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으로는 최병현 교수의 신라 적석목곽분의 중앙아시아 기원설, 문헌사학적 입장(실제로는 재야권의 문정창씨가 최초로 주장)에서는 문무왕비문에 나오는 "투후제천지윤=흉노왕자 김일제" 이는 곧 신라 김씨 조상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겁니다.
최병현 교수가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요 특징들... 지상 축조 목곽, 적석부, 호석이 돌려진 원형 고대 봉토 등은 하나의 셋트로 봐야하고 그 셋트는 중앙아시아 쿠르칸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90년대 초에 주장하면서 학계에서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죠.
최병현 교수는 노인-울라의 흉노족 고분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적 전통", "민족이동" 같은 추상적 단어로 설명했지 흉노족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만...이 주장이 문무왕비의 투후제천지윤이란 구절과 연결되면서 흉노족설로 폭주한 것이죠
최교수의 설은 다수설이라고 할수는 없어도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논의할만큼 유력설이었는데 최근에는 조금 시들해진 상태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적석목곽분 바로 직전 단계의 목곽묘(사라리, 옥성리)가 다수 발견됐는데...무덤 구조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토기는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토기와 연속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적석목곽분은 민족이동에 의한 정복왕조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던 최교수의 학설이 타격받을 수 밖에 없는 결과였죠.
문헌적 근거가 되었던 문무왕비문의 경우 애당초 비문의 표현 자체가 문학적 수사법을 동원해 그 의미가 애매한데다가....학계에서는 해당 구절을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던 김일제의 고사를 단순히 비유적으로 인용한 것(이영호 교수설)이라고 해석하더군요. 그렇게 볼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같은 김씨에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의 고사에 비유했는지는 조금 생각해 볼 문제인듯...
여하간 이 두가지 주장을 잠뽕시켜 과감한 폭주모드로 세부 논증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 신라 김씨 흉노족설이죠.
신라 김씨 흉노족설이 증명되려면 중앙아시아 쿠르칸과 신라 적석목곽분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격차에 대한 해석 문제가 해결되고, 신라왕실의 출자의식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신라 금석문이 추가로 발견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울듯...
* 흉노설 같은걸 떠나서 문무왕비문이 좀 더 완전하게 남아있었더라면 흥미로운 사료가 됐을텐데...저렇게 중앙이 날아가 버렸으니....
요즘 신라김씨가 흉노의 후손인가하는 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들이 많다. 공신력있는 방송사에서 한 다큐물이니 일개인이 하는 이런저런 사견에 비해서는 훨씬 합당한 것일진데 넷상에 자칭 사학전문가라는 인간들 중에도 말이 많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신라김씨가 아마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바 이제 여기에 신라김씨의 역사를 정리해 보려한다.
우선 신라김씨의 기원을 살펴보자. 대체로 신라를 이르는 다른 말 중에 대표적인 것이 사로(사나,사라도 비슷한 류겠지만)와 진한인가 한다. 진한에 대해서는 「위략」에 그 에 대한 말이 있다. 이에 의하면 진한의 늙은이들이 진한의 진은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유래했다고 자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에 나온 「삼국사기」에서는 이 자구를 다소 수정한 듯하여 진나라 유민이 아니라 고조선의 유민이라 한다. 그것에 거하여 가진 망설들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인도 흉노족일뿐만아니라 고조선도 흉노족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대개 극우진영의 기마민족론 숭상론자들의 망설을 환빠들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데서 오는 것이다. 이에 환빠들이 제발 생각좀 하고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 간절한 필자의 소원임을 밝힌다. 고조선은 대사상가 기자와 관련된 문명국이고 흉노는 뒤에 부연하겠지만 천하에 다시없는 야만족이다. 어찌 두 민족이 같은 민족일 수 있으랴. 필자가 김운회 씨의 대주신론을 반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상세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우리민족(김씨왈 주신)의 대표성씨가 김씨며 흉노가 우리민족이라는 것은 상식선에서 생각해도 그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요즘 김씨의 주장을 살펴보면 한일관계사부분은 들어줄 만한 것이 적지 않게 있다 하겠지만 대체로 우리민족과 유목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북방 부분의 역사에 대해서는 망설이 많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두 기사의 내용은 얻갈리지만 북방의 유민이라함은 비슷한 내용이나 진(秦)이라 함은 음운의 유사로 인한 오전이나 왜곡일 것이다. 그렇담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삼국사기」기록은 사실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는 후대에 흉노의 유민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고조선으로 고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유민일 수도 있으나 그렇담 이는 흉노족의 신라유입보다 상당히 연대가 인상된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고조선멸망과 흉노의 유입은 최소 300~400년의 시차가 있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이가 고조선 멸망후 3~400년 이후의 흉노족의 일이라 보는 이유는 「위략」에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같은 책에 의거하면 마한 자체가 고조선의 유민인데 고조선의 유민이 고조선의 유민한테 땅을 떼어 주었다니 어찌 천하에 이같은 모순이 또 있겠느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고조선 멸망 후대의 일이며 그들은 고조선인도 중국인도 아닌 흉노족으로 조선족 즉 부여족 국가에게 경상도 일대에 분거를 허락 받고 남하한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한가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흉노족의 정착이 어디까지나 평화적 정착이었다는 점이 문명사상 획기적이라는 점을 필자는 상기시키고자 한다. 흉노가 중국에 훈족이 서방세계에 떨친 악업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야만무도의 만족을 이처럼 순종시킨 정착문명인은 아마 우리 조선 부여족이 전무후무하다고 생각한다. 이점은 다시 상술하고자 한다.
그렇담 이들이 흉노족 또는 훈족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이제는 상식이 되어렸지만 다시한 번 흉노족 내지 훈족과 신라의 김씨왕족의 공통성을 열거해 보도록 할 것이다. 필자가 잘 모르지만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발생한 신흥문화와 흉노나 훈 계통 민족의 문화를 한번 비교해보고자 한다. 흉노 문화는 필자의 지식이 일천한 바로 대체로 그루쎄 선생의 책에 의거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흉노족은 그들은 동복이란 휴대조리기를 가지고 다녔다고 하며 이것은 미누신스크에서부터 동으로 흉노 서로 헝가리초원까지 퍼진 것이라 한다.
또, 순장의 풍습을 가지고 있어서 「한서」에 의하면 수백 내지 수천을 참수했다고 한다. 금은 제품의 유물을 남겼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ZDF의 한스 후프는 이 훈족의 취향중 독특한 것이 사치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금으로 여러가지 장신구와 마구로 제 몸과 제 말을 치장했다한다. 이를 위해 고도의 장인 야금장이들이 말탄 전사계급 만큼이나 핵심계층임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일대의 거대한 신라 초기 무덤을 보자. 이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동복은 너무나 유명해서 가야기마인물토기에도 있을 뿐아니라 경상도 일대에 흔히 보이는 유적이요, 온갖 사치품들이 나타난 경주 황남대총의 무덤을 보라. 대부분 금은의 귀금속으로 세공했다. 물론 스키타이계통의 그리스장인이 한 것보다는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형태의 것이지만 그 취향은 완벽하다. 그리고 순장은 가장 결정적인 증거다. 신라인들이 이 시기 남하하기 이전까지는 순장이란 풍속이 우리 부여족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현재 경상도지방에서만은 유독 순장묘가 적지않게 나타난다. 단 그 규모는 흉노선우의 기백 기천의 수준은 아니라 기껏해야 37명 정도 쯤이다. 한가지 부연하자면 어디까지나 흉노족이 정복에 의해서보다는 평화적으로 정착한 것이기에 순장의 규모가 적으로 이런 36명 순장은 이래적인 것이고 대부분은 순장자는 4-5명의 소규모고 그들의 가족 즉 흉노족에게 그쳤다. 이와 같이 무자비한 관습을 토착민에게는 강요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이저은 흉노족이 많이 소심해 졌고 부여족의 권위에 의해 순화되었음을 보여준다. ZDF 한스 씨에 의하면 그들의 세계관이 17개의 층위로 세상을 설명하였다는데 신라에는 또한 17관등이 있었다. 이는 마치 한국의 수두교이 5행사상에 의거 부여고구려가 5부를 세움과 유사한 것이 아닌까 한다. 역사학계에 이와 관련됨 망설이 이러한 경주일대의 유목문화가 "부여"에서 왔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는 「삼국지 위지:부여조」에 순장이 언급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에서 민족적 순혈성을 강조하는 무리들이 지어낸 망설이며 그 계통상 신라 유물은 부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훈 또는 흉노 경상도 일대의 흉노족의 차이를 들자면 무엇보다도 유목민으로 남아있는 민족과 정착을 시작한 민족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훈이나 흉노야 천막을 궁정으로 일정한 주거없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화한 유적집단임에 비해 경주 흉노족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마치 로마의 허락을 받고 로마경내에 둔전병으로 일하는 게르만족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당연히 그들은 토착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순장의 경우도 결국은 피지배민 보다는 자신들과 종교를 같이하는 흉노일족과 그들이 데려온 하인들에게만 행했기에 소규모와 했을 것이다. 신라의 화랑이 무엇인가? 단재는 이를 게르만 치하의 중세의 기사단에 비한 바가 있는 바 흉노족이 신라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신라 김씨왕족과 흉노,훈의 차이는 결국은 정착의 적응과정에 있느냐 아니면 야만유목을 계속하는가에 있음을 알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처한 여건의 차이 때문에 신라 김씨는 흉노나 훈보다는 오히려 로마경내의 게르만족과 오히려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것일 뿐, 흉노와 훈 신라왕족의 기원이 다르다 함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여(余)의 생각으로 게르만적인 요소가 이들에게 나타남은 아마도 흉노족 자체가 서방에서 게르만족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라의 화랑도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이것이 흉노족의 전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가령, 흉노족의 전술은 마치 게릴라전술처럼 궤도를 사용해 적을 유인하는 것인데 신라의 화랑은 "임전무퇴"라 하여 물러서는 것을 모욕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러한 아들 원술랑을 부끄러이 여겨 내쫓은 것은 너무나 유명한데 이는 흉노족같은 야비한 족속에게는 찾을 수 없는 성질이다. 이러한 용맹은 게르만족이 주로 숭상하는 바이라 아마도 신라의 흉노족이 서방과 관련이 깊었던 족이어서 그 접촉하던 게르만족적 요소가 자연 스며들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하나의 민족성이란 무형적 요소로 추정을 해 보는 것이지만 "임전무퇴나 사군이충"이란 말은 역시 이들 흉노족이 게르만족과 상당히 관련이 깊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화랑의 주축은 이러한 정신으로 재래 고구려의 선비제도에 이런 점을 개선한 것이 아닐까한다. 물적 근거가 빈약한 주장일지나 화랑을 구성한 정신만은 그러한 면이 강하다. 적어도 흉노족이 상당한 규모의 게르만 용병을 당시 인솔해 왔던지 또는 훈족의 서방원정에 참여하다 신라에 돌아온 자들 중에 게르만족 부대와 섞여 종사했던 자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흉노‘족’을 넘어 흉노 제국으로
흉노(匈奴)라는 명칭은 중국 중심의 사관을 바탕으로 중국민족을 우위에 두기 위해 흉노의 ‘훈’음에 노비를 의미하는 ‘노’자를 붙여 이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한 기마전술로 유럽을 제패한 훈과 흉노의 발음이 비슷할 뿐 만 아니라 실제로 같은 집단이었다는 학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흉노는 그 집단 안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 살아있기 때문에 ‘족’을 넘어 하나의 제국을 건설한 정치적 연합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서양에 등장한 훈족을 서쪽에 있던 흉노가 이동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의문이 풀린다. 훈과 흉노는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범주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초원의 대제국을 형성한 흉노와 북방 유목민족들. 이들이 잔인하고 약탈을 일삼던 야만족이라는 것은 중국적 관점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뿌리의식을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고고학적으로는 최병현 교수의 신라 적석목곽분의 중앙아시아 기원설, 문헌사학적 입장(실제로는 재야권의 문정창씨가 최초로 주장)에서는 문무왕비문에 나오는 "투후제천지윤=흉노왕자 김일제" 이는 곧 신라 김씨 조상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겁니다.
최병현 교수가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요 특징들... 지상 축조 목곽, 적석부, 호석이 돌려진 원형 고대 봉토 등은 하나의 셋트로 봐야하고 그 셋트는 중앙아시아 쿠르칸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90년대 초에 주장하면서 학계에서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죠.
최병현 교수는 노인-울라의 흉노족 고분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적 전통", "민족이동" 같은 추상적 단어로 설명했지 흉노족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만...이 주장이 문무왕비의 투후제천지윤이란 구절과 연결되면서 흉노족설로 폭주한 것이죠
최교수의 설은 다수설이라고 할수는 없어도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논의할만큼 유력설이었는데 최근에는 조금 시들해진 상태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적석목곽분 바로 직전 단계의 목곽묘(사라리, 옥성리)가 다수 발견됐는데...무덤 구조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토기는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토기와 연속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적석목곽분은 민족이동에 의한 정복왕조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던 최교수의 학설이 타격받을 수 밖에 없는 결과였죠.
문헌적 근거가 되었던 문무왕비문의 경우 애당초 비문의 표현 자체가 문학적 수사법을 동원해 그 의미가 애매한데다가....학계에서는 해당 구절을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던 김일제의 고사를 단순히 비유적으로 인용한 것(이영호 교수설)이라고 해석하더군요. 그렇게 볼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같은 김씨에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의 고사에 비유했는지는 조금 생각해 볼 문제인듯...
여하간 이 두가지 주장을 잠뽕시켜 과감한 폭주모드로 세부 논증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 신라 김씨 흉노족설이죠.
신라 김씨 흉노족설이 증명되려면 중앙아시아 쿠르칸과 신라 적석목곽분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격차에 대한 해석 문제가 해결되고, 신라왕실의 출자의식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신라 금석문이 추가로 발견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울듯...
* 흉노설 같은걸 떠나서 문무왕비문이 좀 더 완전하게 남아있었더라면 흥미로운 사료가 됐을텐데...저렇게 중앙이 날아가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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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신라김씨의 기원을 살펴보자. 대체로 신라를 이르는 다른 말 중에 대표적인 것이 사로(사나,사라도 비슷한 류겠지만)와 진한인가 한다. 진한에 대해서는 「위략」에 그 에 대한 말이 있다. 이에 의하면 진한의 늙은이들이 진한의 진은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유래했다고 자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에 나온 「삼국사기」에서는 이 자구를 다소 수정한 듯하여 진나라 유민이 아니라 고조선의 유민이라 한다. 그것에 거하여 가진 망설들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인도 흉노족일뿐만아니라 고조선도 흉노족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대개 극우진영의 기마민족론 숭상론자들의 망설을 환빠들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데서 오는 것이다. 이에 환빠들이 제발 생각좀 하고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 간절한 필자의 소원임을 밝힌다. 고조선은 대사상가 기자와 관련된 문명국이고 흉노는 뒤에 부연하겠지만 천하에 다시없는 야만족이다. 어찌 두 민족이 같은 민족일 수 있으랴. 필자가 김운회 씨의 대주신론을 반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상세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우리민족(김씨왈 주신)의 대표성씨가 김씨며 흉노가 우리민족이라는 것은 상식선에서 생각해도 그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요즘 김씨의 주장을 살펴보면 한일관계사부분은 들어줄 만한 것이 적지 않게 있다 하겠지만 대체로 우리민족과 유목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북방 부분의 역사에 대해서는 망설이 많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두 기사의 내용은 얻갈리지만 북방의 유민이라함은 비슷한 내용이나 진(秦)이라 함은 음운의 유사로 인한 오전이나 왜곡일 것이다. 그렇담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삼국사기」기록은 사실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는 후대에 흉노의 유민임을 은폐하기 위해서 고조선으로 고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유민일 수도 있으나 그렇담 이는 흉노족의 신라유입보다 상당히 연대가 인상된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고조선멸망과 흉노의 유입은 최소 300~400년의 시차가 있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이가 고조선 멸망후 3~400년 이후의 흉노족의 일이라 보는 이유는 「위략」에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같은 책에 의거하면 마한 자체가 고조선의 유민인데 고조선의 유민이 고조선의 유민한테 땅을 떼어 주었다니 어찌 천하에 이같은 모순이 또 있겠느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고조선 멸망 후대의 일이며 그들은 고조선인도 중국인도 아닌 흉노족으로 조선족 즉 부여족 국가에게 경상도 일대에 분거를 허락 받고 남하한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한가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흉노족의 정착이 어디까지나 평화적 정착이었다는 점이 문명사상 획기적이라는 점을 필자는 상기시키고자 한다. 흉노가 중국에 훈족이 서방세계에 떨친 악업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야만무도의 만족을 이처럼 순종시킨 정착문명인은 아마 우리 조선 부여족이 전무후무하다고 생각한다. 이점은 다시 상술하고자 한다.
그렇담 이들이 흉노족 또는 훈족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이제는 상식이 되어렸지만 다시한 번 흉노족 내지 훈족과 신라의 김씨왕족의 공통성을 열거해 보도록 할 것이다. 필자가 잘 모르지만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발생한 신흥문화와 흉노나 훈 계통 민족의 문화를 한번 비교해보고자 한다. 흉노 문화는 필자의 지식이 일천한 바로 대체로 그루쎄 선생의 책에 의거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흉노족은 그들은 동복이란 휴대조리기를 가지고 다녔다고 하며 이것은 미누신스크에서부터 동으로 흉노 서로 헝가리초원까지 퍼진 것이라 한다.
또, 순장의 풍습을 가지고 있어서 「한서」에 의하면 수백 내지 수천을 참수했다고 한다. 금은 제품의 유물을 남겼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ZDF의 한스 후프는 이 훈족의 취향중 독특한 것이 사치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금으로 여러가지 장신구와 마구로 제 몸과 제 말을 치장했다한다. 이를 위해 고도의 장인 야금장이들이 말탄 전사계급 만큼이나 핵심계층임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일대의 거대한 신라 초기 무덤을 보자. 이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동복은 너무나 유명해서 가야기마인물토기에도 있을 뿐아니라 경상도 일대에 흔히 보이는 유적이요, 온갖 사치품들이 나타난 경주 황남대총의 무덤을 보라. 대부분 금은의 귀금속으로 세공했다. 물론 스키타이계통의 그리스장인이 한 것보다는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형태의 것이지만 그 취향은 완벽하다. 그리고 순장은 가장 결정적인 증거다. 신라인들이 이 시기 남하하기 이전까지는 순장이란 풍속이 우리 부여족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현재 경상도지방에서만은 유독 순장묘가 적지않게 나타난다. 단 그 규모는 흉노선우의 기백 기천의 수준은 아니라 기껏해야 37명 정도 쯤이다. 한가지 부연하자면 어디까지나 흉노족이 정복에 의해서보다는 평화적으로 정착한 것이기에 순장의 규모가 적으로 이런 36명 순장은 이래적인 것이고 대부분은 순장자는 4-5명의 소규모고 그들의 가족 즉 흉노족에게 그쳤다. 이와 같이 무자비한 관습을 토착민에게는 강요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이저은 흉노족이 많이 소심해 졌고 부여족의 권위에 의해 순화되었음을 보여준다. ZDF 한스 씨에 의하면 그들의 세계관이 17개의 층위로 세상을 설명하였다는데 신라에는 또한 17관등이 있었다. 이는 마치 한국의 수두교이 5행사상에 의거 부여고구려가 5부를 세움과 유사한 것이 아닌까 한다. 역사학계에 이와 관련됨 망설이 이러한 경주일대의 유목문화가 "부여"에서 왔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는 「삼국지 위지:부여조」에 순장이 언급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에서 민족적 순혈성을 강조하는 무리들이 지어낸 망설이며 그 계통상 신라 유물은 부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훈 또는 흉노 경상도 일대의 흉노족의 차이를 들자면 무엇보다도 유목민으로 남아있는 민족과 정착을 시작한 민족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훈이나 흉노야 천막을 궁정으로 일정한 주거없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화한 유적집단임에 비해 경주 흉노족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마치 로마의 허락을 받고 로마경내에 둔전병으로 일하는 게르만족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당연히 그들은 토착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순장의 경우도 결국은 피지배민 보다는 자신들과 종교를 같이하는 흉노일족과 그들이 데려온 하인들에게만 행했기에 소규모와 했을 것이다. 신라의 화랑이 무엇인가? 단재는 이를 게르만 치하의 중세의 기사단에 비한 바가 있는 바 흉노족이 신라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신라 김씨왕족과 흉노,훈의 차이는 결국은 정착의 적응과정에 있느냐 아니면 야만유목을 계속하는가에 있음을 알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처한 여건의 차이 때문에 신라 김씨는 흉노나 훈보다는 오히려 로마경내의 게르만족과 오히려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것일 뿐, 흉노와 훈 신라왕족의 기원이 다르다 함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여(余)의 생각으로 게르만적인 요소가 이들에게 나타남은 아마도 흉노족 자체가 서방에서 게르만족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라의 화랑도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이것이 흉노족의 전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가령, 흉노족의 전술은 마치 게릴라전술처럼 궤도를 사용해 적을 유인하는 것인데 신라의 화랑은 "임전무퇴"라 하여 물러서는 것을 모욕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러한 아들 원술랑을 부끄러이 여겨 내쫓은 것은 너무나 유명한데 이는 흉노족같은 야비한 족속에게는 찾을 수 없는 성질이다. 이러한 용맹은 게르만족이 주로 숭상하는 바이라 아마도 신라의 흉노족이 서방과 관련이 깊었던 족이어서 그 접촉하던 게르만족적 요소가 자연 스며들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하나의 민족성이란 무형적 요소로 추정을 해 보는 것이지만 "임전무퇴나 사군이충"이란 말은 역시 이들 흉노족이 게르만족과 상당히 관련이 깊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화랑의 주축은 이러한 정신으로 재래 고구려의 선비제도에 이런 점을 개선한 것이 아닐까한다. 물적 근거가 빈약한 주장일지나 화랑을 구성한 정신만은 그러한 면이 강하다. 적어도 흉노족이 상당한 규모의 게르만 용병을 당시 인솔해 왔던지 또는 훈족의 서방원정에 참여하다 신라에 돌아온 자들 중에 게르만족 부대와 섞여 종사했던 자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낼 볼께요.
흉노(匈奴)라는 명칭은 중국 중심의 사관을 바탕으로 중국민족을 우위에 두기 위해 흉노의 ‘훈’음에 노비를 의미하는 ‘노’자를 붙여 이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한 기마전술로 유럽을 제패한 훈과 흉노의 발음이 비슷할 뿐 만 아니라 실제로 같은 집단이었다는 학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흉노는 그 집단 안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 살아있기 때문에 ‘족’을 넘어 하나의 제국을 건설한 정치적 연합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서양에 등장한 훈족을 서쪽에 있던 흉노가 이동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의문이 풀린다. 훈과 흉노는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범주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초원의 대제국을 형성한 흉노와 북방 유목민족들. 이들이 잔인하고 약탈을 일삼던 야만족이라는 것은 중국적 관점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뿌리의식을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까려고 만든게 아니라 오히려 신라띄우려고 만든 프로임 씨바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