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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만식 대통령 구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 그냥 역사의 내용들..
Korea, Republic of 돌통 0 293 2019-09-23 09:44:46

이 글을 올리기 전 에  혹시 하는 마음때문에 글을 올릴까 말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은  탈북자 분들의 김일성과 관련해서 매우 민감하고 반감이 높아서 이다.


물론 이해되고 다들 아시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왜냐하면 탈북자 분들이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해서이다.


지금 올리려는 이 글은 먼저 이미 1편을 올렸고 이어서 2편을 올리는 것이다.  제목의 글이 조금 틀리지만 (비록 )~~~ 이 2편이다.

물론 1편은 이 사이트에 얼마전에 올렸다.


이어서 올릴껄 중지하려다가  나는 생각을 바꿨다.


왜?  이 글들은  김씨독재자의 어떤 우상화나 가상적인거나,그의 우상화를 선전 알리는 것등과는 전혀 무관한 그냥 그대로 실화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는 나라의 생기는 과정의 글..   바로 그냥 한나라의 탄생 배경과 탄생과정 그리고 그것들의 인물들.세력들, 즉 그냥 역사이며 어떤 한쪽으로 편협되고 편향되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글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거짓이나 우상화 좋은점만 나열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또한 이게 가능한게 그때의 일들이 시간이 오래되고 소련붕괴,  중국의 개혁개방등 으로  충분한 객관적인 내용들 증거자료들 이밖의 관련있는 내용 영상등이 쏟아져 나오고  충분히 연구조사 됐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 했을 거라고 믿는다.



소,조만식 대통령 구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 그냥 역사의 내용들..         참고로 "고당" 이라는 뜻은  조만식의 "호" 이다.




◎45년 10월 “고당 제거” 정보입수… 김일성 불러 호통/소 정치장교/“찬탁” 설득하면서 제의/김은 군사책임자 내정


여기서 소  라는 글자는 말그대로 소련을 줄인 말이다.



조만식에 대한 소련측의 관심은 특별했다. 그것은 당시 고당의 위상이 그러한 탓이기도 했지만 소련측은 그들의 의도를 명확히 내비치지 않으면서 여러 각도로 그들의 이해와 관련지어 북한을 맡길 장래의 지도자들을 저울질하고 있었다고도 보인다.



민족진영 인사들에게 가해졌던 테러와 암살의 위협이 고당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 군정측이 오히려 고당을 비호한다. 마침내 45년말 신탁통치 문제가 거세게 제기됐을때 소련은 「조만식 대통령·김일성 군부책임자」안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고당의 거절로 소련이 민족진영인사를 내세우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때까지는 적어도 소련군은 고당에게 우호적이었다.



메크레르씨는 해방직후 고당에 대한 공산진영의 테러계획과 이를 소련군이 저지한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다.



『1945년 10월1일부터 4일사이 어느날 오후 3시쯤으로 기억합니다. 조만식이 인민위원회앞에서 일단의 청년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들의 「특수 가옥」에 구금됐다는 정보가 입수됐지요.』



당시 북한의 상황으로는 이같은 소문이 평양시내에 알려지면 군중들이 벌떼같이 몰려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몰고올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 책임은 메크레르 중좌를 비롯,고위장교들이 져야함은 물론이었다.



메크레르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며칠전 나는 김일센 주위에서 「조만식을 없애 버리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지요. 김일센을 불렀지요. 「당신 지금 정신이 있소. 조만식을 제거할 경우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헛된 수작을 부리는 거요」라면서 김일센을 몰아붙였지요. 김일센은 금시초문이라고 펄쩍 뛰었어요.



나는 그 길로 부하 4명을 대동하고 김일센 부하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감옥」(그는 이렇게 표현했으나 다른 증언자들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특수가옥」일 것이라고 보고있음)을 찾아갔지요.』



그는 조만식이 있었던 특수가옥의 상황을 상세히 기억했다.



『조만식이 일단의 청년들(이름은 하나도 기억 못함) 사이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조만식에게 폭언이나 폭행은 없었지만 만약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분위기였어요.



조만식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젊은이들이 잠시 조용한 곳에서 시국과 민족장래에 대해 얘기를 하자길래 그냥 따라 왔습니다」고 말하더군요.』



메크레르씨는 다행히 조만식은 이들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여기까지 데려왔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조만식과 함께 사령부로 돌아와 김일센을 불러 놓은 자리에서 조만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뒤 김일센에게 오해가 없도록 사과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조만식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너무 과민하지 마십시오」라며 큰 지도자다운 자세를 보이더군요. 이 사건이후 조만식은 나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줬습니다.』



당시 고당의 주위에서 개인비서격으로 일하다 47년 5월 월남한 박재창씨(77·고당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는 메크레르씨가 공개하는 이같은 비사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선생께서 워낙 과묵하셔서 어지간한 일은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당시 소련군정의 막후 실력자였던 정치장교 메크레르씨의 회고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어지러웠던 평양의 상황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조만식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많이 나돌기도 했지요. 선생께서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고당과 김일성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좋았다.



초창기 북한공산당 창설에 관여했던 서봉규씨(70·가명·그는 해외로 망명한 고위 노동당원으로 신분을 아직 노출시킬 수 없음)는 『고당이 김일성 환영대회도 잘해주었다』고 증언한다.



『환영사는 고당이 직접 만들거나 김일성진영에서 준비해준 것을 그대로 읽기도 했어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에서 김일성의 가족연을 베풀어줬는데 그것도 고당이 발의했었지요.』



북에서는 김일성이 평양군중대회에 나타나기 전날인 10월13일 서북5도 열성자비밀대회에서 「새조선건설과 통일전략」에 대해 연설했다(김일성선집 1권)고 해서 이미 김일성이 지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막후정치 설계자로서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정치위원 스티코프대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던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씨(86·당시 소장)는 그것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북한정권 설립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그후 수차례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환대를 받기도 했던 레베데프 소장은 모스크바의 비루소프거리 그의 아파트에서 불편한 몸을 끌고 증언에 응해 주었다.  (이때가 1991년 이라는걸 잊지 않으시길 혹시 혼동하실까봐.!!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에서 아직은 공산당원을 정권전면에 절대 부상시키지 말고 정권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또는 민주주의자를 내세우라는 지시가 계속 떨어졌습니다.



때문에 치스차코프 총사령관을 비롯,로마넨코장군·이그나치프 대좌·메크레르 중좌 그리고 김일성 등이 수차례 조만식을 찾아가거나 사령부로 불러 「후견제」(신탁통치제)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지요.』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이어진다.



『해방 10일이 지난 1945년 8월25일 소 25군 총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함흥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어요.



나는 3일뒤인 28일 평양에 들어왔는데 치스차코프가 내게 조만식 얘기를 들려줬어요.



◎고당 소군에 “점령인가 해방인가”/고당,김일성위해 연회 베풀고/“왜 소군과 같이오나” 꾸짖기도



치스차코프가 도착한 이튿날인 26일 조만식이 소련어를 잘하는 박정애를 대동하고 치스차코프 사령관을 찾아왔더랍니다(박정애는 해방전 사회주의 여성노동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수감중 해방과 함께 출감한 인물).


조만식이 찾아와 「소련군은 해방군인가,아니면 점령군인가」라고 묻더라는거지요. 치스차코프 대장이 「소련군이 온 목적은 조선해방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순수군인이니 정치적인 문제는 2일후 정치전문가인 레베데프 소장이 오면 그에게 물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내가 평양에 도착한 하루뒤인 29일 역시 조만식이 박정애와 승리양조장 주인 최아립을 대동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해방직후 평양의 정치·경제·사회상황 등을 상세히 설명하더군요. 그리고는 소련군이 영토확장을 위한 점령군이 아니라면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도 이점을 굳게 약속했지요. 그후 조만식과 나는 10월7일,13일,14일 등 여러차례 만나 건국문제 등을 깊이 있게 협의했습니다.』


그는 『조만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면서 『스탈린 정부로부터 김일센을 북한의 지도자로 추대하라는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0월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설치,그리고 이튿날인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12월17∼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등을 통해 김일센이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고 말했다.


레베데프의 적극적인 지원속에 김일성은 12월17∼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일약 책임비서가 돼 사실상 북한공산당의 1인자로 부상한다. 그렇지만 김일성은 아직 북한의 지도자로 지목된 상황은 아니었다.


레베데프 장군은 김일성이 당지도자로 지목된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 공산당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추천했습니다. 결코 소련 군대가 추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한낱 집행자였을뿐 자세한 내막은 스티코프 장군이 잘 알고 있어요.』

김일성도 소군정의 요청을 받아 조만식에게 민족진영을 결집해 정당을 결성(45년 11월3일 조선민주당)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당은 김일성이 소련군정의 군인들과 함께 오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서봉규씨의 증언­.


『고당은 김일성이 소련군인들과 함께오면 「김장군. 왜 노랭이들 하고 같이 와요. 나는 노린내가 싫으니 데려가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그 다음엔 최용건을 데리고 갔지요.』


이런 분위기속에서 소련군정은 신탁통치문제가 등장하자 한때 비록 「소군정에 협조하면」이란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조만식을 북한의 초대 대통령에,김일성을 문부책임자인 민족보위상에 내정하기도 했었다고 레베데프씨는 증언하고 있다.


소 군정의 고위책임자가 조만식을 초대대통령에 내정하고 이를 그에게 통보했었다고 직접 밝힌 것은 처음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후견제가 결정된 직후인 1945년 12월30일 또는 31일 밤으로 기억합니다.


소련군 25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장군이 조만식을 찾아가 신탁통치만 찬성하면 그를 북한의 초대 대통령에,그리고 김일성을 군부책임자인 민족보위상에 각각 추대하기로 했다고 통보했지요.』


조선중앙통신사 주필등을 역임하다 59년 월남했던 한재덕씨(사망)는 그의 증언 「김일성을 고발한다」에서 로마넨코 민정사령관과 김일성 등이 신탁통치문제로 조만식을 찾아가 조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김일성은 수상이나 군부책임을 맡도록 하겠다」는 유혹을 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펜실베이니아대·정치학)도 자신들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로마넨코 장군이 만약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수락한다면 초대 대통령에 지명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메크레르씨도 레베데프장군과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다.


『지도부에서 줄곧 조만식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탁통치를 놓고 우리와 결별선언을 했지요.


지도부는 정권초기에는 원로를 앞세워야 한다는 당
방침때문에 조만식대신 김주봉을 원로로 추대했지요. 그러나 김주봉은 인민들의 신망이 조만식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지금까지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공산당과도 되도록이면 심한 충돌을 피하고,타협할 수 있는데까지 타협해 왔던 고당이 반탁투쟁으로 고려호텔에 감금된채 사회와의 연락은 일체 단절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제 김일성·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46년 2월 김일성의 지도권이 확립되기까지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나름의 숱한 변화요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레베데프는 말했다. 『북한의 역사는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소련군의 진주에서부터 김일성이 최종 선택되어 김일성 정권이 탄생되기까지 혁명과 독립의 열정속에 소련군을 낀 권력의 암투과정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특별취재반

****** 이상 분들 생략..



◎비사 털어놓은 소 레베데프 소장/해방직후 정치사령관으로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담당/두만강다리서 김일성과 국경선 결정




해방후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 장성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86)은 예편후 소련군 고위장성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는 모스크바시내 비루소프 원수거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1주일여동안의 우여곡절끝에 한국기자로는 처음으로 지난 6월15일 그의 아파트에서 단독으로 만나 5시간여동안 북한 정권수립 초기의 비사들을 들었다. 86세의 노인으로 최근 기력이 크게 떨어져 바깥출입도 삼가는 그는 인터뷰도중 몇차례 쉬어야 했다.


1945년 8월9일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소 25군 전투병력과 함께 두만강 국경지역을 넘어 평양에 입성한 그는 치스차코프 총사령관과 연해주군관구군사회의 정치위원 스티코프 대장 밑에서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등과 함께 3년4개월여동안 평양에 머무르면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948년 12월 귀국했었다.


그는 외형상 소장 계급장을 단 군인이었지만 사실상 노련한 소련공산당의 정치인이었다.


『48년 김일센과 함께 기차를 타고 38선일대를 시찰했던 일과 같은해 겨울 소련군 철수때 두만강다리 중간지점에서 소련과 북한의 국경선을 그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레베데프장군은 그동안 다섯차례 평양을 방문했었고 그때마다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박헌영등 많은 공산주의 동료들을 죽이거나 숙청한 것은 김주석의 가장 큰 실정중 하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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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지금도 박헌영이 미제간첩이 아니고 당대의 탁월한 공산주의 이론을 갖춘 공산당원이라고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귀국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62년.

김주석이 치스차코프 대장과 함께 보은형식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후 소련과 외교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뜸했다가 70년대 두차례,그리고 80년 한차례,85년 4월19일이 마지막 초청이었다.


『김주석이 첫 초청과 마지막 초청 두차례 밖에 나를 만나 주지 않았던 것은 빨찌산부대가 조선해방에 참여한 것으로 역사를 왜곡한 사실을 숨기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만났을때 융숭한 대접과 함께 집권 초반기 소련의 좋은 정책과 개인적인 친분 등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한마디를 하더군요.』


자신들이 펼쳤던 소련군정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 레베데프장군은 김정일이 집권하면 북한은 많은 변화가 뒤따를 것이라며 절대 남북전쟁이 없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  제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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