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이 여기 오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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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그 분이 여기 오셨다. 실존주의 2 - 그 분이 여기 오셨다. 어느 랍비 분의 해설에 의하면, 안식일 개념은 그저 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쉬고 있을 때도 계속 생각이든, 공상이든, 손짓이든, 무어든 해야 하는데, 진정한 안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던 6 일 동안에는 거듭 거듭 무언가를 하는, doing의 상태, 그리해서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거듭 낳고 낳고 하는 상태, 변화하는 상태이지만, 제 7일에는 하지 않고 대신 하여놓은 것을 보고 즐기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표현하기를, becoming; 되어지다; 가 아닌 being;있음의 상태 그대로를 수용하고 누리는 것, 영원히 누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주 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보고 즐기며 영원히 누리는, 존재함 그대로를 누리는 상태인데, 이를 천국에 올라가기 전에 미리 연습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노상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거기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천국을 미리 누리라는 뜻이시라는 것입니다. 존재한다 는 이 관념 자체를 연구하기 시작한지는 인간 역사에서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대에 와서 실존철학이라 하여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무언가 하다 는 행동에 관심이 많았다면, 현대에는 존재에의 관심이 많아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존재에의 관심이 많아진 결과,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까지 발전한 것은 좋았지만, 심지어, 인간의 목숨이나 동물, 짐승의 목숨, 곤충의 목숨이 똑같이 귀중하다는 사이비스런 인식, 또, 범죄자들의 범죄에의 이유까지 이유 있다며 수긍하는 태도들의 만연 현상 같은 것은 그 부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 그 자체가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 라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제기합니다. 이는 데니스 프라거 씨가 말하기도 한 것인데 어떤 동물이 아름답다 든지 그들이 생존경쟁하며 고통을 느낀다든지 하는 이런저런 의미 부여 자체가 바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기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빠진다면, 거기 동물들이 그저 생존경쟁하고 공룡들이 티라노사우루스가 벨롭시스터가 약육강식하는 그 현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송이 꽃이, 바다가 의미가 없이 그저 떠도는 무의미한 방황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꽃들이, 바다가, 새가, 날개가 의미가 있어지려면 거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 인간이 또는 하나님이 게시므로, 그들에게 의미가 있고 보기에 좋고 아름다와 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이 존재한다 라고 말하였을 때, 그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또는 부버가 말하듯, 나를 너로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삶은 유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빼어놓고 인간을 고독자 라는 이름으로 인간실존을 연구하게 되면,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절망에 이르는 병, 불치병이 될 수 뿐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무하니까. 그런 허무의 가장 극치가 바로, 얼어붙은 눈물이란 책에 나오는 공산당의 호송병들이 죄수가 죽었을 때 물자가 아깝다 하여 팬티 마저 벗기고 알몸으로 눈속에 밀어넣음으로써 매장을 마치는 것, 인간이란 물질을 처리하는 과정의 모습이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들의 행동을 바라볼 하나님이 없으므로 그 시체에게 아무 의미를 부여할 근거가 송두리째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시체에 대해 슬퍼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허무한 인간세계에, 마치 공룡의 세계에 인간이 내려가 쥬라기공원이라며 의미를 부여해주듯 -- 하나님께서 연약한 아기로 인간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는 이 사실 처럼, 인간실존을 생생하게 하여준 역사적 사건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 그는 와서 가난한 사람의 아이로 태어나 먹고 입고 일했고 웃었고 울었으며 피곤했고 주리기도 했으며 끝내는 자기가 가르친 제자에게 배신 당하고 은닢30냥에 팔려서 십자가에 살인자의 하나로 취급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 땅에 생존한 실존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생생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을 곁에서 직접 같이 나누고 체험한 제자들이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자 용기를 얻어 책으로 썼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며 그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실존방식의 전파인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크리스챤을 일컬어, 그리스도가 살듯이 살아가는 사람,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 정의내렸습니다. 그 기준에 맞추면 저는 또는 우리는 딱 사기꾼 같습니다. 주님을 빙자하여 그 분의 복을 훔치기만 하는. 그 본회퍼 목사가 옥중에서 남겨놓은 옥중서간집을 통해 말한, 그리스도의 살아가는 방식 곧, 그리스도의 존재하신 방식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챤들의 실존철학이며 실존하는 의미이며 방식입니다. 그 실존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시고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시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를 위해 저 천국에 우리 각자의 영원한 존재를 위한 집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없어지고 오로지 그 분 홀로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품에 안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실존과 더불음으로써 우리도 위대한 실존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한 찬양의 노래는 매일 매 순간 부를 지라도 다 못 부를 것이니, 그 이유가 당신께서 당신의 전존재를 우리를 위하여 바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니 계시면 우리의 실존이란, 캄캄한 밤이요, 절벽이요, 어둠이고, 절망 그 자체입니다. 먼지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영원한 희망이고 삶이며 생명이며 진리 그 자체이며 은총으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2006.12.28. 파아란 한은경. 제 글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믿는 분들의 후원이 아니면 제 글은 있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831401-01-150608 한은경 연락처: 016-280-5643 / paaranhansu@hanmail.net 파아란홈카페 http://cafe.daum.net/paaranhome 파아란홈블로그 http://blog.chosun.com/hansu000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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