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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주는 식권 한장, 북 가족 몫입니다"
데일리안 2011-02-07 10:34:05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 관리자 856 2011-02-07 13:16:59

설 특별기획-서민들은 말한다②-´희망의 망향가´ 탈북자 신길녀 씨>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설날 떡 나눠 먹는 그날 위해 오늘도 웃습니다"

“도강하기 전에, 아버지가 ‘중국가면 텃밭에 물이나 주게 고무호스 하나 보내다오. 혹 형편되면 TV 한 대 보내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렇게 말했는데, 고무호스 하나 못보내드린게 아직도 가슴에 남아서...”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눈에 끝내 눈물이 고였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애써 흘리지 않으려는 듯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눈물도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찌 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딴청을 피우는 양 돌린 시선의 끝에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정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실향(失鄕). 명사. 고향을 잃거나 빼앗김.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설, 대도시에 터를 잡은 자녀들을 만나러 나이든 부모들이 몸소 올라오기도 하고, 깊이 팬 주름만큼 너른 어버이와의 정을 나누러 자녀들이 내려가기도 한다. 연휴의 시작을 알리 듯 고속도로 상황은 실시간 검색어로 줄곧 오른다. 교통체증에 시달려도 넉넉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바로 ‘가족과 함께할 수 있음’ 때문일 터. 그러나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 그곳이 내 고향이라고 소리내어 말하기도 두려운 이들, 같은 하늘 아래 살아있다는 것에 애닮픈 사람들, 바로 탈북자들이다.

헌법상 불법단체, 그리고 연이은 도발과 3대 세습 등으로 북한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남한 사회의 싸늘한 시선은 탈북자들에게 고스란히 쏟아진다. 고향을 잃고 그리움도 가슴 속으로 삭혀야 하는 탈북자들에게 설은 ‘사치’일 뿐.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자와 마주앉은 탈북자 신길녀씨(가명·여·55)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연신 당부했다.

“단지 태어난 게 북한인데, 살려고 여기 온 건데, 사람들이 너무 다르게 본단 말입니다. 좌절하지 말고 밝게 살자, 그렇게 마음먹지만 종종 앞에서 무시하고 모멸감을 줄 때는 처음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런가보다 넘기지만 말입니다.”

신씨가 남한에 둥지를 튼 것은 2008년 여름. 해가 3번이 바뀌었고, 남한 사회에 적응도 했다. 그녀는 이따금 말이 빨라질 때를 빼면 흔히 생각하는 ‘북한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방 출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말씨와 생각도 ‘남한화’됐다.

그러나 신씨는 여전히 주변인이다. 직장에 출근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선 그녀에게 동료들이 들으란 듯이 말했다. “아니, 왜 탈북자들 다 받아줘서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느냐”고, “우리 세금을 축내는 게 탈북자 아니냐”고. 울컥, 했지만 묵묵히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대답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탓이다.

신씨는 “탈북자들이 직업교육을 받고 직장에 나가도 견디질 못한다. 북한에서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앞에서 욕을 하고, ‘탈북자들 다 먹이려면 우리가 힘들다’고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 응한 탈북자 신길녀씨(가명, 여, 55)는 "요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다"며 책을 보여줬다. 책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이거 따서 더 늙기 전에 우리 엄마 봉양 좀 했음 좋겠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데일리안


 

<scRIPT type=text/javascript> </scRIPT> ◇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 응한 탈북자 신길녀씨(가명, 여, 55)는 "요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다"며 책을 보여줬다. 책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이거 따서 더 늙기 전에 우리 엄마 봉양 좀 했음 좋겠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데일리안 

회식이나 각종 야유회, 송년회, 신년회 때에도 탈북자들은 자리를 채우는 역할에 그칠 때도 적지 않다. 어울려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고 흥을 돋우고 나누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습니다. 몇 년을 같이 일해도 마음이 멀단 말입니다. 자기 할 일(업무)이 정해져 있는데도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하고, 탈북자들이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사정을 아니까 ‘싼 값이 부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설 자리를 잃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탈북자를 고용하면 채용한 기업주에게 급여의 2분의 1을 최대 3년간 지원한다. 고용지원금인 셈이다. 그러나 “이를 악용하는 분들도 있다”고 신씨는 전했다. 고용지원금만 주는 회사도 있고, 조금 더 얹어주는 식으로 눈속임을 하는 회사도 있다는 것이다. “고용지원금을 주는 기간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쫓아내는 곳도 있다”고 운을 뗀 신씨는 “‘이래도 안 나가고 버티겠나’는 식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시킬 때도 있다. 그래도 나갈 수가 없다. 못 견디고 나가면 매달 분할해서 받는 정착지원금이 깎인다”고 말했다. 탈북자가 받는 정착지원금은 600만원.(1인 세대 기준) 과거 일시금으로 지원됐지만, 통째로 사기 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현재 단계별로 분할지금하고 있다.

신씨는 “나도 일이 있는데, 불러다 ‘그냥 이거나 하라’고 박스 정리만 시키는 건 차라리 낫다. 어떤 사람은 ‘뭘 그리 열심히 일하냐. 비교되니 하지 말라’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면서 “‘니가 북한에서 아무리 대단했어도 여기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안 짤린다’고 나이 어린 사람들이 으름장을 놀 때는 힘든 마음도 든다”고 털어놓았다.

신씨는 귀금속 관련 공장에서 일한다. 하루 14시간을 일해야 한 달에 100여만원 남짓한 돈을 받을 수 있다. 귀가 멍멍한 소음 속에서 일하다 보니 청력이 떨어지고, 화학약품이 눈에 튀어 시력도 떨어졌다. 인터뷰 도중 신씨의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딸의 목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휴대전화 음향은 최대로 키워놓았다. 신씨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통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버스나 전철같은 곳에선 통화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고단한 삶을 살지만, 북한에서의 그녀의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교사는 교사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를 배치한다. 7~14세까지 사상교육이 확실히 돼야 한다는 교육정책으로 인해서다. 신씨 역시 그런 자부심으로 살았다.

“탈북자들은 맨몸으로 오니까 일자리 잡은 사람들은 버티려고 열심히 합니다. 안 그러면 ‘북한에서 와서 그러냐’ 소리 듣습니다. 그 소리 듣기 싫어서 북한에서 무슨 일 했든 잊고 적응하려고 합니다. 좋게 보는 사람들은 고맙지요,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직장에서의 무시는 일상생활에서도 이어진다. 6.25전쟁의 상흔이 여물지 않은 윗세대로 올라갈수록 정치적·사회적 편견으로 탈북자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씨도 지금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 입주하고 1여년간은 수근거림을 감당해야 했다. 6,70대 이상의 노인분들은 그녀의 집 문을 수시로 두드리고, 문이 열려 있을라치면 벌컥 들어와 훑어보고 나가곤 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신씨를 보고 “어디 가느냐” “뭐 하느냐”고 캐묻기도 했다.

“이쪽 분들이 보면 적성국에서 왔다 생각하니까 이해합니다. (다만) 이 사회에 내 자리가 없구나, 절감하는 게 그런 거지요. 탈북해서 잡힐까봐 공동묘지에서 숨어있기도 하고 ‘니네들은 죽여서 모래밭에 파묻어도 개도 안 찾는다’ 막말을 들어도 여기 오는 게 희망이었단 말입니다. 나를 차게 하니까, 자꾸 작아집니다.”

고단한 삶이지만 신씨가 그녀의 표현대로 ‘입술 깨물고’ 살아가는 이유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 때문이다. 신씨는 “기회만 되면 어머니에게 주려고 모아놨다”며 서랍 속을 보여줬다. 중고 휴대전화 3대가 보였다.

“통화할 수 있는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까, 보내도 목소리도 못 듣겠지만, 혹시 몰라서..”라고 말끝을 흐린 신씨는 “누가 휴대전화 바꾼다고 하면 그걸 달라고 해서 계속 모으게 된다. 이거라도 안 하면 안 될 거 같다”고 했다.

주말 밤, 답답하면 복도에 나가 거리를 본다고 신씨는 말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면서 ‘돌아갈 가족이 있으니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에 쳐다본다고 했다. 봄·가을에 기러기를 볼 땐 고향 함경도가 떠오르고, ‘남쪽 갔던 제비가 왜 안오나 했더니’라는 가사의 북한 노래도 생각난다. “가족들과 살아야지, 나라를 배신하지 마라”고 탈북하는 딸을 붙잡던 아버지의 목소리도 귓가에 울린다. 돌이켜보면 그리운 것투성인데, 남은 가족들이 겪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미안함 외에 다른 마음은 들지 않는다.

“먹을 게 없으니 옥수수 국수를 많이 먹습니다. 여기는 없습니다. 맛있지도 그 맛이 그립습니다. 가족들은 그것도 없어 못 먹겠다, 생각이 들어서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도 죄스러워요.”

신씨는 직장에서 주는 식권을 하루에 1장씩 모아오고 있다. 북한의 가족 몫이다. 전하진 못해도 마음의 위안이 된다.

신씨는 “11년 전 탈북할 땐 이렇게 영영 떨어질 줄 몰랐다. 열심히 해서 가족들을 데려오자 했지만 (북중) 국경 감시가 심해져 탈북브로커 비용도 오르고, 소식도 알 수 없어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같은 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폐결핵으로 각혈 후 쓰러진 것이 1998년. 감기를 방치해 둔 게 화근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였던 때라 병원은 제 기능을 못하던 때였다. 환자의 약은 그 가족들이 사다 날라야 했다. 결국 사직을 하고 신씨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거나 생선을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을 완치됐지만 생활은 곤궁했다.


?◇ 가족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신길녀씨. 사진 앞에 놓인 휴대전화는 신씨가 친정 어머니에게 보내려 모은 중고 휴대전화들이다. 신씨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고 말했다. ⓒ데일리안

신씨는 “국경지대에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사람들을 따라 나섰지만, 중국 인신매매단에 속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도망쳐서 집에 돌아왔지만, 다시 강을 건너는 것 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다. 두 딸이 먹지 못해 “어지럽다”고 기운없는 얼굴로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아진 탓이다.

친정 가족들은 근심어린 얼굴로 만류했지만, 자식들이 생을 놓는 게 아닌가 노심초사하던 걸 아는 남편은 신씨를 막지 않았다.

“다들 ‘이상적인 부부’라 했습니다. 13년을 살면서 큰 소리로 다툰 적도 없었습니다. 성격좋고 순하고 진실된 사람이었더랬어요, 남편은. 이리 되려고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남편 이야기를 하는 신씨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흔치 않던 연애결혼을 한 신씨 부부는 성격이 잘 맞았다고 했다. 온 가족이 손잡고 노래 부르며 출·퇴근하는 모습은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학교 수리를 하기 위해 모든 교사들이 동원돼 각자 자기 교실을 책임지고 수리할라치면 남편은 자신의 몫을 다하고 신씨의 교실로 와서 일했다.

다른 교사들이 “싸우지 않으면 둘 중 하나 먼저 죽는다”고 시샘섞인 야유를 보내도 남편은 ‘내 아내 힘든데 내가 도와야지’라고 대꾸했다. 책걸상을 나르고 못을 박으면서도 같이 하니 흥이 났었다. 매일 오후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와 등불 아래서 부부는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은가’에 대해 아야기했다. 소소한 일상,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 된 일상이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은 거라는 걸 느낍니다. 아이들도 남편을 그리워 하고...당장이라도 데려오고 싶은데 살아있는지 어떤지 몰라 마음이 답답합니다.”

친정 어머니도 부쩍 생각이 난다고 신씨는 말했다. 신씨가 탈북하고 2달 뒤 아버지는 고단한 삶의 끈을 놓았다. “중국가면 고무호스나 하나 보내다오. 형편되면 TV라는 것도 보고싶다”던 아버지의 소원은 들어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1년 전 풍문으로 ‘끼니도 챙기지 못할 정도’라고 들은 게 끝이라 더 마음이 쓰인다. “동네어귀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문 열고 나가 너 기다린다”던 친정 어머니에게 밥 한끼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신씨의 방 화장대 위엔 친정 부모님과 남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장식돼있다. 이것도 벌써 십여년 전 일이다. 북한에 있을 때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체제 특성상 친정에 간 게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 최근 사진이 있을리 없다. 신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간다며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해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찍지 말라”고 연신 말했다. 탈북자 가족들이 소리소문없이 어딘가로 사라지던 것을 봤기 때문이다. 신씨도 사진을 찍을 때면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이 나가지 않는다고 말해도 손사레를 치며 한사코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등은 경직돼있었다.

불안과 생활의 고단함으로 시달릴 때면 고향 노래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깜짝 놀라 입을 닫는다. 신씨는 “고향 노래라도 부르면 나을까 싶은데,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상한 시선으로 볼까 두려워서다.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 가족이 보고싶은 마음이 쌓여 한때 우울증이 온 적도 있다. 사람들이 무섭고 손가락질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산가족처럼 공개적으로 찾을 수 없어 상봉장면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자초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리움은 눌러지지 않는다.

신씨는 “그래도 매일 아침 밝게 웃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받아준 이 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열심히 살다보면 가족들을 데려올 날도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찬 시선을 느낄 때면 그래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울고 힘들었지만, 좋은 날 오겠지요. 좌절하지 말고 밝게 살면 다 잘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생겼고, 여기도 나만 잘 사면 다를 게 없다 그렇게 마음 먹습니다. 가족들을 데려오는 탈북자들도 여럿 봤고, 나도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족들과 한 상에서 설날 떡을 나눠먹는 것, 그거 마지막 희망입니다.”[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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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 ip1 2011-02-08 14:51:34
    이글 보면서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새터민들이 들어오면 자신의 일자리가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안좋아하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새터민을 좋아하고 돕고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다는걸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남한 토박이고 북한에 아는사람도 없지만...
    어릴때부터 풍족하게 자라왔고 부모님이 원하는거 다 해주셔서 고생해본 기억이 없는데...
    이런글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원하지도 않게 북한에 태어나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데 남한에서도 이렇게 고생할줄이야...하지만 남한, 자본주의에서 한가지만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정말 열심히 땀흘려 일한다면 그 몫은 분명 자신의 것입니다.
    게다가 자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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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자 ip2 2011-02-08 22:20:33
    가끔씩 이 사이트에 들어오면 지나온 세월이 돌이켜져 가슴이 뭉클하고 마음이 짠해옴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함께 모든 걸 참고 인내하며 열심히 사느라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남북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아요. 앞을 내다보며 희망을 안고 살아요~~~~~잘 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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