은 ‘단군조선’을 염두에 두고 제청했다고 둘러치고 있다. ‘기자조선’든 ‘단군조선’이든 어쨌든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이 결정한 국호이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김일성이 어떻게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분명 32살의 소련특수부대 대위 출신으로써 역사공부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 일 것으로 보인다. 건국이념보다는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정신만 가졌 던 것이다. 조선이란 국호 역시 현시대에 한반도에 건립된 국가로써의 격이 맞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국호변혁이 절실하다. 우리나라의 국호는 <고려민국>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남 고려민국>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 고려민국>으로 고쳐야 한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좋은 이름부터 지어 놓아야 한다.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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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문에 대해 님이 깨닫는 다면
대한 제국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 대한 민국 의 국호가 왜 이어 지는 지를
님은 깨닫게 될 것 입니다
역사적 정통성이 단절된 북한의 국호와 역사적 정통성이 유지되는 대한 민국의
국호를 비교 하는 것 자체가 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인식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802027033
- 룰루스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02-26 08:23:03
진한(辰韓)·변한(弁韓)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로 역(役)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오니, 마한에서 동쪽 경계(境界)를 나누어 주고 성책(城柵)을 세웠다.’ 하였다. 언어가 진인(秦人)과 비슷한 점이 있었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말하였는데, 항상 마한 사람으로 이 임금을 삼았기 때문에 대대로 서로 계승하였으나 자립(自立)하지는 못하였으니, 그들은 유이(流移)한 사람들로 항상 마한에 제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땅은 오곡(五穀)을 심기에 적합하였고, 풍속은 풍요로웠으며, 잠상(蠶桑)하고, 겸포(?布)를 잘 만들었다. 우마(牛馬)를 타거나 부리었고 가취(嫁娶)에 예(禮)로써 하여 그 풍속이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나면 모두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하였다.
또 변한(弁韓)이 있었는데 그 시조(始祖)는 알 수 없고, 진한에 소속되었었다. 진한·변한 두 나라는 각각 12국(國)을 통솔하였고, 또 여러 조그마한 별읍(別邑)을 두었으며, 각각 거수(渠帥)가 있었는데, 큰 자는 신지(臣智)라 이름하였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 다음은 번예(樊濊), 다음은 살해(殺奚),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었다. 그리고 이저국(已?國)·불사국(不斯國)·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염해국(?奚國)·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변낙노국(弁樂奴國)·군미국(軍彌國)·변군미국(弁軍彌國)·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여담국(如湛國)·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우중국(優中國)이 있었는데, 합하여 24국(國)이었다. 큰 나라는 4, 5천 가(家)이었고, 작은 나라는 6, 7백 가(家)이었는데, 모두 4, 5만 호(戶)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진한(辰韓)은 신라(新羅)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난 곳으로 《신당서(新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弁韓)은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高句麗)가 된 것도 의심할 것이 없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변한이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대체로 한(漢)나라가 요동(遼東)의 땅을 경계로 삼은 데에서부터 이르게 된 것이고, 변한이 진한이나 마한 두 한(韓)의 남쪽에 있다고 이른 것은 아니다. 최치원(崔致遠)이 그것으로 인하여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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