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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어온 박대통령시절
Korea, Republic o 언제나늘 7 866 2007-05-19 21:31:37
(탈북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남한사회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해서 이 글을 쓴다. 선거와는 상관없다. 아버지와 딸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암기가 빵점인 대신 기억력 하나 비상한 나는 지금도 걸음마를 겨우하던 당시 516쿠데타를 알리는 고향 파출소의 요란한 사이렌소리를 기억한다. 어머닌 북한이 또 쳐들어온게 아닌가 불안해 물으셨고, 625 군장교출신인 영감님은 군인들이 나라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거니 걱정말라고 하셨다.
60년대 초반 공주부근 내고향은 물맑은 자연그대로의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때묻지 않았고 인정이 많았다. 그러나 단 한가지 너무 가난했다. 영감님이 중학교선생이셨던 우리집엔 부근의 16,7세 소녀를 가정부로 잠시 두었는데, 어느날 도망을 갔다. 근처 산속에서 다음날 발견되었는데, 그 누나가 가져간 것이 마루 선반에 놓아둔 돈17원과 어머니가 쓰던 럭키치약과 칫솔이 전부였다. 꿈많은 시골소녀에게 쓰던 치약과 칫솔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 소금으로 양치질하던 시절이었다. 조부모제사를 위해 부산까지 1년에 한두차례 갈 때엔 큰아들이었던 나를 꼭 데리고 가셨다. 온종일 기차를 타고 가며 전봇대도 세게 하고, 별난 게 있으면 설명을 해주셨다. 천안에서 부산까지 근대식 공장은 달랑 1개인가 2개뿐이었다. 하나는 경북 어딘가를 지날 때 비료공장이었고 나머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지금은 이루 셀 수 없이 즐비하다. 대구에 진입하면 기차는 서행하였는데, 언덕위에 보이는 집들은 지금 인도네시아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빛바랜 소위 판자집들이었다. 애들은 지금은 거지도 안입는 더러운 옷을 입고 손을 흔들었다. 내기억으론 6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 일반 주택은 지금은 서울에서 찾기 힘든 70-80년대 달동네 집들이었다. 이후 붉은 벽돌의 가옥들이 많아졌다. 시골 사람들은 소위 백의민족이라고 여름엔 누런 삼베옷을, 그외엔 횐 무명옷을 주로 입었다. 40-50호인 시골마을에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집은 3-4가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까막눈들이었다. 나이 50만 넘으면 할머니가 되었고 60도 안되어 허리가 구부러져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서울엔 60년대까지 광화문 근처의 3층짜리인가 시민회관이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걸로 안다. 농촌에선 대부분 겨우 보리밥을 먹었다. 고기는 거의 명절때나 먹었고, 제과점의 빵,과자는 농촌아동들 대부분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촌 가게에서 파는 제과류 95%는 군소 업체가 만든 지금기준으로 전부 조잡한 불량식품들이었다. 학교에서는 미국이 무상원조한 옥수수가루로 죽을 쒀서 1년에 몇달정도 점심식사가 안되는 아동들에게 주었는데, 한 반에서 20-30명이 먹었다. 초가집은 낭만적이긴 하나 지금 만약 젊은이들이 보면 그 조잡함에 놀랄 것이다. 비좁고 불결하고 냄새나며 특히 옥외 화장실은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이용불가능할 더러운 곳이었다.
박대통령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서울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60년대 중반까지 남한 인구 95%가 시골에서 거주했다. 서울인구는 1백만 전후했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15,6세에서 20대 중반까지 꿈많은 시골 젊은이들에게 고향은 가난하고, 농사일이나 제공하고 문화는 너무 빈약했다.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온가족이 들러붙는 노동력 풍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농촌에서 인력이 부족하지만... 라디오로, 또 서울간 친구들에게서 전해오는 소식은 한참 발전을 시작한 현대도시의 새로운 별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특히 꽃피는 봄만 되면 시골마을에선 젊은이들이 뭉테기로 서울로의 탈북 아닌 탈고향사태가 80년대 초반까지도 되풀이되었다. 부모들은 현대세계를 전혀 이해 못하는 수구꼴통들이지 문화는 거의 없는데, 집은 보리밥술이나 겨우 뜨지....대개 중졸이거나 국졸, 고졸들이었다.(부모는 대개 까막눈). 서울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건 대기업과 구로공단의 힘든 생산직노동, 버스차장, 식모라고 부르던 가정부 등이었다. 당시 어염집엔 식모가 많았다. 이중 일부는 유흥가로 흘러 나머지 인생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눈부신 경제발전이 이들 대부분의 취업을 가능하게 했다.(이젠 다들 살게 되었고, 이들이 풍요로운 중산층으로 자리잡는 게 선진한국의 마지막 갈 길이다.) 이미 70년대 초반에 20만톤급 유조선이 건조되었다. 진수식에 참가한 박대통령이 외국인들이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럼 저 배는 나무로 만든 배냐고 호언했했다. 70년대 중반부터 우리 대기업들은 건설과 섬유, 전자, 자동차 등 제품으로 전세계시장에 나갔고, 대기업들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자유시장경제체제가 초기 뛰어난 지도력을 만났을 때, 재능있는 기업가와 근로자들이 어우러져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죽기전 70년대 후반 대기업들은 대졸초임을 3개월에 한 번꼴로 약 10%씩 올려댔다. 웬만한 대학의 상경계통 졸업예정자들은 대기업을 골라 들어갔고, 일부는 입사후에도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대기업입장에선 날로 확장되는 기업을 위해 신규인력들을 잡느라 야단이었다. 우수인력 유치를 위해 졸업후 7급공무원(당시 4급을) 5년 근무조건으로 대학 등록금 전액이 지급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거의 안갔다.
625가 끝난직후 남한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다. 5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60년대조차 좌우간 외국에서 어떤 박사학위라도 받고 귀국하는 숫자가 한 해 5명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아예 없는 해도 있었다.(지금은 미국박사학위소지자도 적당한 자리 얻기가 어렵다.) 전쟁과 가난, 무지, 게으름에서 박대통령 죽을 때까지 남한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근대화된 산업국가로 변모하였다. 70년대 중반 이미 벼품종개량과 비료증산으로 쌀수확량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어 농촌에선 거의 대부분 쌀밥을 먹었다. 70년대 후반 젊은이 85%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이미 이슴만대통령의 자유당 말기에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인구 98%가 전통적 농촌에 살던 때, 정당이 썩었고, 관료와 경찰조차 정치를 따라 흔들렸으며, 4.19후에 대학생들은 그 질서를 잡을 능력이 없었다. 그게 사실 당시 군대제외 남한 근대부문의 전부였다. 60만 대군을 유지하던 국군은 만연한 부정부패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으로 높은 애국심을 유지했다. 조국의 산봉우리 하나 더 차지하려고 돌진하다 무수히 사라져간 전우들을 두고 온 그들이었다. 근대화된 행정경험과 식견을 가진 당시로는 엘리트집단이었다. 미군은 한국군 고급장교들을 미국으로 데려가 수개월 이상씩 군사교육을 시키고 견문을 넓히게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625이후 소련, 중공의 대규모원조로 인민군을 강력한 군대로 양성하여 국군은 다시 열세에 놓여 있었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두 대통령후보가 다투는 모양인데, 국민들 꿈쩍도 안 할 만큼 남한사회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다양하고 체계적이고 잘 발전되어 있다. 516이전 당시 군장교들 대다수가 혼란하고 무능, 부패한 민간정부를 대체하여 남침위협하의 조국을 강력하게 발전시키는 데 동조하고 있었다. 지금의 잣대로 516쿠데타를 보는 건 맞지가 않다. 국군은 이나라 최후의 보루로 절박한 심정에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516은 불법적 권력찬탈행위였으며, 10월 유신은 꼭 필요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나라에 앞으로 절대 다시 독재정권은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너무 발달했고, 국민은 너무 깨어있다.
박대통령 당시에도 민주화투사들은 박대통령 경제발전을 비판만 하거나 백안시했다. 박대통령사후 1980년 봄 대학이 다시 개강했을 때, 오직 박대통령에 대한 성토와 비판만 가능했었을 뿐, 그의 훌륭한 치적에 대한 어떤 긍정적 평가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면 즉시 단상에서 끌어내려졌다. 그의 경제치적은 어떤 면에선 허물도 많다. 인간이 하는 일이므로....그런데도 그의 사후 수십년간 그와 그의 치적을 백안시함으로써, 더이상 한국경제의 비범한 발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1977년 미국의 저명한 주간지 타임은 중간에 대규모 특별부록을 넣어 한국을 호랑이새끼에 비유하고 세계무대에의 등장을 축하했다. "그들은 가진게 없다. 자본도 자원도, 그러나 거기엔 사람들이 있다. 위대한 사람들(Great People)이..." 그만큼 당시 민주화세력은 사실 빈약한 존재들이었다. 박대통령의 외골수정치가 양질의 인재가 배고픈 야당에 가게 하지를 않았다. 독재냐 민주냐의 도덕적 순수성에 기초한 흑백논리에만 의존한 건 돌이켜보면 아주 유감이었다. 그러나 그당시 빈약한 그들로썬 안그러면 독재에 다시 동조하게 된다는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 서서히 우리국민들도 민주주의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박대통령에 대해 보다 나은 평가를 하여야 한다. 지금 어느 장군이나 야심가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국민도 용납치 않을 뿐더러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정치에 큰 상관없이 잘 돌아가는데, 왜 자유를 제한당하여야 하나? 아마 조승희같은 정신병자나 희극배우만이 그럴 것이다.
2차대전후 독립을 얻었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제3세계 국가들에서 수많은 장군과 야심가들이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나같이 무능하고, 권력에 도취되어 부정축재에 눈멀고, 무자비한 피비린내나는 대규모 살륙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트렸을 뿐이다. 오직 박정희 이 인물만이 성공했다. 박대통령 사후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광주에서 수백명 시민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해 친북주사파가 등장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대통령은 우리에겐 복권 1등 당첨 같은 행운이었을 뿐이다. 그 1등 당첨 두 번 바란다면 불가능일 뿐이다. 박대통령은 잊고, 독재보다는 오손도손 정치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하는 민주주의가 우리조국의 최고, 최상의 정치체제이다.
박대통령이 기초했다는 국민교욱헌장을 그시절 학생들은 달달 외고 다녀야 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다함께 힘차게 전진하자". 그시절 그세대 누구나 그랬듯이 불행히도 일제치하에서 교육받고, 일본군사관학교를 거쳐 초급장교를 지내고 창씨개명까지 해야 했던, 그러나 그 세대가 그랬듯 아무 것도 없는 나라에서 기업가, 국민과 더불어 선진한국의 초석을 다져놓은 이 불세출의 지도자의 유언대로 우리는 기필코 선진강국이룩과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 부인과 같이 민족역사의 제단에 피를 뿌리고 그 죄를 안고 간, 재임기간을 통해 사생활 일부를 제외하곤 청렴하게 일생을 조국근대화에 바쳤던 위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독재, 가난의 어둠은 사라지고 이미 밝은 아침해가 떴으며, 이 밝은 햇살을 하루바삐 북녘의 동포들과 같이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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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욱 2007-05-19 21:50:48
    옳습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 서울 인구는 450만명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때 사회시험 본 생각이 나네요. 지가 종로에서 나서 자랐거든요... 어쨌든 정치나 사상은 어땠는지 몰라도 서민은 살기 좋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던 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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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2007-05-20 01:27:41
    멋진 글 잘읽었습니다.
    여기서 살아보진 않았지만 글속에서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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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랬어요 2007-05-20 02:11:37
    그 시절, 하루에도 몇번씩 "밥 좀 주세요~" 라고 하며 대문을 두르리는 거지는 골목마다 넘쳐 났었고 일반 서민의생활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던 시절이었지요. 일년에 몇번이나 쌀밥 구경했던지.... 매일 한손에는 19공탄을 새끼줄에 꿰어 들고 한손에는 밀가루 한되를 들고 만족스럽게 집으로 오곤 했지요. 그러나 보리쌀 한되라도 살 때면 어깨에 힘을 주고 의기양양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박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은 그당시
    시절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나 부정하게 축재하여 권력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온고이지신"이라하듯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언제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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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anlee 2007-05-20 04:33:46
    과거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한번쯤 보실만한 글입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답니다. 복권 1등당첨 과 비유되는 지도자, 참 적절한 비유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를 묵묵히 따랐던 대다수 국민들이 오늘을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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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0 11:06:45
    언제나 늘님/ 글 참 잘 보았고, 감동했습니다.
    남한의 흘러온 지난날 역사를 좌우 편향 없이, 정치,경제,문화, 군사분야를 간결하게 잘 편성하여 이해하기 쉽게 정말 글을 잘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루 하지않고 재미나게 글을 잘 쓰셨습니다.

    저는 박통을 존경해서라기 보다 남한민족의 50년역사를 한눈에 볼수있게 이런 좋은 글들을 쓸수있고 또 이런글에 동감하는 분들이 남한에 많다는것이 더 기쁠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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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헉!~~ 2007-05-20 11:13:27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물론 오늘에 오기까지 남한국민들의 피어린 노력도 중요한 몫을 차지 했지만 중요하게는 국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의 리더십입니다.
    북한도 북한주민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무능하고 폭압적인 정이리와 대세를 거역하는 북한체제의 존재때문입니다.
    북한주민들의 근면성과 아이큐지수가 결코 남한주민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개혁개방이라는 경계선을 터치한 그 한가지만 가지고도 박대통령은 가히 추앙을 받을 만 합니다.
    독재는 그 당시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였을까요?
    독재는 어떤 형태로든 용납이 될 수 없지만 남한을 빈궁에서 해방하고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공로는 충분히 인정을 받을 만 합니다.
    근본부터 완전 다른 정이리독재와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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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비군 2007-05-20 11:20:12
    정말 합리적 견지에서 잘 쓰신 글입니다. 글솜씨가 없어 답답했는데 제가 하고싶은 말이 다 모여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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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0 11:20:44
    제가 한가지만 더...

    우의 <헉>님 글대로 박통의 독재는 당시에 필요한 것이였다고 본다.

    만일 독재가 없었다면...
    저 사악한 반역자 김대중이 하루아침에 박정희를 민주화의 적으로 모함하여 내쫓고 이 남한 땅을 북한에 병합해 버렸을 것이였다.

    박정희의 과오는 김대중을 살려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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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비군 2007-05-20 11:32:38
    요래님은 대체 발제글을 읽고 무얼 느끼시고 감동하셨다는건지요? 님께서는 글을 보면서 스스로 검열해서 삭제하고 편한것만 보십니까? 어떻게 국민이 뽑은 전직대통령을 한사람은 영웅으로 한사람은 길거리 개돼지 만큼 취급하십니까?

    두분 모두 훌륭한 분들이고 대통령이 될만한 인품과 자격이 있기에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정책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인격적 비난은 삼가하십시오. 북의 김정일이와 같은 저능아와 비교할 생각 마십시오. 신성한 선거에 의해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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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비군 2007-05-20 11: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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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0 11: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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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여라 2007-05-20 1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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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 2007-05-20 15: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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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2007-05-20 16:17:04
    김대중전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자이지요
    국민을 욕하는 것과 같기에 인신공격성 욕설은 삼가해주세요
    저도 김대중 안좋아하는데 정책을 비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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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07-05-20 18:21:25
    위에 글처럼 저런 많은 과정을 거치고 국민들이 민주화해서 평화롭고 직접뽑은 대통령이오...그런 대통령을 요래 네가 뭔데 욕을 하오..
    그건 바로 그를 뽑은 모든 국민들을 모독하는거요..정책을 비판할수는 있어도 인물자체를 비판하는건 용납할수가 없오..
    그리고 북한인민들이 김정일을 직접 뽑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래서 모두가 김정일 만세 합창하길 바라시오? 본인말이 말도 안되는건 알죠?? 박정희전대통령이 잘한것도 있지만 못한것도 있듯이. 김대중 전대통령도 마찬가지요..잘한 부분은 칭찬하고 못한부분은 비판해야지..인간자체를 모욕하는건 그런 모든 수고마저 무시하는거요..박정희의 인물자체를 비난하는것도 마찬가지이듯이..거기에 대비되는것이 바로 김정일자체를 비난하는거요..그의 정책행위에 있어서 잘한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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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0 18: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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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 2007-05-20 18: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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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1 09: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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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만해라 2007-05-21 12:58:26
    자 자 자 자~ 그만들하세요...이런다고...

    무서워요 싸우니깐...쫌 더하면 모니터에 주먹질하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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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롱 2007-05-21 15:34:22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일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들 ★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국민의식개혁) 전개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 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 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 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양주군 노해면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 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 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 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 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 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 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 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 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 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 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 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 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 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 송전 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조사 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 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 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 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 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 중앙 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 복원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 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 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70년 10억불/77년 100억불/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성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 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 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렉스) 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국군장비현대화계획 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 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 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 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 정화, 현충탑 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 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 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 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 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 건설 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 3개년계획 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 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 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 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 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개최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 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 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 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 지역국립공원 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 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 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 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 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 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 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 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 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 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 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 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 9년으로 연장,교육제 신설,교원에게 병역 부여 등)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 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가능한 시스템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 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 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개발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 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 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계획 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 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 702개섬 개발계획 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 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 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 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 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한 UN 동시가입 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 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 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 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 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 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 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 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섬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 부설학교 및 특별학급 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 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 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건설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건설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 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수출 1백억불 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 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 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 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2월22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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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 2007-05-21 18: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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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래 2007-05-22 10: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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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jgj 2007-05-22 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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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지 2007-05-22 14: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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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ㅎ 2007-05-22 18:09:08
    마지막...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에 참석하고 돌아가셨조. 일도 많이 하셨네....이젠 배때지 부르니. 헛소리 들이지. 니들이 배고품의 괴로움을 알기나 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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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늘 2007-05-26 23:23:01
    내 개인적 생각으론 어쩌면 박대통령은 당대에 남한을 선진국으로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명치유신이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70년대에 조선,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을 막대한 외국돈을 빌려 건설했는데, 70년대초에 중동 산유국들이 그전엔 미국, 유럽 정유사들이 차지했던 유전을 국유화하고 유가를 폭등시켰습니다. 그 결과 원자재가격이 올라가고 세계경제가 돌연 위축되어 초기 중화학제품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안 팔렸습니다. 70년대 10월유신을 선포하고 독재를 하였는데, 긴급조치를 17호인가까지 1년에도 몇번씩 선포하고 해제하는 불안한 정권이었습니다. 독재를 무릅쓰며 선진국을 만들려 했는데, 뜻대로 안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70년대 후반 다시 유가가 폭등하고 세계시장이 위축되고, 민주화요구는 거세고...아마 말년 박대통령은 자신의 쇠락을 알았을 겁니다. 호랑이를 그리려 했는데 호랑이새끼 그리는데 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 아는 박대통령보다는 위대한 인물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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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늘 2007-05-26 23:31:29
    박대통령이 공산당 전적이 있으나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625전 김창룡 특무대장의 군부내 좌파숙청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혐의만 있어도 모조리 총살시켰습니다. 당시 참모총장 등 요직의 장군들도 이승만 특명을 받은 김창룡이 무서워 숨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와중 국군이 공산군과 싸우는데, 아무리 인재가 필요해도 절대 다시 국군 수뇌부가 군에 복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를 살려주고 복권시킨 이유가 군내 조직책이나 활동한 바가 없고, 조직을 모두 실토하고 완전히 전향했다는 건데, 만약 활동을 했다면 전향이고 나발이고 김창룡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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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늘 2007-05-26 23:55:13
    그럼 왜 박정희소령이 공산당에 가담했느냐? 815해방 당시 남북 지성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좋은지 공산주의가 좋은지 잘 몰랐습니다. 해봤어야 알지. 그런데 모든 인민들이 평등하게 빈부격차없이 잘 살자는데 혹하지 않을 사람 어디있었겟습니까? 당시 식자계층중 의식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전부 한 번쯤은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발 한 번 담궈봤습니다. 이상적인 좋은사회 만들자. 그런데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이를 위해 지주, 자본가, 종교인 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독재를 시작하자, 현실에 그만 실망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박정희 정도 똑똑한 인물이 공산주의에 한 번 동조할 만 했던 겁니다. 거기다 그를 아끼던 둘째형이 공산주의자였는데, 골수분자는 아니었지만 토벌과정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번 발을 담궜던 것 같습니다.
    아뭏든 그의 독재를 지지할 수는 없으나, 너무 수준없이 그를 비난하는 건 좀 웃깁니다. 그의 독재와 경제를 비난해야지.....
    6,70년대 박대통령은 반공을 입에 달고 다녔으며, 전국 어느 곳에서나 이런 표어와 대형 선전문구가 가득했습니다."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그것도 무시무시한 빨간글씨로. 젊은 세대들은 안 살아봐서 이해가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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