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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REPUBLIC OF KOREA 푸른 바다 4 521 2006-08-27 05:04:33
1.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작가이시다.
언제나 서재에 앉아 밤을 새워가며 글을쓰시던 정열적이 분이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귓가에 내려앉았던 새하얀 흰서리였다.
그때는 무심코 보아왔던 아버지의 그 흰머리카락이 지금은 이불효한 아들때문에 생기신 마음의 상처처럼 여겨져 가슴이 미여져오군한다..
늘 독하게 살아오셨던 아버지!
자식들의 앞길에 그늘이 질가봐 남보다 10배 20배 더노력하시며 사셨던 훌륭한 아버지이셨다.
지금도 꺼칠한 수염을 야들야들한 내볼에 비비시면서 아프다고 자지러지던 내모습을 보시며 행복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수가없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의 어느 깊은 산골이였다.
가도가도 끝이없는 산, 넘어도넘어도 끝이안보이는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시작되었고 생사를 건 인생의 길이 이어져갔다.
원래 우리 가문의 조상들은 경상도 지방의 양반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것이 조선시대때 어떤죄를 범해 그산골로 추방을 간것이라 들었었다.
거기에 해방직후 밭아닌 화전밭 5정보를 가졌었다는 이유로 지주로몰려 모든땅을 몰수당하고 정치적인 탄압의 가문으로 전락되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정당시 가장 알아주던 음악학원을 고학으로 졸업하셨고 6.25내란당시에도 군악단이라는 편안하고 안전한곳에서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실수있었다.
가난했던 화전농으로부터 일약 지주로의 변화와 그로인한 정치적 후과는 치명적이여서 할아버지의 그 금쪽같던 재능도 빛을 볼수가없었으며 소학교 음악교사의 자리마저 지켜내실수가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생동안 그 훌륭했던 음악적 재능도 피워보지못하시고 벌목부로 생을 마치셨다.
그러한 가정적배경과 우물같은 산골마을의 생활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감옥이었고 반항아적 기질을 다분히 가지게 만든 결과로 되었다.
아버지는 그산골마을에서 그누구도 어쩔수없는 문제아로 자라나셨다.
지금도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참 어릴적 할아버지 할머니속 꽤나 태우셨겠다 하고 피식 웃던 그때가 기억난다..
비뚤어진 학생모에 앞자락을 헤쳐놓고 친구들과 찍은사진은 아버지의 모습은 그어딜봐도 문제아였고 반항아였다.
너무도 애들을 패주고 친구들을 몰고다니며 거친행동을 하여 아버지는 군대에도 나가실수가 없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자기비판을 수백번도 넘게 하셨다고한다.
하긴 그후에 아버지가 군대에 가게 되셨을때 5명의 고모분과 삼촌분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과히 아버지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버지가 21살에 로동당원이되여 고향에 편지를 썼을때 그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없었다고한다.
하기야 가족도 못믿을 그런 상상못할 일이니 딴사람들이야 더말해무엇하랴..
그편지가 사실임을 아시고 몇칠밤 베게밑에 드시고 보고또보셨다는 할머니.!
그토록 반항적인 삶을 사셨던 아버지의 인생관이 과연 어떻게 바뀌셨을까?..
아버지는 자신을 외면했던 사회에대한 반항을 그누구보다도 뛰어난 생활과 능력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던것이다.
가정환경이좋다고 편안히 거침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반항은 무서운노력으로 표출되었고 그로인하여 지금과같은 사회적지위와 무시할수없는 재능을 가지신것이였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 무서운 노력과 열정이 너무도 암담했던 자신의 처지와 무지막지한 사회에대한 분노와 반항의 표현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는 그리 강한 분이 못되셨다.
너무도 감성적이셨고 남을 괴롭힐줄 모르는 착하고 맘이쁘신 분이였다.
술을 너무도 좋아하셔서 취하시면 꼭부르군하시던 (고향의 봄) 동요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강한듯하시면서 감성적이셨고 남자인듯 보이시다가도 여성스러움이 다분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자식과 가정 아내를 많이 사랑하셨던 아버지!
늘 한가정의 가장으로써 목숨건 사투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지금도 북한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2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수십년동안 한번도 어머니밖의 딴여인을 가까이한적이 없으셨으며 늘 (네엄마가 최고고 네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젤맛있다)며 사셨었다.
그러나 두분도 이따금씩 싸울실때가있었으니 그 힘든인생살이에 어찌 다툼도 없이 살수가 있으랴..
그런데 내가 어릴적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어머니의 행동이있었다.
아버지가 농담으로(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 네엄마하고 살지 지금이라면 안산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면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늘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군 하셨다.
그 이상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나이가들고 나의 앞날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사춘기때에야 비로써 이해할수가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한것은 두분에게 있어서 거의 자살행위였다.
지주아닌 지주의 자손이셨던 아버지와 종파아닌 종파의 딸이었던 어머니!
두분의 결합은 결국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그런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고한다.
그렇지않아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어떻게 없애버릴 것인가를 궁리하고 주시하는 가정들이였는데 그 사회의 최악의 환경을 가진 두분의 결혼은 사실 무모했었다.
돈에의하여 사랑도 판가름이난다는 자본주의라지만 가정의 출신 배경때문에 생사의 판가름길에서 앞날을 결정해야하는 이런나라,이런 땅이 과연 또어디있었을가?.
나의 어머니는 당시 북한최고의 예술단에서 명성있는 피아니스트이셨고 엘리트 출신의 대표적인 자식이였다.
당시 북한정부에서 고위인물이셨던 할아버지가 종파의 억울한 루명을 쓰고 처형당하신후 그처럼 당당하고 세도높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되여 어머니의 인생도 망쳐버리고말았다.
사춘기때 할아버지의 그런 슬픈일만없었어도 내인생은 이렇게 꼬이지않았을걸 하는 철없는 상상을 해보던 나였었다.
그때 예술단에서 김정일이 직접관람하는 공연을 준비하고있었는데 불행이도 어머니는 그명단에서 제외되고말았다.
결코 실력이나 외모가 모자란것이 아니라 그 같지도 않은 가정환경의 원인이였다.
그토록 노력하고 자신의 처지를 바꿔보려고 노력하셨던 어머니셨건만 하늘은 어머니를 외면하였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한 삶을 사시기시작했다.
이때 불현듯 나타난것이 아버지이셨고 두분은 결국 북한사회의 법칙상 허용되지않는 위험한 삶을 이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분은 후회하지않으셨고 자식들이 생긴 이후에도 언제나 가정의 평화와 앞날을 위해 악을 품고 사셨다.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게 한 큰원인의 하나로도 되었다.
자신의 편안한 인생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않으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관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관을 나의 사랑관으로 삼고 살고있다.

3 아버지와 나.

아버지는 어릴적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다.
늘 자전거뒤에 태우시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셨고 퇴근시간이면 꼭 유치원에서 나를 데리로 먼곳에서 오시군 하셨다.
자전거 뒤에서 유치원에서 배운노래를 불러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그젊으셨던 모습이 너무도 아련하다..
그후 성장하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적이 없었고 늘 아버지의 기대의 걸맞게 착하고 열심히 살았었다.
그러나 반항적 기질은 유전인듯..
내인생길에대하여 생각을 해보고 세계관의 형성이 급속히 이루어지던 사춘기때부터 나는 나의 앞길에 회의를 가지기시작했다.
사실 그토록 험하고 위험한 인생길을 가진 사람도 흔치가 않았던것이다.
삼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생사도 모르고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마어마한 가정배경은 충분히 나의 인생을 휘젓기에 충분했었다.
이런 불투명한 내인생, 내앞날에 나는 겁이났고 성격에 없던 반항적 기질을 만들어놓았다.
고4학년(남한은(고1) 때부터 나는 모든걸 거의 포기했었다.
학업이나 예능 지어는 아버지의 말씀도 거부하기에 이루렀다.
나는 아버지의 어릴적 모습을 베껴놓은듯한 삶을 살기시작했다.
고 4학년부터 나는 책가방이라는것을 들고다니지않았다.
당시에 만능 노트라는것이 유행이였는데 참으로 간편하고 엽기적이였다.
사실 이름만 어마어마할뿐 한권의 노트에 불과했는데 그공책한권을 교복뒤주머니에 끼어넣고 윗주머니엔 볼펜하나를 넣고 달랑 학교에 가는것이였다.
수학시간에는 거기에 수학을 적고 영어시간에는 영어를 적고 즉 그 무지많았던 모든과목을 그책한권으로 해결하는 기발한 생각이였다.
그때문에 선생님에게 매도엄청맞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나의 모습에 아버지는 분개하셨고 그후 내가 대학시험에서 끝내 떨어졌을때에는 거의 폭발수준에 이루렀었다.
물론 아무리 돈이 대학가를 지배하고 돈의 유무로 평가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실력은 결코 무시할수없다고 생각하신것이 아버지의 소박하고 고지식한 생각이셨다.(물론 내시험성적은 참혹했다)
또 아버지의 인생은 엄청난 자기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이루어지고 또 그로인하여 지켜온 가정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였던것이다.
그후로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첨예화 되였다.
자식과 부모사이를 이렇게 표현하는것이 상당히 적절치못하고 스스로 성숙치못한 인간됨을 증명하는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말보다 더적절한 단어를 찿아낼수가없다.
그후 아버지는 내가 군대에 나가 새삶을 사실것을 바라셨고 권고도 하셨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10년동안 청춘을 허비한다는 그이유하나만으로도 군에 갈맘이 없었으며 어떻하나 피하고싶었었다.
그로인한 아버지와 나와의 갈등역시 심각해지기시작했다.
20살이 된후로 부터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그토록 사랑했고 귀해했던 아들의 배신이라면 배신인 행동과 철없어보이는 행동에 아버지는 너무도 격분하셨고 나역시 나의 생각대로 살고싶은 욕구와 구세대적인? 아버지의 강요가 너무도 싫었던것이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모든행동과 권고가 모두 나를위해서 나를 사랑해서 하셨던 것임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으며 그토록 불효했던 그때의 나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고도 싶다.
지금도 소학교시절 외웠던 옛시인의 시구절이 생각나 너무도 죄스럽고 불효한 나의맘을 표현할수가없다.
(철이들어 부모님께 효도하려 했더니 이미 부모님은 안계시더라)
내가 더는 그곳에서 살수없는 상황에 까지 이루렀을때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이세상이 아버지에게 해준것이 무엇이있습니까?.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고생하며 사신 아버지에게 이세상이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데요?.
그 사회주의라는 듣기좋은 이름아래 얼마나많은 아픔과 얼마나 참기어려운 굴욕을 줬읍니까..
이제는 저마저 여기서 살수가 없는데 이땅이 무엇이좋은것이 있냐구요..
차라리 우리가족 모두가 떠납시다.)
나의 통곡같은 이말을 듣으며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한참을 하늘가를 바라보시며 한숨을 쉬시던 아버지.!
그순간 참혹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에와서 읽느라면 너무도 뼈아픈 고통에 가슴이 저린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동과는 달리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고 싸늘했다.
(그래 이세상이 너에게준것은 없다만 나에게는 많은것을 줬다.
나에게 가족을 줬고 자식을 줬으며 그가족을 지키기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줬지..
나는 나혼자몸이 아니다. 우리가족과 친척 형제들을 보호해야 하는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살아야하는 이유야.)
나는 아버지의 그말씀에 할말을 잃었고 결국 이머나먼길은 나홀로 떠나게 되였다.
아버지는 가족과 가문의 가장으로써 그모든것을 지키려고 그땅에 남으셨고 지금도 가늠할수없는 노력으로 그 가정을 지키고계신다.
이 불효한 아들이 그토록 속태우고 괴롭혔던 아버지는 결국 이아들을 이해하시려고 노력하셨고 그사랑으로 나를 떠밀어 이땅에 보내셨다..
나는 지금도 조금만더 아버지를 사랑했다면,조금만 더 아버지의 말씀을 잘들었다면 이렇게 가슴아프지 않을텐데.이렇게 가슴 찣어지지않을텐데 하는 생각에 잠못이룰때가 많다.
아버지의 생신날 술한잔 부어드리지못하고 인사한번 드릴수없는 지금의 현실과 지난날의 불효한 행동이 밟혀와 눈물을 흘리군한다.
혹시 이아들이 불행한 삶을 살지않을까..밤거리를 방황하며 살지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버지는 그 지옥의 땅에서도 나를 걱정하실것이다.
이아들이 잘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고계실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한가정의 눈물겨운 생존투쟁을 목격하면서 살아온 나는 이땅에서 부모님의 귀중함과 삶의 희망 불효스러웠던 나의모습을 한꺼번에 되찿았다.
부모님과 헤어져사는 모든사람들이 한번씩은 느낄수있는 그죄스러운 생각과 마음을, 또앞으로 다시만날날 어떻게해서나 효도하고싶은 맘을 나는 다시찿았다.
나는 여기서 나에대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느꼈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게되였다.
나는 이세상에서 나의 아버지를 제일 존경하고 사랑한다
다심하신 어머니의 사랑도 목마르지만 웅심깊은 아버지의 사랑 역시 귀중하고 소중하다.
북한에서 못다했던 그효도가 어떤것인지 나는 알고있으며 효도하며 살기위해 열심히 노력할것이다.
아버지가 바라셨던 훌륭하고 멋진 아들이되여 아버지앞에 큰절올릴때 그이상의 효도가 과연 그어디있을까..
아버지를 떳떳하게 뵐수있고 인사드릴수있게 나는 열심히 살것이다.
아버지의 바램,온가족의 바램.나와 비슷했던 북한의 수많은 가정들의 바램을 훌륭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풀어드릴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셨고 은인이셨다.
또 그어떤 바램도없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지켜오신 수호천사이셨다.
이 소나기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새벽 나는 창문을 활짝열고 소리쳐본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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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은 향기 2006-08-27 08:59:07
    <꼬마동생>의 가슴절절한 글 읽고 가요....
    동생의 글에서 나의 지난날을 읽는 것 같아 내 마음도 무척 어려오네요.
    부모님께 못 해드렸던 효도를 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모습으로 보답하세요.
    그러면 멀지만 가까운 그 곳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마음에도 시름이란 구름이 걷히실거예요. 새 사회에 도전하는 동생의 앞길이 잘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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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2006-08-27 15:04:31
    겨울가면 어김없이 새봄이 오듯이 이세상의 진리는 뒤바뀔수없는데 왜 저 내고향 북한은 거꾸로 돌아가는지????
    북한 사회만 빼고 다른 사회같았으면 바다님같은 엘리트 집안들이 한몫하겠건만 ,,,미쳐버린 김정일정권만 따르지 않으면 귀한 인재들을 가차 없이 깊이 깊이 묻어버리고 ,,
    ---아무튼 지금 우리가 할수 있는일은 각 개인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날까지 떳떳하게 최선을 다해 살수 박에 없는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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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문객 2006-08-27 19:20:03
    다음카페 한류열풍사랑에 님의 글이 올라가있는데 조회수가 3000 넘어가고 있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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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호 2006-08-28 02:15:49
    나보다 더 성숙된 네 모습을 볼때면 너무나도 스스로가 초라해지는구나...
    매일 본다고 같이 산다고 그래서 쑥스럽다고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한마디 전해드리지 못한 이 딸을 그래도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아직도 손 발이 부르트고 허리가 휘도록 뒷바라지 하시는데....
    오늘따라 가슴이 뭉클해져와...
    나도 이제 부모님을 위한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겠구나...

    엄마,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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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하늘 2006-08-28 10:40:00
    잘 읽었읍니다... 좋은 아버님 이셨내요... 가슴 아픔니다. 기억하세요 두가지를... 첫째는, 아버님의 마지막 말씀. 둘째는, 지금 아버님이 옆에 계시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를...

    그리고, 미호님 재가 생각할땐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어도 아마 부모님은 아셨을 겁니다 그마음을요... 힘내새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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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호 2006-08-28 16:27:47
    파란하늘님 감사합니다..
    늘 마음속에만 담아왔지 표현을 잘못하는 딸인지라 ^^;
    하지만 제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부모님이 절 생각하시는 마음을 닮지는 못 할 것 같네요...
    맨날 투정부리고 짜증부리고...곧 후회는 하지만 ㅠ.ㅠ

    효도합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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